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Joker, 2019) 토드 필립스
* 토드 필립스 : 뉴욕 출신 배우, 각본가 및 영화감독. 뉴욕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영화계 들어섰다. 이후 자신만의 유머 감각으로 다수의 코메디 영화(행오버, 듀 데이트, 워 독)를 연출했다. 이를 통해 필립스는 흥행 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커리어 최초로 비코메디 영화인 「조커」를 연출했다. 이는 코믹스 원작 영화 최초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코메디 영화를 찍다가 왜 갑자기 조커와 같은 영화를 찍게 되었느냐?’ 이 질문에 필립스는 이렇게 답한다. ‘「행오버」처럼 어떤 성역도 없는 수위 높은 코미디 작품을 찍고 싶다. 그런데 요즘 사회가 너무 정치적 올바름에 민감해져 있다고 느낀다. 「조커」를 연출하게 된 데에는 그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기도 했다.’
(윤리적‧정치적)옳고 그름의 재단은 예술을 질식시킨다. ‘그것은 옳은 이야기야!’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지!’ 이런 강박 속에서 예술은 없다. 이것이 모든 예술가들이 사회적인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와 집요하게 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쩌면 이것이 명작이라 불릴만한 모든 예술이 금기를 넘어설 때 나오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조커」라는 역시 그렇다. 옮고 그름을 재단하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어느 코메디 감독을 예술가로 각성시킨 것일 테다.
누가 광기가 우리네 삶을 파괴한다고 말하는가?
광기는 최고의 지혜다. 광기만이 우리네 삶을 약동하게 만든다.
1.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방문을 닫아 놓고 나를 때렸다. 다락방으로 도망가 문을 잠갔다. 어머니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문을 열라고 소리를 지르며 문을 두들겼다. 문 뒤에 서 있는 내 몸이 같이 들썩거렸다. 두려움, 불안, 증오, 분노, 멸시, 복수심, 절망의 감정이 뒤엉켜 울음이 났다. 그때 갑자기 웃고 싶어졌다. 웃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쿵쾅거리는 문 뒤에서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웃었다. 그 날이 내 안의 ‘조커’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커’가 될 수는 없었다. 칭찬받고 관심 받고 싶었으니까. 사랑받고 싶었으니까.
‘아서’처럼 살았다. 어딜 가든 관심 받고 칭찬받는 누이처럼 되고 싶었다. 학창시절, 나의 대외적 꿈은 ‘의사’였다. 누이가 의사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의 입가 번지는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광기를 숨기고 모범생처럼 살려고 노력했다. 학창시절, 중간 중간 터져 나오는 ‘조커’를 다시 다락방에 쑤셔 넣으며 말 잘 듣는 착한 ‘아서’처럼 살았다. 하지만 나는 명문대 의대생이 되지 못했고 그저 그런 대학의 흔해빠진 공대생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광대 짓을 하는 월급쟁이가 되었다. 내 안의 ‘조커’는 사라졌을까?
“정신질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들에게 아닌 척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서’의 메모다. 아니 나의 메모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의대생이 되지 못한 것? 더 착하게 살지 못한 것? 아니다. 남들에게 ‘조커’가 아닌 척을 해야 했던 일이다. 부모 앞에서, 선배 앞에서, 선생 앞에서, 사장 앞에서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살았던가? 웃기지 않지만 웃는 척 했고, 미안하지 않지만 미안한 척 했고, 화가 났지만 화나지 않은 척했다. 정신질환의 문제가 남들에게 아닌 척을 하는 것이라면, 나는 지독한 정신질환자였다.
“그냥 한번만 안아주면 안돼요?” 엉뚱한 사람을 아버지로 오해해 사랑을 구걸하는 ‘아서’다. 아니 나다. 정상인처럼 살려고 애를 썼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 덕에 천덕꾸러기 신세는 겨우 면해 번듯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것은 엉뚱한 사람을 ‘아버지’로 오해해 사랑을 구걸하는 일이었다. “나 이렇게 착한 진규가 되었어요. 그러니 한번만 안아주세요.” 세상의 문제였는지, 우리의 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은 ‘아서’와 내게 무례했다. 착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은 나를 무례하게 대했다. 아무도 ‘아서’를 안아주지 않았던 것처럼, 나 역시 아무도 안아주지 않았다. 세상은 우리에게 모욕을 주었고 조롱했다.
