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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 자기파괴적이 되거나 현실파괴적이 되거나

‘자기파괴적’이 되거나 ‘현실파괴적’이 되거나


피해의식은 ‘자기 파괴적인 파멸’로 이끈다. 이런 사례는 흔하다. 세상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와 거짓과 위선이 판을 치는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이를 알고 있다. 그는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했다. 뒷돈을 주거나 아첨을 하지도 않고 묵묵하고 성실하게 일했다. 하지만 그는 꽉 막히고 고지식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갖가지 불이익을 받고 끝내는 직장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세상은 정직하게 돌아가야만 한다고 믿었던 그는, 부조리한 세상을 원망하며 술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당위-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수많은 이상주의자들이 너무나 쉽게 자기 파괴적인 길로 들어서게 되는 이유다.      


 피해의식은 ‘현실 파괴적인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당위-현실’을 혼동해서 발생한 분노는 엉뚱한 곳으로 튈 수도 있다. 이 분노는 현실 세계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으니 현실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현실 파괴적인 파멸’의 욕망에 휩싸이게 된다. ‘민찬’의 분노가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향하게 될 수밖에 없다. 마땅히 실현되어야 할 ‘당위’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때, ‘민찬’은 부자들을 박멸해서 현실을 파괴하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과 페미니즘


 이런 피해의식의 문제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일부 사회‧정치적 운동은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다. 피해의식을 충분히 극복하지 못한 사회‧정치적 운동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그 중 심각한 문제가 바로 불통과 파멸이다. 페미니즘을 생각해보자. 페미니즘은 역사적으로 억압받아왔던 여성의 권리와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사회‧정치적 운동이다. 하지만 일부 페미니즘은 피해의식에 휩싸여, ‘당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남자들은 남자라는 이유로 많은 혜택을 누려 왔잖아. 그러니 이제 여자들의 권리가 더 중요해야 져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
“너 지금 남자편 드는 거야? 남자들만 없어지면 다 해결 돼!”


 피해의식에 휩싸인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당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여성의 권리와 지위가 향상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위’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여전히 기득권은 남성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당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 그 사이의 간극을 보지 못한다. 그저 ‘당위’가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고, ‘당위’가 ‘현실’이 되지 않는 상황에 분노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과 대화는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소통이 없어지면 소외가 발생하고 이는 결국 ‘자기 파괴적 파멸’이나 ‘현실 파괴적인 파멸’로 이어지게 된다.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의 정치‧사회적 운동은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 이는 비단 페미니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사회를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고 나가려는 많은 사회‧정치적 운동에서 반복되고 있는 일이다. 피해의식을 극복하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정치적 운동일지라도 없느니만 못하다. 그것은 결국 불통과 파멸만을 낳을 테니까 말이다.     



피해의식이 혁명이 아닌 난동이 되는 이유

     

 이는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너 죽고 나죽자”식의 ‘자기 파괴적인 파멸’과 ‘현실 파괴적인 파멸’이 얼마나 많은지를 돌아보라. 이는 ‘혁명’이 아니라 ‘난동’일 뿐이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난동. 이런 난동은 왜 일어났을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피해의식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 피해의식을 충분히 극복하지 못한 이들의 세력화 때문이다. 불통으로 인한 소외, 그로 인해 촉발된 (자기 혹은 현실 파괴적)파멸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난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은 파괴적인 ‘난동’을 일으킬 순 있어도 생성적인 ‘혁명’을 일으킬 순 없다. 물론 혁명도 난동처럼 무엇인가를 파괴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난동의 파괴는 ‘파멸을 위한 파괴’이고, 혁명의 파괴는 ‘생성을 위한 파괴’이다. 이는 당연하다. 난동을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없다.  왜 난동을 부리게 될까? ‘당위’와 ‘현실’ 사이에 혼란을 겪기 때문에 ‘당위’와 ‘현실’을 매개할 대안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은 세상을 파괴해서 파멸하고 싶은 마음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혁명은 다르다. 혁명 역시 무엇인가를 파괴하지만 이는 새로운 세상을 생성할 수 있다. 혁명은 ‘당위’와 ‘현실’을 명료하게 구분하는 이들이 일으키기 때문이다. ‘당위’와 ‘현실’을 명료하게 구분하는 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이들은 ‘당위’와 ‘현실’을 매개할 대안, 즉 ‘당위’적인 ‘현실’을 구현할 방법을 찾게 된다. 그래서 혁명은 무엇인가를 파괴하더라도, 그 파괴는 생성을 위한 파괴다.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세상을 바꾸는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혁명의 시작은, 피해의식의 극복이다. 혁명은 ‘당위-현실’을 명료하게 구분하고, 그 사이의 간극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피해의식을 극복하지 못한 이들이 생성적인 혁명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현실’은 왜 ‘당위’적인 ‘현실’이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하고, ‘당위’적인 ‘현실’이 되어야 한다고 떼를 쓸 뿐이다. 그들은 ‘당위-현실’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방법을 생각할 수 없다.      


 이는 지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달리 말해, 더 아는 것이 없다고 난동을 부리게 되거나 더 많이 공부한다고 혁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아는 것이 없어도 혁명을 할 수 있고(동학농민운동!), 아는 것이 많아도 난동을 부릴 수 있다(1‧2차 세계대전!). 많은 배운 이들 중에 자신의 피해의식을 극복하지 못해 불통이거나 파멸의 욕망에 휩싸인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반면 아는 것이 없거나 적어도 자신의 피해의식을 성찰해서 극복하면 자신도 세상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피해의식을 성찰하고 치유하는 일이다. 이것이 파괴적인 난동이 아닌 생성적인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첫걸음이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가? 억압받아왔던 여성의 권리와 지위를 향상한 세상을 꿈꾸는가? 아니 그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꿈꾸고 있는가? 책과 세상에서 눈을 떼고 먼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라. ‘당위’와 ‘현실’을 혼동하게 만드는 우리 안의 피해의식을 잘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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