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향기(The Taste Of Cherry, Ta'm E Guilass, 1997)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1940~2016) : 1980년 대 후반, 영화라는 장르가 존재하는지 조차 의아스러운 곳, 이란에서 중년의 감독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키아로스타미다. 이란 테헤란에서 태어난 그는 국립테헤란예술대학교에서 미술과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CF와 영화 타이틀 디자인 작업을 하던 그는 1969년 아동 지능 개발 연구소에서 일하며 어린이를 위한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영화계 새로운 거장의 시작이었다. 무엇이 그를 거장으로 만들었을까? (영화사적인 부분인 예컨대, 미학적인 부분과 이미지보다 사운드를 중시하는 등등은 논외로 하자) ‘우연’, ‘느림’, ‘기다림’이다. 그는 영화의 시작조차 ‘우연’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모든 건 우연히 일어났어요. 열일곱 살에 집을 나와서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 준비가 안 된 나는 대학 시험에 떨어졌지요. 이듬해에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한 1960년부터 1967년까지 150편 정도의 광고를 즐겁게 찍었어요. 그런데 누가 내게 말했어요. 당신은 광고를 단편영화처럼 찍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영화로 고개를 돌렸지요. 나는 우연을 믿습니다.” 그 후 키아로스타미는 정말 아무런 훈련 없이 우연에 자신을 맡긴 채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의 시작뿐만 아니라 영화의 작업 방식마저 우연을 믿는다. 그는 비전문 배우와 함께 작업하는 것을 즐긴다. 이는 특정한 배역에 필연적 맞는 전문 배우를 쓰기보다 그 배역에 어울릴 비전문 배우를 우연히 만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키아로스트타미는 영화를 찍으며 소년과 개를 하나의 장면에 담기를 원했다. 소년에 대한 개의 반응을 찍기 위해서 무작정 기다렸다. 촬영감독은 두 장면으로 나눠서 찍자고 요구했지만 키아로스타미는 이를 거절했다. 그렇게 그는 소년과 개 앞에서 40일을 기다렸다. 그 일화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물론 40일을 기다린다고 해서 그 장면을 찍는다는 보장은 없죠. 하지만 영화는 기다리면 기적이 찾아옵니다. 그걸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나는 그 후 이 원칙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우연’과 ‘느림’ 그리고 ‘기다림’은 한 묶음이다. 우연은 느리게 찾아오기에 기다려하니까 말이다. 그의 영화 시작 역시 ‘우연’히 시작되었기에 ‘느렸고’(40대에 영화를 시작) 그만큼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의 영화 작업 역시 ‘우연’을 믿기에 ‘느리고’(숏 대신 롱테이크) 그만큼이나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영화가 때로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테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우연을 천천히 기다려야 하는 일은 때로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나 우리처럼, 자본주의적 ‘필연’과 ‘빠름’, ‘조바심’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더욱 그럴테다.
그의 영화에 가닿는 방식도 그렇다. 그의 영화에 가닿으려면 우리네 삶의 속도를 줄여 천천히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느림과 기다림으로도 그의 영화에 가닿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것은 단지 아직 그와 만날 우연성이 찾아오지 않은 탓이니까. 그저 그의 이름을 기억해두면 될 일이다. 우리가 우리네 삶을 이어가다보면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생각날 순간이 우연히 찾아올 테니까.
그가 거장이 된 이유를 알겠다. 그의 영화는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삶은 늘 우연이기에 늘 느리고 그래서 기다려야만 하지 않던가? 그는 삶으로부터 영화를 시작했고, 삶 그 자체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게 키아로스타미는 우리에게 삶으로서 영화를, 영화로서의 삶을 우리에게 선물해준다.
‘체리향기’는 없다.
절박함 속의 ‘체리향기’만이 있을 뿐이다.
1.
‘바디’는 왜 죽으려하는가?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죽으려는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로 바디의 자살 여행, 정확히는 자신의 자살을 도와줄 이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왜 죽으려는지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첫째는 ‘자본주의’이다. 젊은 군인에게 큰돈을 줄 테니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군인은 자꾸만 그것이 무슨 일인지를 캐묻는다. 이에 바디는 의아하다는 듯 혹은 짜증난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일꾼들은 그냥 일하고 돈을 받으면 되는 거야.”
