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이 사라졌다(I Lost My Body, J'ai perdu mon corps 2019). 제레미 클라핀
* 제러미 클라팡 : 프랑스 애니메이션 영화 감독.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 및 일러스트레이터로 경력을 시작으로 여러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다. 클라팡은 「스키자인Skhizein(조현병)이란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90 여개의 상을 수상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세 번째 단편 영화인 「팔미페다리움Palmipedarium」을 연출했다. 단편으로 실력을 닦은 클라팡은 기욤 로랑의 소설 「Happy Hand」를 원작으로 「내 몸이 사라졌다」를 연출했다.
클라팡은 인간의 상처와 내면의 불안을 애니메이션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로 표현한다. 아이와 어른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연출하는 만화영화감독이 있다. 클라팡은 그런 감독이 아니다. 클라팡은 ‘어른’, 기꺼이 고통스러운 삶의 진실을 마주하려는 ‘어른’만을 위한 만화영화감독이라고 말하고 싶다.
절망적인 운명 앞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손 없는 몸’으로 절벽에서 뛰어 내려라.
1.
그녀가 어느 남자의 뒷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모텔에서 나왔다. 그날 ‘그’의 ‘손’이 잘렸다. 행복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고 답한다면 우리는 지금 불행 속에 있다. 이것이 행복의 역설이다. 행복은 행복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행복은 오직 불행 속에서만 발견된다. ‘손’이 잘린 불행 속에서 그녀와 행복했던 기억들이 그를 찾아들었다. 그녀와 함께 웃고 웃으며 만지고 만져졌던 그 행복이 찾아들었다. ‘손’을 인지하는 순간은 ‘손’을 잃은 때이기에, 그때 우리는 다시 ‘손’을 찾고 싶다.
‘나우펠’은 행복했다. 그 행복의 기억은 ‘손’에 있다. 녹음기를 켜고, 마이크를 만지고, 엄마와 아빠를 만지고, 피아노를 치고, 코를 파고, 장난감을 만지고, 모래를 만지는 그 모든 행복은 ‘손’에 있다. 불운한 사건으로 ‘손’이 잘렸다. 그런데 ‘나우펠’은 ‘손’을 찾지 않는다. 오히려 ‘손’이 지나한 여정을 겪으며 ‘나우펠’을 찾아온다. 왜 ‘나우펠’이 ‘손’을 찾지 않고, ‘손’이 ‘나우펠’을 찾아오는가? ‘손’이 잘려본 이들은 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것이 나를 찾아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손’이 잘린 ‘그’는 다시 ‘손’을 찾으려 했다.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행복은 잊고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그렇게 잘려나간 ‘손’을 다시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찾은 ‘손’들은 그의 ‘손’이 아니었다. 다른 여자들은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잘려 나간 ‘손’을 다시 찾으려 하면 할수록 ‘손’은 더 멀어져만 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손’이 잘려 나간 자리가 다 아물 때 즈음이었을까? 그녀가 연락이 왔다. ‘그’는 화가 나지 않은 자신에게 화가 났고, 다시 그녀가 보고 싶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나우펠’의 ‘손’은 온갖 시련을 겪으며 ‘나우펠’ 곁으로 돌아온다. 붕대를 감고 잠들어 있는 ‘나우펠’의 손목 위 자신의 자리에 가서 눕는다. ‘손’은 절망한다. 온갖 힘든 여정 끝에 ‘나우펠’을 찾았는데, ‘손’은 다시 ‘나우펠’의 손목에 붙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날 ‘그’와 그녀는 다시 잠자리를 했다. ‘그’와 그녀의 몸은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했다. 그렇게 ‘그’는 마음을 감고 잠들어 있는 그녀 옆 자신의 자리에 가서 누웠다.
‘손’은 ‘그’에게 다시 붙었을까? 잠들지 않은 ‘그’는 절망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여정이었던가? 그녀와의 행복했던 순간이 다시 찾아와 주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하지만 그녀와 잠자리를 하며 알았다. 잘려나간 ‘손’은 결코 다시 붙지 않는다는 걸. 잠들었던 ‘나우펠’도 잠들지 않았던 ‘그’도 모두 알고 있었다. ‘나우펠’도 ‘손’을 떠나 볼 수밖에 없고, ‘그’도 그녀, 아니 그녀와 함께 행복한 순간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우펠’ 아버지의 말처럼 “뭐든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다.”
