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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교과서, 참고서

우리에게는 세 권의 책이 있어요. '바이블' '교과서' 참고서'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책은 '교과서'죠.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우리를 의무로 몰아넣는 책.  '교과서'는 권력의 책이죠. 그 다음 만나게 되는 책이 '참고서'죠. '교과서'를 내면화했을 때 우리는 '참고서'를 찾게 되죠. '교과서'를 읽고 싶지 않지만 읽어야만 한다고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참고서'를 찾게 되죠. '참고서'는 효율의 책이죠. 


 가장 늦게 만나게 되는, 어쩌면 영원히 만나게 되지 못할 수 있는 책이 있죠. '바이블'입니다. 위험과 매혹으로 찾아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우리를 구원해주는 책. '바이블'은 사랑의 책이죠. 사랑은 위험과 매혹으로 우리를 찾아오고, 그 사랑만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우리를 구원해주니까요.  


 세 책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참고서'는 반복하지 않죠. 효율은 반복을 허락하지 않으니까요. '교과서'는 반복하죠. 하지만 그것은 차이 없는 반복이죠. 권력은 반복하게 하지만 그저 반복할 뿐이니까요. 


 '바이블'은 차이와  반복이죠.  '바이블'은 차이의 반복이고, 반복를 추동하는 차이죠. '바이블'을 반복해서 읽을 때 차이가 생성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차이는 다시 반복을 추동하죠. 사랑은 반복할 수밖에 없고, 그 반복으로 차이가 생성되고, 그 생성된 차이가 다시 반복을 추동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나요? '참고서'인가요? '교과서'인가요? '바이블'인가요? 혹시 '참고서'와 '교과서'를 읽으며 그것이 '바이블'이라고 오해하고 있지는 않나요? 아니, '바이블'을 권력에 눌려 읽거나 효율적으로 읽고 있지는 않나요? 그렇게 우리는 '바이블'을 '교과서'화하거나 '참고서'화하며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바이블'은 '바이블'로서 읽어내야 해요. 그럴 때만 '교과서'와 '참고서'를 넘어 '바이블'을 발견할  수 있어요. '교과서'는 '부모'이고, '참고서'는 '선생'이죠. '바이블'은 '스승같은 연인'이고, '연인같은 스승'이죠. '선생'은 효율적으로 읽기만 하면 되고, '부모'는 순응해서 읽기만 하면 되죠. 우리는 오직 '스승 같은 연인', '연인같은 스승'을 만나게 되었을 때만 그 사람을 끊임없이 읽어내려고 애를 쓰죠.


 왜 그럴까요? '바이블'만이 사랑의 책이기 때문이죠. 오직 '바이블'만이 위험과 매혹으로 우리를 찾아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우리를 구원해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우리가 '바이블'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이유죠.


 아무리 좋은 '교과서'와  '참고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슬픔의 책이에요. 아무리 큰 고통과 상처를 촉발한다고 하더라도 '바이블'은 기쁨의 책이에요.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의 '바이블'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바이블'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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