‘아서’가 금융쟁이 셋을 죽인 날, 나는 길을 돌아간다는 이유로 아버지뻘 되는 택시 기사의 멱살을 잡고 상소리를 해댔다. ‘아서’가 동료를 죽이던 날, 나는 오후 2시 직장에서 전화기를 박살냈다. ‘아서’가 어머니를 죽인 날, 나는 사표를 썼다. ‘아서’가 ‘머레이’를 죽인 날, 나는 링에 올랐다. ‘아서’가 자신의 피로 광대 분장을 하던 날, 나는 철학 책을 펼쳤다. 나는 ‘조커’가 되었다. 매너도 배려도 예의도 없는 인간이 되었다. 더 이상 남들에게 내가 아닌 척하며 살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는 광기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커’가 가는 곳마다 피바람이 불었듯, 내가 가는 곳 마다 칼바람이 불었다. “아, 씨발!” 조용한 카페에서 느닷없이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다. “이제 연락하지 마라!” 30년 넘게 알고 지냈던 친구들과 연을 끊었다. “당신 삶은 틀려먹었어요!”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정서적 난도질을 해댔다. 나는 단지, 웃길 때 웃었고, 슬플 때 슬퍼했고, 화가 났을 때는 화를 냈을 뿐이다. 더 이상 연기하고 살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조커’가 되어 있었다.
2.
멍청한 인간들. ‘나’를 두려워하는 인간들도 멍청하지만 그보다 더 멍청한 인간들이 있다. ‘나’를 안쓰러워하는 인간들이다. ‘내’가 안쓰러운가? 자신들의 불행을 끝내지도, 아니 자신이 불행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나’를 안쓰러워한다니. 이 얼마나 웃음이 터질 정도로 멍청한 일인가.
‘나’의 웃음은 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좆같이 불행했던 시절을 스스로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며, 기어이 그 불행의 지속을 ‘나’의 행복이라고 날조하려했기 때문이다. “해피” 좆같은 소리다. 나는 한 번도 ‘해피’한 적이 없었다.
병신 새끼 셋을 죽인 것. ‘내’가 입양아였음을 확인한 것. 그녀와의 사랑이 망상이었음을 깨달은 것. 엄마를 죽인 것. 머레이를 죽인 것. 그것 때문에 내가 두렵고 불쌍한가? 멍청한 것들아! 그것은 ‘나’의 구원이었고 내 삶을 되찾은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아도 된다고. ‘내’ 감정과 욕망을 숨기며 살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 좆같은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이제 드디어 ‘내’가 좋다. 내 삶이 기쁘다!
돈을 벌기 위해 화를 참고, 사장 앞에서 웃음을 참고, 우울해서 상담을 받고, 불면증 때문에 약을 먹는 너희들 아니더냐? 무엇이 정상인지도 모르는 것들이 정상인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지금 너희들의 모습 아니더냐? ‘나’를 두려워하거나 불쌍하게 여기는 멍청한 인간들아. 너희가 진정으로 바랐던 삶이 지금 ‘나’의 삶이 아니더냐. 멍청한 너희가 모르는 비밀을 하나 알려줄까?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메디였다.”
‘나’를 두려워하지 마라. 그 두려움은 너희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니까. ‘나’를 안쓰럽게 여기지 마라. 그 안쓰러움은 너희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니까. 너희들이 두려워하고 안쓰러워해야 할 것은 바로 너희 자신이다. ‘나’는 이제 해방되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나’는 이제 비로소 정말 ‘해피’하다. 멍청한 인간들아. 기다려라. ‘내’가 곧 너희를 죽여주러 가마.
3.
광기는 나쁜 것인가? 그것은 삶을 파괴하는가? 그런 것도 같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살인마가 된 ‘조커’의 삶은 파괴된 것 같다. 제 멋에 취한 괴짜 철학자가 된 나의 삶은 파괴된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멀리서 보았을 때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조커’에게 가까이 가본 적이 있는가? 그보다 더 가까이 ‘조커’가 되어본 적이 있는가? 그때 알게 된다. 광기만 삶을 구원할 지혜임을.
광기는 부서지기 쉽지만 최고의 지혜이다. 『광기의 역사』 미셸 푸코
푸코의 말처럼 광기는 우리네 삶을 부서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지혜이다. 광기를 긍정하게 된 ‘조커’의 쾌활한 춤사위를 보라. 더 이상 억지웃음을 지을 필요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필요도, 상담을 받을 필요도, 약을 먹을 필요도 없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독히도 불운한 삶 안에서 최고로 유쾌한 삶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광기라는 지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나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썩어 들어가던 내 삶이 활력을 찾은 것은 광기를 통해서다. 누가 광기를 비이성이라 하는가? 광기야 말로 최고의 이성이다.