‘손’은 행복이다. 이것이 ‘손’이 잘렸을 때, 우리가 집요하게 ‘손’을 찾으려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는 놓쳐버린 행복을 다시 찾고 싶다. ‘손’을 찾을 수 있는가? 잘려나간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는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우리는 삶을 거꾸로 본다. ‘손’을 잃었을 때 ‘내’가 그 ‘손’을 찾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고 답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한 번도 손이 잘려 본 적이 없는 이다. ‘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이는 자신이 ‘손’을 찾을 수도 있고, 찾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권이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인생이 그렇게 쉬운 것이었다면 누가 기 고통 받으며 살겠는가?
우리는 결코 잘려나간 ‘손’을 찾을 수 없다. ‘손’이 ‘나’를 집요하게 찾아온다. 이것이 우리가 잘려나간 텅 빈 손목을 보며 고통스러운 이유다. 이미 잘려나간 ‘손’이기에 잊고 싶지만, ‘손’은 집요하고 끈질기게 우리를 찾아온다. ‘손’은 행복이지만 ‘잘려나간 손’은 집착이다. 이미 사라져버린 행복에 대한 집착. 그것이 우리네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 ‘나우펠’은 ‘손’을 잊고 살고 싶었을 테다. 하지만 ‘손’은 집요하고 끈질기게 ‘나우펠’을 찾아온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손’이 잘려나가 본 이들만 알고 있다.
‘그’는 다른 남자와 모텔에서 뒹군 그녀를 왜 잊고 싶지 않았겠는가? 아니 그녀가 어느 남자와 뒹굴었다는 사실 자체를 왜 잊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는 잘려 나간 ‘손’을 잊고 싶었다. 하지만 ‘손’은 ‘그’를 집요하게 찾아왔다. ‘그’가 어떤 여자를 만나든, 어떤 일을 하고 있든 집요하고 끈질기게 ‘손’은 ‘그’를 다시 찾아왔다. ‘그’의 고통은 어디서 왔는가? 집착이다. 이미 잘려 나가서 결코 다시 이어붙일 수 없는 행복에 대한 집착이 ‘그’를 고통스러운 삶에 몰아넣었다. 잘려나간 ‘손’이 다시 찾아왔을 때 고통의 극한치를 깨닫게 된다. 절망적인 공허. ‘나우펠’의 손목 위에 누운 ‘손’에게도, ‘그녀’의 가슴 옆에 누운 ‘그’에게도 남겨진 것은 절망적인 공허뿐이다. ‘손’이 잘려 버린 몸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2.
“운명을 믿어요? 진짜로 말이에요.”
“인생은 다 정해져 있고 우리는 따라갈 뿐이라고요?”
“그래요”
“아무것도 못 바꾸고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이죠.”
지독한 불행을 겪은 이들은 알고 있다.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사실을. ‘나우펠’은 지독한 불운의 운명 속에 있다. 부모를 잃고, 사랑도 잃고, 손마저 잃었다. ‘나우펠’은 ‘손 없는 몸’이다. 이것이 ‘나우펠’의 운명이다. ‘나우펠’은 그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알고 있다. ‘나우펠’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다행히 어린 시절, ‘나우펠’의 아버지는 ‘운명’을 바꾸는 법을 알려준다. “파리는 항상 너보다 빠르니까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이미 날아가 뒤라고. 파리의 허를 찔러야지. 측면에서 잡으면 돼.”
‘파리’는 운명이다. 항상 우리보다 빠르다. 그래서 그것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며 이미 날아가 버린 뒤다. 어떻게 ‘파리’를 잡을 것인가? ‘파리’가 예측하지 못할 측면에서 파리의 허를 찔러야 한다. ‘나우펠’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나우펠’은 ‘가브리엘’에게 운명을 피하는 법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아예 엉뚱한 행동을 한다면 모를까? 확실히 마법을 걸 뿐인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걸을 때 여기로 오는 척하면서 농구할 때 속이는 동작처럼 딴 길로 새서 저 크레인으로 점프하는 거예요. 하면 안 되는 뭔가 즉흥적인 일, 금지된 행동을 하는 거죠. 덕분에 다른 세상에 가서 잘 됐다며 후회도 안하는 그런 거죠.”
