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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羅生門 , In The Woods , 1950)

라쇼몽(羅生門 , In The Woods , 1950). 구로사와 아키라

*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 : 일본의 영화감독. 그는 젊은 시절,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문학(도스도옙스키, 셰익스피어 등)에 몰두했다. (그의 영화 「거미의 성」은 『맥베스』를 개작한 작품이고, 「란」은  『리어왕』을 일본풍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아키라는 26세에 한 영화사에 조감독으로 취직하는 것을 계기로 영화계에 들어섰다. 그를 세계적 거장으로 발돋움하게 해준 작품이 「라쇼몽」이다. 이는 일본의 유명한 작가인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두 개의 단편 <라쇼몽>과 <숲속>을 각색해서 연출한 작품이다. 아키라는 「라쇼몽」을 연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아쿠다가와의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마치 의사가 심장을 해부하듯 말이다. 그리고는 그 안의 어두운 욕망과 기괴한 뒤틀림 속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드러내 보인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감성의 이 기이한 욕망들을 나는 빛과 그림자를 통해 조심스럽게 작품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자기 마음의 숲에서 길을 잃고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키라는 어둡고 뒤틀리고 기괴한 인간의 심연을 잘 포착한 감독이다. 인간의 심연을 포착한 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깊은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심연에 질식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려 했다. 아쿠다가와는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는 한 번의 자살 실패 이후 노장이 될 때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테다. 그렇게 세계적 거장으로 발돋움한 구로사와 아키라는 세계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뉴욕 대학교 영화과에서는 감독의 이름을 딴 감독론 수업이 네 개가 있다. 그 네 명의 감독이 ‘앨프리드 히치콕’, ‘존 포드’, ‘루이스 부뉴엘’ 그리고 ‘구로사와 아키라’다. 


         

‘사실의 배치’로서 진실을 말하는 자는 추하다. 
하지만 ‘부끄러움’으로서 진실하려는 이는 아름답다.


1.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숲속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사무라이의 주검. 겁탈 당한 아내, 아내를 겁탈한 산적. 사라진 단도.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이 곧 ‘진실’인 것은 아니다. 이 ‘사실’들을 가지고 살인사건과 관련된 네 명(사무라이, 아내, 산적, 나무꾼)은 저마다 다른 ‘진실’을 말하고 있다.       

 

 먼저 산적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산들바람에 낮잠이 깨었소. 그때 사무라이의 아내에게 한 눈에 반했소. 사무라이를 죽일 생각은 없었소. 사무라이를 속여 포박한 후 그의 아내를 취하려 했을 뿐이오. 아내는 단도를 들고 나를 죽이려 했지만 이 천하의 다조마루가 그런 공격에 당할 리 있겠소. 그녀를 간단히 제압했소. 그녀를 겁탈하려 했는데 그녀는 저항하는 듯하더니 이내 그녀 역시 나를 원했소. 그리고 떠나려고 하자 여인이 내 갈 길을 막아섰소. 두 남자를 섬길 수 없으니 나와 남편 중 한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말했소. 나는 정정당당하게 남자를 풀어주고 칼까지 쥐어준 듯 정식으로 승부를 했고, 격렬한 싸움 끝에 남자를 죽였소. 여자는 그 틈에 도망쳐버렸소.”     

 

 이제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산적은 저를 범한 후 남편에게 조롱을 퍼붓고는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어요. 저는 남편에게 다가갔으나 그는 이해나 동정은커녕 차가운 증오의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았어요. 저는 밧줄을 풀어준 다음 차라리 나를 죽여도 좋으니 제발 그런 식으로 보지 말라고 애원했어요. 그러다 결국 저는 정신을 잃어버렸어요. 깨어보니 어찌된 일인지 남편은 이미 죽어 있었어요. 저는 정신없이 강가로 달려가 몸을 던졌지만 박복한 인생 그것마저 실패했어요,”     

 

 사무라이의 증언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죽은 사무라이는 무당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묶여 있는 저를 두고 아내를 겁탈한 산적은 아내에게 함께 달아나자고 유혹했소. 그러자 아내는 산적에게 나를 죽이고 달아나자고 요구했소. 아내의 그 인면수심의 말에 산적마저 놀라고 질려서 아내를 내동댕이쳐버렸소. 그리고 산적은 저를 풀어주었소. 그때 저는 산적을 마음속으로 용서했소. 하지만 아내에 대한 배신감과 자괴감을 견딜 길이 없어서 아내의 단도로 자결을 했소.”     