광기가 섞여 있지 않은 위대한 정신은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지혜로운 자들과 가장 정직한 시인들은 때로 이성을 잃고 격정의 상태에 빠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광기는 이성의 노고에 대해 난처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계기이다. 광기를 가로질러, 그리고 광기의 허울뿐인 승리를 지나서 이성은 표면화되고 승리를 구가한다. 광기는 다만 이성의 날카롭고 비밀스러운 힘일 따름이다. 『광기의 역사』 미셸 푸코
광기가 섞여 있지 않은 위대한 정신은 없다. 사람들을 죽여 대는 ‘조커’는 불편한가? 제 멋에 취한 ‘철학자’는 불쾌한가? 큐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돌변해서 소름 돋는 연기하는 배우는 어떤가? 미친듯한 표정으로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와 첼로리스트는 어떤가? 종잡을 수 없이 괴팍한 시인과 소설가는 어떤가? 그들은 모두 자신의 광기에 직면한 이들이다. 그들은 안다. 그 광기가 자신들을 구원했음을. 광기는 이성의(사회적) 노력을 난처하게 만들지만 없어서는 안 된다. 광기를 가로지른 이성이 표면화되었을 때, 진정한 승리(기쁨)에 도달할 수 있다. 광기는 진정한 이성이다. 다만 날카롭고 비밀스러운 힘이 내포된 이성일 뿐이다.
조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 우리에게는 모두 광기가 있다. 하지만 그 광기를 단박에 받아들일(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 필요는 없다. 광기는 최고의 지혜인 동시에 우리네 삶을 파괴할 수는 양날의 검이니까 말이다. (네 삶이 파괴되어도 좋다면, 혹은 불운하게도 그럴 수밖에 없다면 광기 속 자신을 던져라!)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늘 주눅 들어서 ‘해피’한 척 살아야만 했던 ‘아서’처럼 살 것인가? 당당한 하지만 광기어린 ‘조커’로 살 것인가? 달리 말해, 정상인처럼 살며 안전하게 썩어 갈 것인가? 광인처럼 살며 위험하게 약동할 것인가? 그 사이에서 배회하고 있다면 광기를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광기를 존중한다는 것은 광기에서 질병이라는 무 의지적이고 불가피한 사고를 간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진실의 그 하부한계, 우발적이지 않은 본질적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광기의 역사』 미셸 푸코
광기는 질병이 아니다. 달리 말해, 광기는 의지가 없거나 불가피한 사고가 아니다. 광기를 마치 질병처럼, 무 의지적이고 불가피한 사고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광기를 존중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인간적 진실의 하부 한계”가 있다. 결코 “우발적이지 않은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나는 증오하는 이를 찢어발기고 싶다. 나는 사랑하는 이를 씹어 삼키고 싶다. 그것이 나의 “인간적 진실의 하부한계”다. 언어로는 결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광기가 있다. 이는 결코 우발적이지 않다. 내 삶의 맥락이 내가 그런 광기어린 존재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광기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 “본질적인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모두 그런 “인간적 진실의 하부한계”가 있다. 그것은 폭력의 코드(소리 지르고 때리고 맞고 싶은 혹은 죽이거나 죽고 싶은 광기)로 나타날 수도 있고, 성性의 코드(사회적 금기 너머의 섹스를 향한 광기) 그 모든 코드가 막혔다면, 영성적인 코드(종교적인 혹은 미신적인 광기)로 드러날 수도 있다. 그 형태가 무엇이든 “인간적 진실의 하부한계”가 있다. 광기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 하부한계를 우발적 사태로 여기지 않고, 그 본질적 한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나는 저 인간을 찢어발기고 싶구나!” “나는 그녀를 씹어 삼키고 싶구나!”
우리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정상인이 되거나! 광인이 되거나! 광기를 존중하거나! 첫 번째 길은 안전하게 썩어가는 길이다. 두 번째 길은 위험하게 약동하는 삶이다. 세 번째 길은 위험천만한 두 번째 길을 덜 위험하게 준비하는 길이다. 어떤 길이든 자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온갖 것들에 상처 입은 우리네 마음을 치유해줄 유일한 해법은 광기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만은 잊지 말자. 내가 ‘조커’가 될 수 있게 힘이 되어주었던 푸코의 말이 있다. 언젠가 ‘미친 듯이’ 되뇌었던 그 말을 이제 광기 앞에 선 이들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인간이 광기 속에서 자신의 진실을 발견하므로, 치유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진실과 광기의 바탕으로부터다. 『광기의 역사』 미셸 푸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