‘기관 없는 몸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기관(손‧입‧다리‧눈…)이 없는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관들이 하나의 유기체(이성적 자아)에 통합되지 않고 부분적 대상 그 자체(욕망하는 기계)로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기관 없는 몸체’는 고정된 질서(‘정상’적인 판단)를 벗어나 무한한 변이와 생성을 통해 다른 존재로의 잠재성을 품고 있는 상태다. 이는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이성(혹은 ‘정상’)적으로 생각했을 때, 전혀 끌리지 않는(끌려서는 안 되는) 상대인데, 우연히 만지거나(손) 우발적으로 키스(입)를 하게 되었을 때 매혹적인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가?
이것이 ‘기관 없는 몸체’다. 유기체(이성적 자아)에 통합되지 않는 부분적 대상(손‧입)이 그 자체로 어떤 대상을 욕망하게 되는 일. 이것은 ‘기관 없는 몸체’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기관 없는 몸체’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특정한 변이가 발생되어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던 ‘나’로 생성된다. (잠재성) 자상하고 지적인 남자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여자가 짐승처럼 거친 남자와 잠자리 후에 전혀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 차분한 일들을 좋아한다고 믿었던 남자가 격렬한 스포츠를 만나 전혀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 이것이 ‘기관 없는 몸체’가 드러난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나우펠’은 ‘기관 없는 몸체’다. 이는 형식적으로 내용적으로 모두 그렇다. ‘나우펠’은 ‘손 없는 몸’이 되었다. 형식적으로 ‘기관 없는 몸체’다. 하지만 형식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불행의 끝 앞에서, 누구든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관 없는 몸체’가 되었다. 유기체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엉뚱하고, 즉흥적이고, 금지된 선택을 한다. 그렇게 ‘나우펠’은 절벽에서 크레인으로 목숨을 걸고 뛰어 내렸다. 유기체가 내면화하고 있는 고정된 질서(이성적 판단)를 넘어버린 셈이다.
‘손’이 잘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역시 ‘기관 없는 몸체’가 되었다. 그녀와 공허한 섹스 후, 그는 긴 시간 쳐다만 보았던 어느 체육관으로 향했다. “제일 센 사람이랑 스파링하고 싶습니다.” 한 동안 다리를 절룩거렸고, 입술은 찢기고, 코피와 고막이 터졌다. 유기체에 통합되지 않는 부분적 대상(팔과 다리)이 그 자체로 싸움을 욕망했다. ‘그’는 ‘손’이 잘려 ‘기관 없는 몸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상적이고 이성적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엉뚱한, 즉흥적인, 금지된 행동을 통해 변이를 맞이했고, 다른 ‘나’로 생성되었다.
아슬아슬하게 크레인 위로 안착한 ‘나우펠’은 이제 어떻게 살게 될까? ‘그’는 알고 있을 테다. 절룩거리는 찢기고, 터져서 그 역시 아슬아슬하게 안착했다. 하지만 ‘그’가 절룩였던 것은 다리가 아니라 (그녀와의) 행복이었고, ‘그’가 찢긴 것은 입술이 아니라 (잘린 행복에 대한) 집착이었으며, 그가 터진 것은 코피와 고막이 아니라 삶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다. ‘그’는 비로소 새로운 ‘손’을 얻었다. ‘그’가 ‘기관 없는 몸체’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었듯, ‘나우펠’ 역시 “다른 세상에 가서 잘 됐다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을 테다.
잘려 나간 ‘손’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다. ‘손’이 잘려 나갔기에 ‘기관 없는 몸체’가 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미 잘려나간 행복에 집착해서 고통 받고 있는가? ‘손’이 잘려나간 절망적인 운명 앞에 서 있는가? ‘손 없는 몸’으로, ‘기관 없는 몸체’로 절벽에서 뛰어 내리라. 행복했던 순간의 집착을 끊고 앞으로 나아갈 방법은 그것뿐이다. 운명적인 절망을 뒤엎고 앞으로 나아갈 방법은 그것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에게 운명적인 절망,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슬픔과 기쁨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준다.
우리는 아직 우리의 ‘기관 없는 몸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의 자아를 충분히 해체하지 않았다’고 말해야만 한다. 상기(기억)을 망각으로, 해석을 실험으로 대체하라. 너희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찾아라. 그것을 만드는 법을 알아라. 이것이야말로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슬픔과 기쁨의 문제이다. 모든 것은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