 

 이때 이 모든 사태를 엿보고 있었던 나무꾼이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한다. “산적은 아내를 겁탈한 후, 함께 도망가자고 간절히 애원했지요.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사무라이를 풀어주었지요. 산적은 ‘남자들끼리 결정하라’는 말로 알아듣고 사무라이와 싸우려 했습죠. 하지만 사무라이는 겁이 났는지 이런 여자 때문에 목숨을 걸긴 싫다며 아내에게 자결을 요구하며 결투를 거절했지요. 그러자 버림받은 아내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으며 두 남자들에게 비겁한 남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자극했지요. 결국 두 남자는 마지못해 결투를 벌었는데, 둘 다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싸우는 꼴이 불쌍하게 보일 지경이었지요. 우여곡절 끝에 산적이 사무라이를 죽이게 되고, 여인은 도망을 치게 된 겁니다.”     



2.

 산적. 사무라이, 아내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거짓’을 말했는가? 아니다. 재판과정에서 그들의 ‘진실’된 표정을 보라. 그들은 ‘진실’을 말했다. ‘진실’이 무엇인가? ‘사실의 배치’이다. ‘거짓’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사실의 배치’이기에 얼마든지 다른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 같은 ‘사실’들을 저마다 얼마든지 임의로 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실이라는 착시’가 그리도 쉽게 발생하는 이유다. ‘나는 진실하다’는 인간의 기만적 착시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런 진실의 기만적 착시는 왜 발생하는가? 달리 말해, 무엇이 주어진 ‘사실’들을 임의로 배치하게 만들어 ‘진실’을 날조하게 만드는가? 비대한 자의식이다. 비대한 자의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욕망과 허영 때문이다. 산적의 비대한 자의식은 무엇일까? 남성성이다. 산적은 ‘나는 강한 남성이야!’라는 과잉된 자의식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이 남자답고 강한 산적이라는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정말 배탈이 나서 말에서 떨어진 것일까? 말 타는 것에 서툴러서는 아니었을까? 그런 어수룩한 자신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의 비대한 자의식(남성성)은 진실을 왜곡한다. 아내는 정말 산적에게 매혹되었을까? 겁탈하려는 남자에게 매혹되는 여자는 비대해진 남성성 속에만 존재한다. 아내는 정말 남편과 산적의 결투를 종용했을까? 사랑이 아니라 강함에 매혹되는 여자는 비대해진 남성성 속에만 존재한다. 비대해진 남성성은 겁에 떨며 벌였던 개싸움도 벚꽃 속에서 펼쳐지는 사무라이들의 낭만적인 결투로 각색한다. 이것이 산적이 '사실'들을 갖고 산적만의 '진실'로 편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아내의 비대한 자의식은 무엇일까? 순종성이다. 그녀는 ‘나는 한 남자만을 섬기는 지고지순한 여자야’라는 과잉된 자의식을 갖고 있다. 남편은 아내를 정말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을까? 그런 남편에게 그녀는 정말 애원했을까? 그녀는 정말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그녀는 정말 자살시도를 했던 것일까? 그 모든 일은 그녀의 자의식이 편집하고 왜곡한 기억일 수 있다. 순종성이라는 과잉된 자의식을 갖고 있으면 모든 일을 수동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자신은 언제나 순종적이기에 항상 약자이고 그래서 불쌍한 피해자로 여기게 된다. 이것이 아내가 ‘사실’을 가지고 아내만의 ‘진실’로 편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사무라이의 비대한 자의식은 무엇일까? 성숙성이다. 사무라이는 ‘나는 누구보다 성숙한 사람이야’라는 과잉된 자의식을 갖고 있다. 사무라이는 정말 산적을 용서했을까? 그는 배신감과 자괴감을 견딜 수 없어서 자결한 것일까? 성숙성이라는 비대한 자의식을 갖고 있으면 그에 맞게 모든 일이 채색된다. 아내를 겁탈한 산적이지만 자신을 풀어주었기에 용서하는 성숙함. 자신을 죽이라고 말한 아내이지만 그녀에게 해코지를 하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하는 성숙함. 사무라이는 이런 성숙함이라는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사무라이가 ‘사실’을 가지고 사무라이만의 ‘진실’로 편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사무라이와 아내와 산적만이 그런가? 인간은 진실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어떤 인간이라도 온전히 진실할 수 없다. 혹자들은 죽음 앞에서 서면 인간은 진실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순진한 이야기인가? 사무라이를 보라. 죽음 앞이 아니라 죽어서도 진실을 날조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진실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일정 정도 과잉된 자의식, 즉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다운 사람이야!” “나는 여성적인 사람이야!” “나는 지혜로운 사람이야!” 이런 자의식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비대해졌을 때 죽음 앞에서 조차 ‘진실’을 날조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의구심이 든다. 나무꾼은 온전히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가? 살인사건의 전말을 모두 지켜보던 나무꾼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가? 나무꾼은 진실을 말했는가? 아니다. 그 역시 위증을 했다. 아내의 단도를 훔쳤기 때문이다. 그의 욕망과 허영 때문에 그 역시 ‘진실’하지 못했다. 아니, 그가 본 사건의 전말 역시 유일한 ‘진실’이라도 단언할 수 없다. 그 역시 나무꾼의 비대한 자의식으로 인해 왜곡되고 편집된 ‘진실’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3.

