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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Amour, 2012)

아무르(Amour, 2012) 미카엘 하네케

* 미카엘 하네케 :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 국적의 영화감독. 빈 대학교에서 철학, 심리학, 연극을 공부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영화관에서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잡역부로 일하고 라디오에서 편집자와 극작가, 그리고 평론가로 일을 했다. 1974년에 텔레비전 감독을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48세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사회적인 쟁점을 부각시키려 노력해왔다. ‘폭력은 어떻게 화면에 표현되는가?’ ‘가족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 ‘악은 어떻게 우리 사회에 파고드는가?’ 하네케는 이런 문제의식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표현한다. <퍼니 게임> <히든> 등의 작품을 통해 미디어의 폭력성을 고발했고, <하얀 리본> <피아니스트> 등의 작품을 통해서 일상에 숨어있는 권력과 폭력, 욕망 그리고 그 사이에 뒤엉킨 사람들의 관계를 드러냈다. 

“사진은 진실이며, 영화는 초당 24개의 진실이다.”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 대한 정의다. 고다르의 이 말을 하네케는 다시 정의한다. “영화란, 진리를 위한, 혹은 진리를 찾기 위한 초당 24개의 거짓들이다.” 영화는 결코 진실일 수 없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연출(거짓)이다. 영화가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영화가 거짓(연출)이라는 진실로부터 시작할 때이다. 하네케는 초당 24개의 거짓을 통해 진리를 표현하려한다. 이것이 그가 거장일 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삶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는가? 세상은 온통 거짓 아닌가? 우리네 삶에서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수 없는 거짓들을 정직하게 직면하며, 그 거짓들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려 할 때 겨우 진실의 끄트머리라도 잡을 수 있다. 

 다른 거장들의 작품들이 그런 것처럼, 하네케의 영화 역시 다소 지루한 면이 있다. 그것은 우리네 삶 자체가 지루한 것이기 때문일 테다. 흔한 감독들은 연출(거짓)을 통해 흥미로운 삶을 보여준다. 그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삶의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은 지겹고 지루하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삶의 진실을 보여주려는 영화도 지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감독의 문제가 아니다. 삶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삶의 진실에 직면하려 하려 하지 않았던 우리의 문제다. 지루한 삶으로부터 도피하려 자극적인 영화를 찾았던 우리의 문제다.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처럼, 삶의 깊이만큼 영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나는 모든 영화에서 진실에 접근하려 노력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하네케의 말이다. 하네케는 모든 영화에서 진실을 보여주고자 애를 썼다. 이런 그의 노력은 <아무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죽음과 사랑에 대해 연출(거짓)했지만, 죽음과 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진실’되게 보여준 작품도 드물다. 우리가 <아무르>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없다면, 우리는 죽음과 사랑이라는 삶의 진실에 깊이 들어가 보지 못한 까닭이다. 삶의 진실에 이른 자들은 삶의 진실을 표현하려는 거짓에 진실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을 테다.
“너의 죽음 곁에 고통스럽게 서 있을게. 너에게 아직 못해 준 이야기가 많으니까.”   

   

1. 

 ‘안느’는 죽어가고 있다. ‘안느’에게 어떤 냄새가 날지 나는 알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내 인생은 흑백으로 기억되어 있다. 불성실하고 무능력했던 아버지의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다. 홀로 살던 아버지의 어머니는 그날부터 가난한 집의 불청객이 되었다. 가난에 쪼들리던 어머니는 안방에서마저 쫓겨났다. 치매에 걸리면 벽에 똥칠을 한다는 말을 온 몸으로 보았다. 안 방에는 늘 똥오줌 냄새가 났다. 온 집안 식구들이 아버지의 어머니를 챙겨야 했다. 어머니는 항상 악에 받쳐 있었고, 아버지와 싸우지 않는 날이면 아이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아버지의 어머니도 죽어가고 있었고, 그 사이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누이도 죽어가고 있었다. 내게 죽음의 냄새는 똥 냄새다. 그 냄새가 나의 기억을 흑백으로 처리했다.      


 ‘안느’에게도 똥냄새가 났을 테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전혀 우아하지 않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마저 지키기 어렵다. 침대에 소변을 보고 화장실을 가는 것마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삶. 그것이 죽음에 임박한 삶이다. 그래서 죽음은 우아하게 살았던 이들에게 더욱 큰 고통이다. 음악가로 우아하게 살아오던 ‘안느’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비틀어져가는 육체를 스스로 마주는 일과 비틀어져가는 육체를 아끼는 제자에게 보이는 일. 둘 중 어느 것이 ‘안느’에게 더 큰 고통이었을까? 

