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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버릴 수 있는 만큼 강해진다.

부상에 대처하는 자세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부상

뒷손이 나오는 걸 기다렸나보다. 상대는 뒷손 훅을 피하는 동시에 옆구리에 펀치를 꽃아 넣었다. 순간 ‘억’하는 소리가 나왔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파링은 잠시 멈춰졌고, 관장도 이상한 걸 느꼈는지 계속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잠시 고민했다. 분명 평소에 바디에 맞았던 펀치와는 느낌이 달라기 때문이었다. ‘겨우 스파링조차 포기하는 놈은 될 수 없다’는 마음 때문에 ‘계속 하시죠!’라고 말한 뒤 스파링은 이어졌다.


 정말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걸까? 맞은 걸 돌려주어야겠다는 평소보다 펀치에 더 힘이 들어갔다. 아까와 정확히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 상대는 크게 휘두르는 내 뒷손 훅을 기다렸다는 듯이 몸 쪽으로 파고들며 옆구리를 강한 펀치를 꽃아 넣었다. ‘으~으억!’ 마우스 피스를 뱉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바디샷을 많이 봤지만 이번 건 느낌이 달랐다. 보통은 명치나 옆구리를 강하게 맞아서 주저앉아도 몇 분이 지나면 괜찮아지곤 했지만 이번 건 달랐다. 



 누운 상태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했다.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숨이 막혀오고 옆구리에 지옥 같은 고통이 몰려왔다. 한참을 링에 엎드려 있다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갔다. 겨우 누워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갈비뼈 골절이란다. 처음 느껴보는 통증의 정체는 갈비뼈 골절이 원인이었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갈비뼈 골절은 뾰족한 치료법이 없다는 의사 말이었다. 갈비뼈는 깁스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뼈가 붙을 때까지 쉬는 방법 외에는 치료법이 없단다.


 갈비뼈가 골절되고 내가 제일 두려웠던 건 ‘재채기’였다. 재채기를 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게 되어 옆구리가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재채기가 나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내리 한 달을 쉬기만 했다. 한 달을 쉬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부상당한 것을 후회했다. 한참 실력이 늘어가고 있었는데, 부상 때문에 아무런 훈련도 못하니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처음 바디샷 맞았을 때 오바하지 말고 그냥 그만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종종 났다.



무엇인가를 ‘얻어야’ 강해진다.

복싱에서 강해진다는 게 뭘까? 그건 아마 누구에게도 지지 않게 된다는 말과 같은 의미일 게다. 그럼 어떻게 지지 않게 될까? 그건 무엇을 얻어야 한다. 체력이든, 기술이든, 경험이든 무엇을 얻어야 강해지게 된다. 어제보다 무엇 하나라도 더 얻어야지 강해진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부상으로 훈련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분하고 짜증나고 후회가 되었던 것이다. 부상 때문에 체력, 기술, 경험도 더 이상 얻지 못하게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프로 복싱 전 세계챔피언 최용수 선수의 시합을 실제로 본적이 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로 13년만의 복귀전이었다. 이제 갓 서른이 된 일본 선수를 상대로 두 차례나 빼앗아내며 결국 상대를 링 바닥에 주저 앉혔다. 그날 최용수 선수는 강했다. 그런데 그 강함은 내가 알고 있는 그런 강함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얻어서 강해진 것 아닌 것 같았다. 1라운드부터 8라운드까지 현란한 스탭이나 움직임은 없었다. 가드를 바짝 붙인 상태로 상대를 압박하며 공격했다.


 최용수는 상대 선수에게 강한 펀치를 굉장히 많이 허용했다. 시합이 끝난 뒤 최용수 선수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만큼 최용수는 상대 선수에게 강한 펀치를 많이 허용했던 게다. 매 라운드가 시작될 때마다 비장한 표정으로 성호를 긋는 최용수 선수의 모습에서 강하다는 건 어쩌면 무엇인가를 얻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흔 넷의 나이, 13년만의 복귀전에 최용수는 어떤 심정으로 링에 올랐을까? 아마 ‘모든 것을 잃어도 좋다’ 심정으로 올랐을 것이다. 시합 내내 그런 결기가 느껴졌다.



버릴 수 있는 만큼 강해진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누구보다 강했기에 심장을 뛰게 했던 파이터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하나 같이 ‘오늘 여기서 모든 걸 잃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상대와 치고받는 파이터들이었다. 부상 따위는 어찌 되었던 상관없다는 각오로 상대에게 맞섰기에 그들은 상대를 질려버리게 할 정도로 강해질 수 있었던 게다. 나는 그걸 놓치고 있었다. 링에서 오직 둘이서 치고받아야 하는 사람이 복서다. 그때 분명 강한 사람이 이긴다. 그리고 더 강한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버릴 수 있는 각오가 된 사람이다.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부상당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으로 링에 올라서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주춤거릴 수밖에 없다. 결국 강하다는 건, 얼마만큼 버릴 수 있느냐와 결부된 문제다. 체력, 기술, 경험을 ‘얻어도’ 자신의 전부 혹은 일부를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강해질 수 없다. 복서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부상은 피할 수도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부상을 피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굳이 부상을 찾아 나설 필요야 없겠지만, 결정적 순간에 부상이 두려워 주춤 거려서는 안 된다. 무엇인가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언제나 주눅 들어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다. 역설적인 것은 부상을 당할 각오로 상대에게 당당히 맞서다보면 오히려 부상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부상 따위는 당해도 좋다는 각오에 상대가 기가 눌려 뒤로 물러서기 때문이다. 이제 분명히 알겠다. 강해진다는 건, 분명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버릴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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