‘바디’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그가 죽으려는 하나의 이유였을 테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믿는 이는 결국 죽고 싶을 수밖에 없다. 돈이 없다면 돈이 없다는 이유(결핍)로 죽고 싶을 테고, 돈이 많다면 돈이 많다는 이유(공허)로 죽고 싶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모든 이들의 죽음의 향기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는 죽고 싶은 근본적이 이유는 아니다. 누구든 살고 싶기에 돈이 없다면 죽기 싫어서 돈을 벌려고 할 것이고, 돈이 많다면 죽기 싫어서 돈을 쓰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돈은 죽음의 향기를 피울 뿐, 죽음의 근본적 원인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바디’가 죽고 싶은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닫힌 마음(자기-고립)’이다. “누구도 절대 내 마음을 몰라!”라는 마음. “왜 죽으려 하냐고? 그건 말해줄 수 없네. 말해도 자네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자네는 내가 느끼는 걸 느낄 수 없기 때문이지.” 자살을 도와 달라는 ‘바디’의 말에 신학자는 되묻는다. 왜 죽으려고 하냐고. ‘바디’는 말한다. 말해도 자네는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이것이다. 닫힌 마음. 이것이 한 사람이 스스로를 죽음의 문턱으로 끌고 가는 원인이다. 자신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다른 이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믿음. 그 닫힌 마음은 스스로를 고립시켜 죽음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물론 바디의 말은 옳다. 누구도 ‘나’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이 때문에 마음을 닫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어떻게 닫힌 마음을 열고 자기-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누군가 ‘나’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느껴 줄 수 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아픔은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나’의 단독적인 아픔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닫힌 마음은 열리는가? 아무도 ‘나’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는 없지만, 누군가 그 아픔을 느껴보려고 애를 쓰는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심각하든 가볍든 자살을 생각본 적 있는가? 그네들의 공통점이 있다. 닫힌 마음이다. 누구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고립되어 자신이 만든 지독한 외로움에 질식해간다. 이는 누군가 자신의 아픔을 느껴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 자신의 아픔을 느껴보려는 애쓰는 마음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곁에서 자신의 아픔을 느껴보려고 애를 쓰는 마음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러니 죽고 싶을 수밖에.
흔히 자살의 충동을 수동적 고립감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세상 사람들이 ‘나’를 고립시켰기에 죽고 싶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예외적 경우다. 자살 충동은 능동적 고립감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훨씬 더 흔하다. (예외적인 자살을 제외하면) 자살의 충동은 타인이 자신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타인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디’는 영원히 닫힌 마음을 열 수 없는 것일까? 그저 닫힌 마음을 안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2.
‘군인’과 ‘신학자’는 왜 ‘바디’를 살리지 못했나? ‘바디’는 ‘군인’과 ‘신학자’에게 자신의 죽음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왜 그랬을까? ‘군인’은 누군가를 죽임으로서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 아닌가? 자신을 죽임으로서만 살 수 있다고 믿는 ‘바디’에게 ‘군인’보다 더 적합한 자살의 조력자도 없었을 테다. ‘신학자’ 역시 마찬가지다. 신학자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존재(신)를 통해 삶의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는 사람 아닌가? 죽음 통해 삶의 구원에 이르려는 ‘바디’에게 ‘신학자’보다 더 적합한 자살의 조력자도 없었을 테다.
하지만 ‘군인’도 ‘신학자’도 모두 ‘바디’를 살려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바디’의 죽음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인’도 ‘신학자’도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한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닫힌 마음을 여는 일인 까닭이다. ‘군인’과 ‘신학자’는 모두 자신이 사는 일이 중요한 이들이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군인’은 신념(자본‧국가)을 위해 사람을 죽일 뿐 누군가를 살리지 못한다(살릴 생각이 없다). ‘신학자’는 신념(신앙)을 위해 신을 믿을 뿐, 누군가를 살리지 못한다(살릴 생각이 없다). 이것이 ‘군인’과 ‘신학자’가 바디의 부탁을 거절한 이유이고, ‘바디’가 더욱 마음을 닫게 된 이유다.