     

 죽음에는 두 가지 고통이 있다. ‘존재’와 ‘존엄’에 대한 고통이다. 죽음에는 ‘존재’적 고통이 있다. 이는 공포다. 죽음은 공포다. ‘나’라는 한 존재가 사라져간다는 공포. 이것이 죽음의 ‘존재’적 고통이다. 죽음에는 또 하나의 고통이 있다. ‘존엄’에 대한 고통이다. 한 인간으로 마지막까지 유지하고 싶은 최소한 존엄이 위협받는 고통이다. 한 인간으로서 지키고 싶은 마지막 품위마저 지킬 수 없게 될 때 느끼게 되는 고통. 이것이 죽음의 ‘존엄’적 고통이다. 죽음 앞에서 ‘존재’적 고통을 느끼는 이는 죽음 앞에서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고, ‘존엄’적 고통을 느끼는 이는 죽음 앞에서 타인마저 생각하는 이다.



 전자의 고통보다 후자의 고통을 시달리는 이들이 더 성숙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공포보다 품위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성숙하다. “나 죽으면 어떻게”라고 두려움에 고통스러운 하는 이들보다 “나 인간답게 살 수 없으면 어떻게”라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못할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더 성숙하다. 미숙한 이들은 살았을 때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에 죽음 앞에서 죽음에 잠식당하지만(“나 죽으면 어떻게”), 성숙한 이들은 살았을 때 죽음을 생각했기에, 죽음 앞에서 조차 삶을 생각한다.(“인간답게 살 수 없으면 어떻게 해”) 이것이 미숙한 이들은 죽음 앞에서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지만 성숙한 이들은 죽음 앞에서조차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이유다. 인간답게 산다는 건, 사랑하는 이를 배려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니까 말이다. 


 ‘안느’는 성숙하다. ‘존재’가 사라지는 ‘고통’보다 존엄하지 못한 고통을 더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녀가 더 이상 최소한의 존엄조차 지키지 못할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물조차 거부하며 스스로 죽으려 했던 이유였을 테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 했던 것이고,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이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였을 것이다. 우아하게 살았던 ‘안느’는 삶의 마지막까지도 최소한의 우아함은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안느’의 죽음에 거리 두지 말라. ‘안느’는 그저 늙어서 죽은 것인가? 죽음은 멀리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안느’ 집에 예고 없이 찾아들었던 도둑처럼, 열린 창문으로 우연히 들어온 비둘기처럼, 죽음은 ‘안느’에게도 우리에게도 그렇게 찾아올 테다. 죽음에 대해서 진짜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라는 한 존재가 사라져가는 공포를 마주한 적이 있는가? 그 존재론적 고통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똥 냄새를 풍기는 자신을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렇게 최소한의 품위마저 잃은 자신을 생각본 적 있는가? 최소한의 존엄도 지키기 못할 고통을 마주한 적이 있는가? 생각해본 적이 있든 없든, 죽음은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잘 사는 것이다. 잘 살아야 애처럼 죽지 않을 수 있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어른처럼 죽을 수 있다. 나는 ‘존재’적 고통에 잠식당한 채로 죽고 싶지 않다. ‘존엄’적 고통 속에서 최소한 우아함은 지킨 채로 죽고 싶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죽음 앞에서 애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는 그 흔한 노인들이 그리도 많았을 리 없다.

      

 늘 죽음을 마음에 품고 살고 싶다. 죽음의 앞에서조차 ‘내’가 아닌 ‘너’를 아낄 수 있도록. 우아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품위를 잃지 않는 죽음은 늘 죽음을 품고 살았던 이들에게만 찾아오는 축복일 테다. 축복을 준비하고 있는가? ‘조르주’와 ‘안느’는 떠났다. 텅 빈 집, 사랑했던 이들이 앉았던 소파에 이제 ‘에바’가 쓸쓸히 앉아 있다. 우리 역시 지금 그 소파에 앉아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아니 어떻게 죽을 것인가?


       

2.

