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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철학을 마주쳐야 하는 이유

마주침의 존재론, ‘공空’과 ‘틈’

1.

왜 ‘철학’과 마주쳐야 할까요? 삶의 진실을 보기 위해서죠. 그렇다면 삶의 진실은 왜 보아야 할까요? 바로 그곳에 우리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습니다. 철학과 마주쳐야 하는 이유는 어제보다 기쁘게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철학’과 마주쳐 도달해야 하는, 우리에게 기쁨을 선물해줄, 삶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이 공하다.”      


 불교의 이 오래된 가르침이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공空’ 무엇일까요? 이것을 흔히 ‘없음無’ 혹은 ‘비어 있음empty’로 번역되는데, 이는 적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空’은 ‘(무엇이든 될 수)있음有’ 혹은 ‘틈clearance’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난해한 ‘공空’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해보죠.


 지금 우리의 눈앞에 컵이 하나 있습니다. 이 컵은 ‘공空’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컵이 ‘없다’거나 ‘비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제로 컵은 바로 우리의 눈앞에 있으니까요. 컵이 '공'하다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해, 그 컵은 ‘틈’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컵은 ‘공’한 것입니다. 여전히 난해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볼까요?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컵은 어떻게 존재할까요? 공장, 모래, 열, 도구, 사람…등의 원인들을 통해 만들어진 거죠. 컵은 그 수 없이 많은 원인들이 만들어내는 ‘무엇이든 있을 수 있는’ 어떤 것이죠. 그릇도, 주전자도 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컵이 특정한 원인들의 마주침에 의해 잠정적으로 컵이 되었을 뿐이죠. 그것은 마치 주변 지형들의 미세한 변화에 의해 순간적으로 모양을 달리하는 ‘틈’이죠. 그래서 그 컵이 컵일 수 있었던 수많은 원인들 중 하나의 원인만 바뀐다면, 그 ‘틈’(컵)은 사라지고 다른 모양의 ‘틈’(컵)이 되어버리겠죠.


 아니, 이것은 가정이 아닐 겁니다. 우리가 지각할 수 없을 뿐, 컵(틈)은 이미 조금씩 마모되어 가고 있을 테니, 그 ‘틈’(컵)은 이미 사라져가고 있겠죠. 수많은 원인들에 의해 생성된 ‘컵(틈)’은,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었던 잠재적 가능성을 품은 채로 잠시 ‘컵(틈)’이 되었다, 다시 ‘컵(틈)’이 아닌 것으로 되어가고 있는 셈이죠. 이것이 바로 컵(틈)이 ‘공’인 이유입니다. ‘컵’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틈’이니까요.      


 모든 것이 ‘공’하다면, 우리 역시 ‘공’하죠. 우리 역시 수많은 원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틈’입니다. 부모‧친구‧학교‧음식‧음악‧연인‧직장‧영화… 등 수많은 원인이 만들어내는 ‘틈’이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고정된 ‘나’는 없고, 잠정적인 변화 가능성(무엇이든 될 수 있음)의 ‘나’만이 있는 것이죠. ‘나’는 ‘틈’이니까요. ‘틈’을 만들어내는 주변 요소들 중 하나만 더해지거나 빠지거나 자리가 바뀌면 전혀 다른 ‘틈’이 되어버리니까요. 이것이 몇몇 학자들이 공空을 ‘열려 있음openess’으로 번역하는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공’이 ‘틈’이라면, 그 ‘틈’은 언제든 다른 어떤 존재가 될 수 있게 무한히 ‘열려 있는’ 것이니까요.


  “모든 것이 공하다.” 이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불행해질까요? 자신이 다른 어떤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믿을 때입니다. 쉽게 말해, 영원히 월급쟁이인 나, 영원히 소심한 나, 영원히 연애하지 못할 나, 영원히 돈에 쪼들리는 나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죠. 하지만 모든 것이 ‘공’하듯, 우리 역시 ‘공’하죠.