그런 ‘바디’ 앞에 박물관의 ‘노인’이 나타난다. 그 노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며 ‘바디’는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 “내일 새벽에 저에게 돌멩이를 두 개 던져주세요. 그냥 잠든 상태일 수도 있으니까요.” 바디는 살고 싶어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노인’이 삶의 진실이 담긴 이야기들을 해주었기 때문일까? 자신이 체리 맛을 보고 삶의 활력을 찾은 것처럼, 당신도 그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그런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말들로 열릴 마음이었으면 ‘바디’는 애초에 자살 여행을 떠나지도 않았을 테다. ‘바디’의 마음이 열린 이유는, 오직 ‘노인’만이 죽음을 도와줄 것이라 약속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그런 일이다. 알량한 자신의 신념, 가치 같은 것은 내려놓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기꺼이 해주는 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파괴하게 될 것임을 직감하지만 기꺼이 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일. 그것이 한 사람을 마음을 여는 유일한 길이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 ‘나’의 아픔을 느껴보려고 애를 쓰는 마음을 전해줄 수는 있다. 그것은 ‘기꺼이 너를 죽여주는 일’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 너머 네 삶 중심부로 기꺼이 들어가는 일. 그것은 ‘기꺼이 너를 죽여주는 일’이다. 그 고단하고 위험한 일을 통해서만 한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다. 기꺼이 ‘너’를 죽여줄 수 없다면 ‘너’를 살릴 수 없다. ‘너(를 죽이기 위해)’를 위해 ‘나’를 죽일 수 없다면 ‘너’도 ‘나’도 살 수 없다. ‘군인’과 ‘신학자’ 너머 ‘노인’이 있다. ‘나를 위해 너를 죽이는 나’(군인), ‘나를 위해 너를 죽이지 않는 나’(신학자), ‘너를 위해 나를 죽이는 나’(노인) 오직 ‘너를 위해 나를 죽이는 나’만 기꺼이 너를 죽여줄 수 있다. 바로 그 사람만이 ‘나’도 ‘너’도 모두 살릴 수 있다.
3.
‘바디’는 어떻게 살게 되었나? ‘노인’을 만났기 때문일까? 즉, ‘너’를 위해 ‘나’를 죽일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일까? 만약 그렇다고 답한다면, 이 영화는 촌스럽고 진부한 이야기가 되었을 테다. 생각해보라. ‘체리 맛을 보고 살고 싶어졌다네.’ ‘여기저기 눌러서 안 아픈 곳이 없다면 손가락이 아픈 것이라네.’ 그리도 간절히 죽고 싶어 하는 이가 노인의 이런 평범한 말에 다시 살고 싶어졌다는 이야기보다 더 촌스럽고 진부한 이야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많은 이들이 『체리향기』는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평범한 것들 속에 있다”라는 이야기를 전하는 영화라고 평론한다. 이보다 감독의 속내를 오해 하는 평론도 없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비범한 것들 속에 있다” 이것이 『체리향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다. ‘바디’의 마음의 문은 열렸다. 어떻게 열렸을까? ‘노인’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바디’가 자살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바디’는 온 마음을 다해 죽고자 했다. 이 비범한 여행이 없었다면 ‘바디’는 끝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을 테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삶이 아닌 죽음을 향한 간절함. 그 간절함이 만들어낸 비범한 여행이 ‘바디’의 마음의 문을 열게 했다.
마음의 문은 양쪽에서 잠긴 문이다. 안쪽과 바깥쪽에서 동시에 열어야 하는 문이다. 바깥쪽에서 ‘노인’이 문을 열고 동시에 안쪽에서 ‘바디’의 간절함이 문을 열었던 셈이다. 그렇게 ‘바디’의 마음의 문은 열렸고, 비로소 평범한 것(체리향기, 아름다운 하늘과 노을, 알록달록한 아이들의 모습)들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잊지 말자. 마음의 문은 안쪽과 바깥쪽에서 동시에 열어야 하지만, 그 시작은 안쪽일 수밖에 없다. ‘바디’가 자살 여행을 떠나지 않다면, ‘노인’은 애초에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봄날 오후, 회사 옥상에 올라갔다. 죽고 싶었다. 이대로 살면 되는 것인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인지 답할 수 없어서 죽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죽지 못했지만, 한 참 시간이 지나 알았다. 그 즈음 나 역시 자살 여행 중이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간절히 찾기 위해 자살여행 중이었다. 그때 ‘노인’을 만났다. 나의 ‘노인’은 ‘철학’이었다. 마음의 문이 열렸던 순간을 기억한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죽고 싶었던 나의 간절함과 무엇 때문에 죽으려고 하냐고 따져 묻는 철학의 엄격함. 이 간절함과 엄격함이 안쪽과 바깥쪽에서 동시에 나의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나는 살고 싶어졌다. 비로소 삶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삶의 기쁨, 삶의 의미, 삶의 활력은 평범한 것들 속에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의 깨달음은 비범한 것들 속에 있다. 자살여행을 떠날 비범함이 우리에게 있는가?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비범함이 우리에게 있는가? 그 비범한 여행을 가능케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는가? 그 절박함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마음의 문을 열 수 없다. ‘체리향기’는 없다. 맛보기만 하면 삶의 기쁨과 의미, 활력이 샘솟는 그런 ‘체리향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그런 신파가 아니다. ‘절박함 속의 체리향기’가 존재할 뿐이다. 죽음 문턱 앞에서는 절박함이 ‘체리향기’를 맛보게 해줄 뿐이다. 진정으로 살기 위해 한 번은 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