 이 영화는 죽음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사랑Amour에 관한 영화다. ‘안느’ 곁을 지키는 두 사람이 있다. 남편 ‘조르주’와 딸 ‘에바’다. ‘에바’는 ‘안느’를 사랑하는가? 아픈 엄마를 가끔 찾아오는 ‘에바’는 날로 상태가 악화되어가는 엄마를 보며 마음이 아프다. 그 마음 아픔은 사랑인가? 쉽게 답할 수 없다. “엄마가 이상한 말만 지껄여” 이것이 ‘에바’의 속내다. ‘에바’는 죽음에 임박해가는 한 존재의 고통을 같이 느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엄마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자기연민을 느낀다. ‘에바’가 엄마를 소중히 대하는 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자기연민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불쑥 엄마를 찾아온 ‘에바’는 ‘안느’의 상태가 더욱 심각해져간다는 것을 직감한다. ‘에바’는 엄마를 이렇게 둘 수 없다며 ‘조르주’에게 따지듯 묻는다. “진지하게 이야기해보자고요.” “어떻게 하는 게 진지한 건데? 너희 집에 모셔 갈래? 아니면 요양병원에 데려다 놓을까? 진지하게 말해봐” 가볍게 산 이들은 언제나 삶의 문제가 벌어졌을 때 심각해진다. 인플레이션이나 부동산에나 관심을 갖고 산 ‘에바’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도, 엄마의 죽음도 진지하게 생각본 적이 없다. 그런 ‘에바’에게 엄마의 죽음이라는 실존적 사건이 벌어졌다. 그녀는 심각해졌다. 가볍게 산다는 건 무엇인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바’는 심각할 뿐 진지하지 않다. ‘에바’는 ‘안느’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각함은 진지함이 아니다. 무겁게 산 이들은 삶의 문제가 벌어졌을 때 심각하지 않다. 진지하다. 무겁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한다는 것이다. ‘조르주’는 진지하다. 온 마음으로 ‘안느’ 곁에서 죽음을 함께 하고 있다. 죽음을 함께 한다는 것은 지독히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심지어 기억마저 잃어가는 이를 돌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조르주’ 역시 그 고통 때문에 때로 ‘안느’에게 짜증을 내기도 한다.       


 

 사랑은 고통이다. ‘조르주’는 ‘안느’를 사랑한다. 기꺼이 고통을 감당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조르주’는 단지 ‘안느’의 병수발 때문에 고통스러웠을까? ‘조르주’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물조차 거부하는 ‘안느’의 뺨을 후려갈긴다. 이것이 ‘조르주’의 가장 큰 고통이다. ‘안느’의 뺨을 후려갈기며 ‘조르주’는 알았을 테다. “내 이기심으로 안느를 잡고 있는 것이구나!” ‘조르주’는 ‘안느’를 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리려 했다. ‘안느’가 없는 자신의 삶을 감당할 수 없어서. 사랑은 고통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 없는 삶마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르주’에게 비둘기는 두 번 찾아온다. 첫 번째 비둘기가 왔을 때, 황급히 내쫒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따뜻한 담요를 감싸서 꼭 껴안는다. 비둘기는 죽음이다. 사랑하는 ‘너’의 죽음이다.  사랑의 표어는 하나다. “당신 뜻대로 하소서!” 이 얼마나 무거운 말인가? ‘조르주’는 온 몸을 저미게 하는 고통을 견디며 ‘안느’를 죽여준다. 그것이 ‘안느’가 바라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너’를 죽여주는 것이다. 비둘기를 꼭 끌어안은 것처럼, ‘조르주’는 ‘안느’의 죽음을 꼭 끌어안는다. ‘진지하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노부부의 일상은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말해준다. 사랑이 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인지 말해준다. 사랑은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과정일 뿐, 사랑의 본령이 아니다. 사랑의 본령은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랑하는 ‘너’를 위해서. “당신한테 못해준 이야기가 내겐 아직 많아.” ‘안느’를 향한 ‘조르주’의 서러운 속삭임은 그 어떤 사랑 영화의 달콤한 속삭임보다 먹먹한 사랑 고백이었다.

      

 <아무르>는 “사랑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사랑영화다. <아무르> 죽음 이야기로 가득 찬 사랑영화다. 이것이 <아무르>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게 해주는 이유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해”라는 말에 있지 않다. 죽음 앞에 있다. ‘나’의 죽음 앞에서도 ‘너’를 아낄 수 있는가? ‘내’가 홀로 되더라도 ‘너’의 죽음을 함께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 죽음 앞에서 서고 싶다. 내 똥냄새가 너를 너무 고통스럽게 하지 않도록 죽고 싶다. 너의 똥냄새 앞에서도 너의 곁에 있어 주고 싶다.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을 테다. “너의 죽음 곁에 고통스럽게 서 있을게. 너에게 아직 못해 준 이야기가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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