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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I am More, 2022)

모어(I am More, 2022) 이일하

이일하 : 한국의 다큐멘터리 및 극영화 감독. 이일하 감독은 200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과 오사카예술대학에서 다큐멘터리를 공부했다. 오사카예술대학 박사과정에서 일본 다큐멘터리의 거장 하라 가즈오를 스승으로 만났다. 일본사회 내 조선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울보 권투부(2015) 」 「카운터스(2018)」 연출했다. 

 이일하 감독은 특정 집단이나 사람에게 깊이 들어가 인물들의 이야기를 잘 끌어낸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기보다 우선 많이 듣는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들과 같이 보낸다. 카메라와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화학작용을 잘 캐치해내는 사람이 좋은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고 믿는다. ‘이제 라스트컷을 찍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은데, 이 사람이 이 순간 이런 말을 해주면 참 좋을 텐데’ 하면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얘기를 해준다. 그게 바로 화학작용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모든 좋은 예술은 결국 인간과 인간의 화학작용이다. (예술가-뮤즈, 예술가-감상자) 그런 측면에서 좋은 극영화도 그렇겠지만, 좋은 다큐멘터리 역시 인간을 이해하는 작업이다. 한 인간의 곁에서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며 그를 이해하지 못하면 (혼합작용은 일어날 수 있으나) 화학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일하 감독은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그런 화학작용을 끌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일하 감독의 작품에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엿보인다. 그의 작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 인간 곁에서 애정 갖고 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모어 역시 그런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모어」를 왜 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감독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모어를 처음 접한 건 일본에서 보았던 한 장의 사진에서였다. 드래그 퀸 메이크업을 한 채 상의를 벗고 찍은 사진이었는데 강렬한 이미지였다. 맹렬하게 무언가와 싸울 듯 사나우면서도 팜므파탈의 그것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예사롭지 않은 그 사진 한 장으로 그녀만의 아름다움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모어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펼치는 드랙쇼다. 자신을 한 번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은 세상을 향해 던지는 탄원서랄까.”     


      


‘소수성’ 너머 진정한 ‘나’로 나아가는 여정     


1.

소수자는 없다. 어떤 기준이냐 따라 다수자와 소수자는 얼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모지민’이 이견의 여지없이 성소수자다. 그 이유는 ‘남성-여성’이라는 기준 때문이다. ‘인간-동물’이라는 기준에서 ‘모지민’은 다수자인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소수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자’가 존재한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에서 소외된 자가 존재한다. ‘모지민’은 ‘소외자’다. 다수(주류)적 기준에 의해 소외된 자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소외되었을까? 그녀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무기징역 불행” 때문인가? 즉, 그녀의 성정체성 때문인가? 그녀가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드랙퀸(스커트, 하이힐, 화장 등 옷차림이나 행동을 통해 과장된 여성성을 연기하는) 쇼를 하는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소외된 필요조건일 뿐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그녀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무기징역의 불행을 선고 받은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모지민의 학창시절 친구가 나온다. 그는 우리 시대의 평균보다 조금 더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에 처해 있다. 아마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그의 동료들에게 세상의 ‘모지민’들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정신병원에 처넣어야 할 정신병자일 테다. 하지만 그 친구는 큰 편견이나 거부감 없이 모지민과 대화를 나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일상이다. 일상을 공유했던 기억 때문이다. 지민과 함께 했던, 그 어떤 사회적 편견이나 거부감도 없이 만날 수 있었던 학창시절의 일상 때문이다.


 그 일상 덕분에 그 친구에게 모지민은 ‘미친 정신병자’가 아니라 그저 ‘조금 유별난 서울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 모지민에 대한 거부감이 누그러졌을까? “양년들은 천 원짜리를 줘” 쇼를 하고 팁을 적게 준다고 투덜거릴 때이다. “개새끼 진짜” 담배 피지 말라는 말을 안 듣는 남자친구에게 욕할 때이다. 그녀가 짬이 날 때면 부모의 농사를 도와야 하는 어느 시골집의 평범한 자식임을 알게 될 때다. 그때 우리는 ‘모지민’이 미친 정신병자가 아니라 그저 우리와 같은 일상을 살아내는 평범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특정한 기준은 어떻게 ‘소외자’를 양산하는가? 특정한(주류적) 기준이 특정한 미적 감수성을 확립함으로서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부유-가난/이성애-동성애/비장애인-장애인’이라는 기준을 생각해보자. 이는 단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구분의 기준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기준의 설정은 ‘아름다움(부유‧이성‧비장애인)-추함(가난‧동성애‧장애인)’이라는 미적 감수성을 동시에 확립한다. 이것이 ‘소외자’가 양산되는 방식이다. 추한 것(가난‧동성애‧장애인)들로 지정된 것들은 더럽고 역겹고 혐오스럽고 그래서 결국 미친 것들이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가난하고 동성애적이고, 장애를 가진 존재들이 소외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미적 감수성을 재구성하는 길 밖에 없다. 즉, 가난과 동성애와 장애인도 평범하다(혹은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일상이다. 소외된 자들의 일상 역시 우리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공통개념’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가 끝날 무렵, 모지민이 덜 더러워 보이고 덜 역겨워 보이고 덜 혐오스러워 보이고 덜 미쳐 보이지 않는가? 동시에 조금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나? 그것은 우리가 모지민의 일상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외된 이들을 소외되지 않게 방법은 그들 곁에서 그들의 일상을 함께 하는 일이다. 