 ‘나’는 수많은 원인들을 통해 형성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틈'이죠. 그 틈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죠. 늘 미세하게 혹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죠. 마치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모양을 바꾸고 있는 세포막처럼 말이죠. 이는 너무나 자명하죠. ‘나(틈)’를 구성하고 있는 ‘원인(부모‧친구‧학교‧음식‧음악‧연인‧직장‧영화…)’은 매순간 조금씩 변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불행으로부터 벗어나 행복으로 다가설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고난과 고통 앞에서도 의연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2. 

이제 우리는 왜 철학과 마주쳐야 하는지에 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과 마주치며 살아가죠. ‘마주침’은 무엇일까요? 지하철에서 스쳐지나가는 이들과의 마주침? 가족들과 마주침? 직장 동료와의 마주침? 그런 무의미하거나 익숙한 것들과의 마주침은 엄밀한 의미에서 마주침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마주침은 일종의 사건이죠. ‘나’와 차이 나는 것들과의 강렬한 만남, 그래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으로서의 마주침. ‘교통사고’와 ‘사랑’은 대표적인 마주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왜 이런 사건과 마주쳐야 할까요? 그 마주침을 통해 새로운 ‘틈’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마주침은 ‘나’를 구성하는 원인들을 추가, 제거, 전치(자리바꿈)시키면서 ‘틈’을 발생시키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마주침이 의미 있는 ‘틈’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마주침은 ‘틈’을 거의 생성‧변화시키기 못하고 어떤 마주침은 큰 ‘틈’을 생성하고 변화시키니까요. 우리는 어떤 마주침을 통해 기쁨의 ‘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차이는 스스로 자신의 주름을 펼치면서 그 체계를 창조한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들뢰즈는 어떤 존재이든 그것은 ‘차이’를 통해 ‘생성’된다고 말합니다. 즉, 큰 차이가 큰 생성을 만드는 것이죠. 어떤 차이가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주름(틈)을 펼치면서 체계를 창조하게 되죠.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죠.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는 사람과 ‘나’와 전혀 다른 이를 만나 연애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죠. 누가 더 큰 ‘틈’을 발생시키게 될까요? 단연 후자일 겁니다. 작은 차이는 작은 생성을 만들고, 큰 차이는 큰 생성을 만들게 되니까 말입니다.


 ‘철학’은 마치 ‘나’와 너무 큰 차이가 나는 연인과 같은 존재일 겁니다. 때로 낯설고 어렵고 불편한 연인과 같죠. 하지만 그런 연인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의 ‘틈’은 커지고, 다양해지겠죠. 차이를 통해 사랑을 생성했던 이들은 다들 알고 있죠. 그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림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음악이 들리고, 읽히지 않았던 시가 읽히고, 보지 않았던 영화가 보이고. 관심 없던 이들이 보이게 되죠. 이런 기적 같은 일은 어떻게 일어난 걸까요? 그것은 커지고 다양해진 ‘틈’ 때문에 일어난 일들일 겁니다. 그 ‘틈clearance’을 통해서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명확하게clear! 보이고 들리고 느끼게 된 것이죠.


여러 인연因緣으로 발생한 존재를 나는 공이라고 말한다.” 중론』 나가르주나 

     

 최고의 불교 이론가인 나가르주나는 ‘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러 인연으로 발생한 존재가 공이죠. ‘공’(무엇이든 될 수 있는 틈)은 원인과 조건으로 배치 그 자체입니다. 어쩌다 여러분께 닿은 이 ‘철학’이, 또 이 ‘철학’을 통해 어쩌다 닿게 할 여러 존재들이 여러분의 ‘공’성을 발견하고 긍정할 수 있는 인연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틈’을 펼치고 다양화하면서 자신만의 체계를 창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자신의 체계를 창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진정으로 기쁜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쩌다 철학을 마주쳐야 할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혼이 담긴 홍보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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