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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 : 생성, 파괴, 퇴행

부정은 차이다. 그러나 작은 쪽에서 본 차이, 낮은 곳에서 본 차이다. 이와 거꾸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다시 바로 세워놓고 보면, 차이는 긍정이다. 하지만 이 명제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령 차이는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 긍정 자체는 다양체의 성질을 띤다는 것, 긍정은 창조라는 것, 그뿐 아니라 긍정은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긍정은 차이를 긍정하는 긍정으로, 그 자체가 차이인 긍정으로 창조되어야 한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차이는 생성을 만든다. 오직 차이만이 생성을 만든다. 차이 없는 것들 사이에서는 아무 것도 생성되지 않는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와 ‘영화’를 좋아하는 ‘너’가 있다. 이 둘이 만나 차이가 발생할 때, ‘뮤지컬’이라는 욕망을 생성해낸다. 이는 만약 둘 모두 ‘음악’을 좋아했거나, 둘 모두 ‘영화’를 좋아했다면 결코 생성될 수 없는 욕망이다. 이것이 들뢰즈의 ‘차이’다.     

 

 들뢰즈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애를 썼다. 나와 차이 나는 존재들과 마주치려고 애를 쓰며 살았다. 들뢰즈는 옳았다. ‘나’와 차이 나는 ‘너’를 만날 때 마다 무엇인가 생성되었다. 내게 없었던 것들이 생성되었고, 나 자체가 다른 존재로 생성되었다. 차이는 생성이고, 이는 기쁨이다. 차이를 껴안으며 생성하면 할수록 삶은 더 기뻐진다. 이 삶의 진실을 머리가 아닌 심장(신체!반복!)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들뢰즈의 이야기가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네 삶을 돌아보라. ‘나’와 차이 나는 ‘너’를 만나 '파괴'되거나 '퇴행'하는 일이 얼마나 흔하게 일어나던가? '파괴'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차이가 너무 큰 경우이다. 차이는 생성을 만들지만, 이는 생성이 가능할 임계치 안의 차이일 때만 그렇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와 ‘영화를 좋아하는 너’의 차이를 통해 ‘뮤지컬을 좋아하는 우리’가 생성된 것은, 그 둘 사이의 차이가 생성 가능한 임계치 안의 차이였기 때문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와 ‘주식을 좋아하는 너’의 차이는 서로를 파괴하게 된다. 그 차이는 생성 가능한 임계치 밖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퇴행'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특정한 두 대상의 '차이'가 생성 가능한 임계치 안에 있더라도,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고 오히려 퇴행하게 될 때가 있다. 같은 선분 안의 차이인 경우가 그렇다. 같은 선분 안의 차이는 무엇인가?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학을 떠난 A가 있다. 그녀는 우연히 그곳으로 출장으로 온 야심 넘치는 직장인 B를 만났다. 둘은 보름 동안, 낯선 도시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무엇인가를 생성했을까? 그렇지 않다. 둘은 모두 퇴행했다. A는 직장인으로 퇴행했고, B는 가난한 삶으로 퇴행했다.


 왜 이런 퇴행이 일어났을까? A와 B 사이의 '차이'는 같은 선분 안의 차이였기 때문이다. A는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고(1), 그것이 싫어서 돈을 많이 주는 회사에 취업을 했고(2), 다시 그 삶을 벗어나 음악을 하는 삶(3)으로 지나가고 있다. A의 삶은 1→2→3을 지나는 선분이다. B의 삶은 어떤가? B는 가난한 유년시절이 싫어서 안정적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인이 되었다. B의 삶은 1→2을 지나는 선분이다. B의 삶은 A의 삶 안에 있다. 


 둘은 분명 '차이'가 나지만 이는 같은 선분 안의 차이다. 정확히는 B의 선분(1→2)은 A(1→2→3)의 선분 안에 있다.  이런 '차이'는 '생성'도 '파괴'도 아닌 '퇴행'을 야기한다. A는 B를 사랑하게 될수록, 안정적인 직장인의 삶으로 퇴행하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B역시 A에게 빠져들수록 가난한 유년시절로 퇴행할 것 같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모든 차이가 기쁜 삶을 생성하는 것은 아니다. 기쁜 삶을 생성할 수 있는 임계치 안의 차이만이 그렇다. 또한 같은 선분이 아닌 다른 차원의 선분의 차이만이 기쁜 삶을 생성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이론은 수정되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차이가 기쁜 삶을 생성한다. 임계치 밖의 차이는 ‘차이’가 아니라 ‘독’이고, 같은 선분 안의 ‘차이’는 ‘(시차의 차이만 있는) 동일성’이기 때문이다. ‘독’,  ‘(시차의 차이가 있는) 동일성’은 부정이다. 하지만 부정 역시 차이다. 다만 작은 쪽에서 본 차이, 낮은 쪽에서 본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거꾸로 높은 곳에서 다시 바로 세워놓고 보면, 다시 이 '차이'는 긍정이 된다. 들뢰즈의 말처럼 “이 명제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차이는 긍정의 대상”이고, “긍정 자체는 다양체의 성질”을 띠고 있다. 그러니 “긍정은 창조할 수 있고, 창조되어야 한다.” 어떤 차이는 부정, 즉 '독'이고, '동일성'이다. 이는 우리를 '파괴'하고 '퇴행'하게 만든다. 이 부정적 차이를 어떻게 거꾸로 세워 긍정할 것인가? '독'으로 기쁜 삶을 생성할 수 있는 역량과 지혜가 필요하다. 같은 선분의 차이를 다른 차원의 선분으로 옮겨가게 할 수 있는 역량과 지혜가 필요하다. 그때 “차이를 긍정하는 긍정으로, 그 자체가 차이인 긍정으로 창조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역량과 지혜가 없다면 '독'과 '동일성'은 피해야 한다. 그 '독'과 '동일성'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퇴행시켜 우리네 삶을 슬픔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게 될 테니까. 


 들뢰즈의 이론은 (아직) 수정될 것이 없다. 하지만 들뢰즈의 이론을 바라보는 시선은 수정되어야 한다. 차이를 결코 낙관주의적 시선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런 순진한 시선으로는 들뢰즈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들뢰즈를 머리가 아닌 심장(신체!반복!)으로 깨달은 이들은 안다. "긍정은 창조할 수 있고, 창조되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낙관적으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독'과 '동일성'을 거꾸로 세워 차이로 긍정하는 것은 비관적일 만큼 절망적인 일이다. 


 '독'과 '동일성'을 차이로 뒤집어 세우는 일은 역량과 지혜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역량과 지혜는 ‘파괴’와 ‘퇴행’ 사이의 횡단, 그 지독히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횡단을 통해서만 생성된다. 이는 얼마나 비관적이며 절망적인가? 그 위험한 '파괴'와 고통스러운 '퇴행'을 신체로 반복하는 이들만이 '독'과 '동일성'을 뒤집어 세워 기쁜 삶을 생성할 수있는 역량과 지혜에 이를 수 있다. 파괴되고, 퇴행하고 있다.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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