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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자만심과 주눅듦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야수성에 관하여

자만심과 주눅듦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시합을 앞두고 두 스파링을 복기해보았다. 나는 왜 일반 회원을 주저앉히지 못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국대상비군에게 바디샷을 맞고 주저 않았을까? 전자는 자만했기 때문이었고, 후자는 주눅들었기 때문이었다. 실력 차가 나는 일반 회원을 상대로 유효타를 많이 적중시키지 못했던 표면적 이유는 내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과도하게 밀어붙이느라 거리 유지에 실패했던 걸까? ‘애 정도는 빨리 쓰러뜨릴 수 있어!’라는 자만심 때문이었다. 그 자만심 때문에 오히려 유효타를 많이 적중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국대상비군에게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허우적대가 명치를 맞고 주저 않은 이유는 분명 실력 차 때문이었다. 하지만 웬만큼 실력 차가 나더라도 스파링에서 다운은 잘 나오지 않는다. 내가 그날 링 바닥에 주저앉았던 이유는 상대의 명성이나 실력에 이미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주눅이 들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못했고, 그만큼 상대는 더 자신감이 생겼던 걸일 게다. 그래서 14온스 글러브를 끼고도 다운을 당한 것이다. 



 만약 내가 일반 회원을 상대로 자만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유효타를 적중시켰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가 국가대표상비군을 상대로 주눅 들지 않았다면, 링 바닥에 주저 않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삶을 돌아보니 그렇다. 나는 종종 자만심과 주눅듦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평소 자신 있는 과목이라고 자만하다 그르친 시험이 많았다. 또 조금만 어려운 과목은 애초에 주눅이 들어 공부할 엄두도 못 내다 시험을 망친 적도 많았다.


 비단 나만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세상에는 나보다 힘이 약하고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 앞에서 우쭐되고 잘난 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또 나보다 힘이 세다고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되는 사람 앞에서 얼마나 스스로 검열하고 위축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던가.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던 게다. 약자 앞에서 강하고, 강자 앞에서 약한 사람들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가. 자만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그르치고, 주눅 들어서 해야만 하는 일을 그르치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야수성에 관하여

두 번의 스파링을 통해 하나의 질문이 생겼다. ‘자만심과 주눅듦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 임박한 프로 시합을 잘 해내기 위해서도 중요하고, 그 뒤에 이어질 내 삶을 잘 살기 위해서도 중요한 질문이다. 내가 나름 찾은 답은 ‘야수성’이다. 자만하지도 않고 주눅 들지도 않는 삶을 위해서는 ‘야수성’이 필요하다. 야수는 결코 자만하지도 주눅 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야수성을 가진 짐승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자신보다 약한 먹잇감을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결코 자만하는 법이 없다. 동시에 자신보다 강한 자가 위협해도 이빨과 발톱을 세워 마지막까지 저항한다. 결코 주눅 드는 법이 없다. 내게는 이 야수성이 없었기에 일반회원 앞에서 자만했고, 국대상비군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게다. 야수성에 대해서 꺼림칙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야수성은 인간적 가치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야수성은 야만성과 다르다. 야만성이 무분별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야수성은 최소한의 폭력을 행사한다. 야수성을 가진 맹수들은 먹어야할 때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만, 배고프지 않을 때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동물은 야수적이지만 야만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인간이 더 야만적이다. 자기 배가 불러도 끝없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타인에게 무분별한 폭력을 행사하니까 말이다.


 일류 복서들의 눈빛에는 언제나 야수성이 넘친다. 어떤 상대를 만나도 자만하지도 주눅 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하다. 나 역시 그런 야수성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약한 자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않고, 강한 자 앞에서 위축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또 쉬운 일 앞에서 자만하지 않고, 힘든 일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항상 침착하고 차분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야수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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