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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란

가라앉고 떠오르고

"우리딸, 먹고 싶은 거 다 골라봐."  
마치 노숙자처럼 보이는 차림의 아빠와 딸이 한강의 간이 편의점 앞에 있다. 아빠는 딸에게 먹고 싶은 것을 골라보라고 말한다. 딸은 이러저런 과자를 고르지만 아빠는 탐탁치않다. 아빠는 딸에게 삶은 계란을 권한다. “아빠가 어렸을 땐, 물에 삶은 계란 동동 띄워놓고 수영하고 놀았어. 놀다 지치면 삶은 계란 하나 까먹으면 힘이 다시 생겨서 또 놀곤 했어.”     
 그 말을 듣고 있던 편의점 할아버지가 끼어든다. “아이한테 거짓말하면 쓰나? 삶은 계란은 물에 안 뜨지” 아빠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언성을 높이며 내기를 하자고 한다. 삶은 계란이 물에 뜨는지 가라앉는지. 만약 계란이 가라앉으면 딸을 할아버지에게 주고, 계란이 뜨면 편의점에 있는 음식을 마음대로 가져가기로 한다.
 아빠는 계란 세 개를 쥐고 한 강 앞에 섰다. 하나를 던진다. 가라앉는다. 딸은 아빠에게 다시 하나 더 던져보라고 권한다. 아빠는 또 하나를 던진다. 가라앉는다. 마지막 남은 하나마저 던지려고 할 때, 딸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한다. “마지막 계란은 내가 먹으면 안 돼?” 아빠는 화가 난 듯 말한다.  
"너도 아빠 못믿는 거야? 어? 너도 못믿는 거냐고."  
 아빠와 딸이 실랑이를 벌일 때 할아버지가 다가와서 아빠를 달랜다. “하나 남은 계란인데 딸을 주자고” 아빠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마지막 달걀을 한 강에 던져버린다. 당연히 마지막 계란마저도 가라 앉아 버렸다. 그렇게 절망하려던 바로 그 순간, 첫 번째로 던졌던 계란이 타조알 만큼 엄청 커진 채로 한강에 떴다. 아빠와 딸은 편의점에 있는 과자를 한 아름 들고 누구보다 해맑게 웃으며 어디론가 다시 향한다.            



 단편 영화 <싱크 앤 라이즈>의 이야기다. 처음에 웃다가 이내 마음이 울컥해졌다. ‘삶은 계란’이다. 어느 단편영화 감독에게 ‘삶은 계란’은 영화였을 테다. 삶은 계란은 물에 던져도 뜨지 않는다. 잘 모르는 이들도 있겠지만, 한 번만 던져보면 모두 다 알게 된다. 그 감독은 ‘삶은 계란’이 물에 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겠지.      


 처음에야 주변 사람들도 ‘삶은 계란’을 물에 던지는 것을 응원해주지만, 몇 번 가라앉는 것을 보면 모두들 말한다. “삶은 계란은 원래 물에 뜨지 않아! 포기하고 그냥 까서 먹어!”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도 힘들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일이 있다. 자신이 던져버린 ‘삶은 계란’ 때문에 고통 받을 주변 사람들을 볼 때이다. ‘삶은 계란’을 허망하게 물에 던져버리지만 않았다면 딸의 허기는 면하게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삶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삶은 계란'을 던져버리는 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삶은 계란’이 꼭 한 번은 떠오를 것이란 믿음으로 마지막 계란마저 강물에 던져버린다.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 마음을 안다. 나 역시 ‘삶은 계란’을 무던히도 강물에 던지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안다. 영화처럼, ‘삶은 계란’이 타조알이 되어 물에 뜨는 일은 없을 거란 걸. 그러니 과자를 한 아름 안고 웃으며 뛰어갈 일 역시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거란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삶은 계란’이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삶’은 언젠가 떠오를 날이 있을 테니까. 그러니 ‘계란’도 언젠가는 떠오를 테다. ‘삶은 계란’이니까. 삶의 무게에 짖누릴 때조차 위트를 잃지 않는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 단편영화 감독이 봉준호가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법했다. 


- 참고로, 이 작품은 <괴물>의 모티브가 되었고, 결국 <괴물>이라는 '삶은 계란'은 타조알이 되어 물에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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