 삶의 진실에 대해서 말하자. 인간은 자의식(에서 파생된 욕망과 허영)이라는 필터를 통해 세계(진실)를 본다. 인간은 바로 그 세계, 저마다의 세계(진실) 속에 살고 있다. 이것이 불교의 진단처럼, “삶은 고통의 바다苦海”이고, “세계는 불타火宅는 집”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간사의 참혹한 갈등은 어디서 오는가? 거짓과 진실이 부딪힐 때 지옥이 되지는 않는다. 거짓은 거짓이기에 진실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오직 진실과 진실이 부딪힐 때 지옥이 된다. (모든 전쟁은 진실과 진실의 대결이고, 그 중 최악의 전쟁은 종교 전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것이 우리의 세계가 지옥인 이유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 ‘진실’되게 살고 있다고 믿으니까.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진실한 인간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라쇼 성문에서 가난 아이의 옷을 빼앗아가려는 이처럼 짐승같이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라고 다그치는 나무꾼을 그는 오히려 겁박한다. “너도 네 이기심으로 채우려 했듯이, 나 역시 내 이기심을 채우려는 건데 뭐가 문제냐? 인간이 다 그런 것 아니냐?” 인간의 심연을 본 이들이 왜 하나같이 죽음의 냄새가 자욱한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졌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짐승으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으로 살고 싶어서 죽었던 것이다.


 인간의 심연 본 많은 이들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죽음의 냄새가 자욱한 자리에 섰다. 끔찍한 인간의 심연과 참혹한 삶의 진실에 이른 이들은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를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인간으로 살기 위해 죽었던 이들이 놓친 질문이 있다. ‘인간다움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들이 죽음의 냄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는 인간다움의 조건을 진실함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진실’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인간이 될 유일한 방법은 죽음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다움의 조건은 진실함이 아니다.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가 인간다운 존재다. 산적, 아내, 사무라이, 나무꾼 중 누가 가장 인간답다고 느끼는가? 나무꾼이다. 왜 그런가? 그 역시 자신의 욕망과 허영을 채우기 위해 거짓을 말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그가 부끄러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며 그래서 위선적이고, 기만적이고, 거짓된 존재다. 이것은 비인간성이 아니라 ‘인간성’에 가깝다. 하지만 그런 ‘인간성’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비인간성’이다.


 진실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의 배치 따위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이 바로 진실함이다. 자신의 거짓됨 앞에서 고통스럽게 부끄러워하는 마음, 이것이 진실함이다. 자신의 거짓됨을 아는 이들이 가장 진실하다. 그들만이 부끄러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가장 진실하지 못한가? “나는 진실한 사람이야!”라는 비대한 자의식을 갖고 있는 인간이다. 이들은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기에 어떤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말 못할 비밀하나 정도는 갖고 있다. 그래서 때로 거짓되게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거짓됨이 한 사람을 비인간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거짓됨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 그것이 한 사람을 비인간적 존재로 만든다. 누가 인간다운가? 자신이 거짓된 존재임을 늘 자각하며 고통스럽게 부끄러움을 끌어안고 사는 이. 그가 가장 인간다운 사람이다. 고통스러운 부끄러움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보다 ‘진실’된 이는 없다. ‘사실의 배치’로서의 진실을 말하는 자는 추하지만, ‘부끄러움으로서 진실’하려는 이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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