     

2.

 모지민은 ‘다수’적 사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소수성’을 품고 있다. 그런 모지민은 유별나고 예외적인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 역시 우리 안에 ‘소수성’을 품고 있다. 우리가 ‘모지민’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소수성’은 ‘다수’적 사회 안에서 ‘다수’적 삶을 연기할 수 있을 정도의 ‘소수성’이기 때문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모지민은 자신의 ‘소수성’에 직면했고, 우리는 우리 안의 ‘소수성’을 긴 시간 외면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직하게 돌아보라. 자신 안에 역겹고 혐오스럽고 광기어린 ‘소수성’이 정말 없는가? 이태원의 어느 퇴폐적인 무대에서 여장을 하고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모지민의 모습이 정말 우리에게는 없는가? 길거리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고 싶었던 적이 없는가?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질 때까지 누군가를 때리고 싶은 욕망이 없는가? 상대방이 나를 철저하게 짓이겨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없는가? 상대를 먹어치우고 싶은, 누군가 자신을 먹어 치워주기를 바랐던 섹스를 욕망했던 적이 없는가? 스치듯이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 끌렸던 적이 없는가? 그런 ‘소수성’이 없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모두 ‘모지민’이다.


 소수성을 드러내면 소외된다. 하지만 소수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파괴된다. 소외와 파괴 사이의 굴레. 이것이 모지민이 늘 죽고 싶었던 이유였을 테다. 자신 안에 있는 소수성을 드러내었을 때, “너, 그 여성성 버려!” 선배가 뺨을 후려 갈겼다. 그렇게 자신 안에 있는 소수성을 감추려고 했을 때 그녀는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네 삶 역시 이런 모지민의 모순 안에 있다. 우리의 소수성을 드러내면 소외되고, 그 소수성을 감추게 되면 삶은 서서히 파괴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정해져 있다. 소수성을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무작정 드러내서는 안 된다. 소수성을 표현하지 않아도 파괴되겠지만, 무작정 표현하면 그 역시 파괴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 만의 ‘무대’가 있어야 한다. 우리 안의 광기(소수성)를 꺼낼 수 있는 ‘무대’가 있어야 한다. 소수성 안 갇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갈 ‘무대’가 있어야 한다. ‘무대’가 필요하다. 광기 어린 괴물(소수성)을 자기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세상 밖으로 꺼낼 ‘무대’가 필요하다.


 모지민의 ‘무대’는 무엇이었을까? ‘제냐’였고 ‘춤’이었다. 그녀는 ‘제냐’와 사랑을 나누며 이태원 어느 ‘무대’에서 ‘춤’을 추면서 자신의 소수성을 긍정하게 되었다. 여자가 아닌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던 그녀는 ‘제냐’라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었다. ‘무대’에서 발레리노가 아니라 발레리나 되고 싶었던 그녀는 이태원에서 자신만의 ‘무대’를 찾았고 그곳에서 ‘춤’을 추었다. 그 ‘무대’에서 ‘춤’을 추며 그녀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었고, 그렇게 자신의 ‘소수성’을 긍정해나가고 있다.


 내게도 긴 시간 말하지 못했던 ‘소수성’이 있다. 짐승처럼 날뛰고 싶은 욕망, 살이 터지고 근육이 찢어질 때까지 싸우고 싶은 욕망. 사랑하는 이를 뜯어 먹고 싶은 욕망. 긴 시간 이 욕망들을 외면해왔기에 내 삶은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괴물 같은 소수성들을 마냥 분출할 수도 없었다. 나의 ‘무대’를 찾았다. 나의 무대는 ‘그녀’였고 ‘링’이었고 ‘글’이었다. 나는 그 ‘무대’에서 “냅다 까라 미친년 널뛰고” “또 다른 자아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렇게 나의 ‘무대’에서 사랑했고, 싸웠고, 썼다. 나 역시 나의 ‘무대’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그렇게 나의 ‘소수성’을 긍정하게 되었다.      



