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피해의식, '당위'와 '현실' 사이의 혼동

‘당위’와 ‘현실’ 사이


“돈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세금을 더 많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
“그래서 넌 지금 부자들이 잘했다는 거야?”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세금 안내는 부자들은 다 박멸을 해버려야 돼.”


 ‘민찬’은 ‘당위’와 ‘현실’을 혼동한다. ‘당위’는 무엇인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은 ‘지금 그런 것(현상)’이다. ‘돈이 많은 이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것’은 ‘당위’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당위’와 별개로 ‘현실’(현상)은 그렇지 않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를 이용해 합법적 절세를 하거나 불법적 탈세를 한다.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이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민찬’은 이 ‘당위’와 ‘현실’을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바로 피해의식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그 중 심각한 문제가 바로 ‘당위’와 ‘현실’의 혼동이다. 피해의식은 ‘당위’(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와 ‘현실’(지금 그런 것)을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어 그 둘을 혼동하게 만든다.

      

 ‘민찬’은 돈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그 피해의식은 온갖 종류의 부정적 감정(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들을 양산했다. 그렇게 양산된 부정적 감정들은 서로 뒤엉켜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마비시키게 마련이다. 바로 그 때문에 ‘민찬’은 조금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구분할 수 있을,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위’와 ‘현실’을 혼동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킬까?      



피해의식의 두 해악, 불통과 파멸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불통이다. 피해의식으로 인해 발생한 ‘당위’와 ‘현실’의 혼동은 소통을 막아버린다. “돈 많은 사람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 ‘민찬’의 ‘당위’적 이야기에 친구는 답했다. “그렇긴 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 이는 그저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민찬’은 갑자기 흥분하며 친구를 공격적으로 비난했다. “너 지금 부자들이 잘했다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어떤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이처럼, ‘당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면 크고 작은 관계의 불통이 발생하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파멸이다. ‘당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면 파멸에 이르게 된다. 이 파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자기 파괴적인 파멸’과 ‘현실 파괴적인 파멸’이다. 유사 이래 ‘당위-현실’ 사이에 간극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과 ‘지금 그런 것’ 사이에는 늘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어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존엄해야 한다는 것은 ‘당위’다.


 하지만 ‘현실’은 어땠을까? 유사 이래 현실은 노예제, 봉건제, 공산제, 자본제를 거치는 동안 단 한 번도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존엄했던 세상이었던 적은 없다. 늘 더 많은 권력을 가진 특정한 계급(주인‧영주‧당‧자본가)이 있어왔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당위-현실 사이에는 늘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어왔다. 하지만 피해의식은 ‘당위-현실’ 사이의 간극을 성찰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거창한 거대담론이 아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시험에 떨어진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열심히 노력하면 시험에 붙어야 한다. 이는 ‘당위’다. 하지만 이 당위적인 일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그 아이가 이 자명한 삶의 진실 앞에서 혼란을 겪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 아이는 시험에 떨어진 자신을 원망하거나 아니면 열심히 노력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게 된다. 전자는 ‘자기 파괴적인 파멸’로 이르는 길이고, 후자는 ‘현실 파괴적인 파멸’의 욕망에 휩싸이게 되는 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을 원망하는 이는 결국 자기 파괴적인 될 수밖에 없고, 세상을 원망하는 이는 세상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욕망이 휩싸일 수에 없으니까 말이다.

       

 ‘민찬’ 역시 그런 상태다. “세금을 안내는 부자들은 다 박멸해야 한다.” 이 위험하고 폭력적인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이는 ‘당위-현실’의 간극을 성찰하지 못해서 발생한 사달이다. 이런 과격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파멸’로 가거나 ‘현실 파괴적인 파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당위’적인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때, ‘민찬’은 과도하게 분노할 수밖에 없다. 이 분노는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자기 파괴적인 파멸’ 혹은 ‘현실 파괴적인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어쩌다 마주친 철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