3.

“여러 가지 그런 것 때문에 언니는 수술을 못했다 그랬잖아. 근데 언니는 지금도 그거를 마음  속에 갖고 있어? 그 문제가 많이 해결되었어?” 
“나는 완전 지금 클리어. 지민아 너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내가 뭔 지랄 염병을 해도 아름다워. 그게 가장 중요했고 꼭 했어야 되는 건데 그게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면서 뭔가 지금은 그런 감정이나 욕구에서 다 퇴화되고…” 
“넥스트 레벨로 간 거지.”     


 진짜 ‘나’로 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자신만의 ‘무대’를 찾아 ‘춤’을 추며 살게 되었을 때만 알 수 있다. 그렇게 미친년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다보면 알게 된다. 진짜 ‘나’로 산다는 건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모든 것을 바꾸는 삶이구나. 모지민의 삶이 이런 삶의 진실을 잘 보여준다. 모지민은 트랜스젠더다. 그녀는 진정한 의미에서 ‘트랜스젠더transgender’다. 그녀는 섹스sex를 넘어가지trans 않은 채로 젠더gender를 넘었기trans 때문이다.


 성전환 수술은 한 트랜스젠더는 진정한 ‘나’를 찾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으나(긴 시간 억압된 욕망의 해소는 진정한 ‘나’를 찾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성전환 수술 자체가 진정한 ‘나’를 찾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네들의 절박함과 간절함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성전환 수술은 성기의 차이로 남녀를 구분하는 통념적 기준 안으로 거꾸로 다시 들어오는 삶 아닌가? 그것은 ‘트랜스섹스’일 순 있어도, ‘트랜스젠더’라고 명명하기 어렵다. 진정한 의미에서 ‘젠더’를 넘는다는 것은 사회적 구분 기준을 넘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 까닭이다.


 진정한 ‘나’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구분 기준 자체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단독성singularity! 이 ‘단독성’의 회복이 바로 진정한 ‘나’가 되는 길이다. 단독성(진정한 ‘나’)에는 이름표가 없다. 단독성은 사회적 구분 기준 자체를 넘기 때문이다. 모지민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아들인가? 딸인가? 모호하다. 어떤 순간에는 발레리노(남성적)이며, 어떤 순간에는 발레리나(여성적)이며, 어떤 순간에는 발레리노(남성)적이지도 발레리나(여성)적이지도 않다. 그녀 혹은 그녀의 춤에 이름을 붙을 수 없기에 그저 ‘기묘하다’ ‘이상하다’고 밖에 말할 수밖에 없다.


 모지민의 고통 속에 나를 본다. ‘단독성’을 가진 인간이 되고 가고 있는 나. 나는 누구인가? 사회적 구분 기준으로 정의할 수 없다. 복서인가? 철학자인가? 저자인가? 백수인가? 자본가인가? 노동자인가? 선생인가? 친구인가? 그 어떤 사회적 기준으로도 나를 정의할 수 없다. 나는 어느 순간에는 짐승처럼 싸우며, 어느 순간에는 날카롭게 사유할 뿐이다. 어느 순간에는 글을 쓰며 어느 순간에는 빈둥거린다. 어느 순간에는 돈을 벌고 쓰는 생각을 하고, 어느 순간에는 고되게 노동한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지만 선생처럼 행동하려고 하지 않고,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흔해빠진 친구의 역할을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어떤 순간에는 복서처럼, 철학자처럼, 저자처럼, 백수처럼, 자본가처럼, 노동자처럼, 선생처럼, 친구처럼 보일 뿐이고, 또 어떤 순간에는 그 모든 존재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모든 이름표들 사이를 가로 질러 갈 뿐이다. 나는 단독적인 ‘나’로 산다. 진정한 ‘나’가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경계를 가로지르며 어떤 사회적 기준에도 속하지 않는 채로 사는 것. 그런 삶을 긍정해내는 것. 그렇게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의 단독성을 회복하고 긍정하는 것.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런 삶에 있다.


 누가 뭐래도 ‘모지민’은 아름답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름붙일 수 없는 존재에게 있다. 이것이 ‘모지민’의 아름다움이다. 자신만의 ‘무대’에서 ‘춤’을 추며 진정한 ‘나’로 나아가려는 모든 이들에게, 그녀가 자신을 격려했던 말을 빌려 응원을 전하고 싶다. “너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네가 뭔 지랄 염병을 해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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