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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과 피해의식, 다양성을 제거하는 안경

피해의식과 파시즘 II

파시즘과 피해의식, 다양성을 제거하는 안경

 다시 묻자. 파시즘이 무엇인가? 복잡하고 난해한 학술적 정의를 말할 것 없다. 파시즘은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다양한 면들을 모두 제거하고 하나의 면만을 보는 일이다. 무비판‧비합리(광신적)‧폭력적 ‘묶음’(파시즘)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면들을 모두 제거하고 오직 하나의 기준만으로 구별하고 분류할 때만 가능하다. 나치는 어떻게 유대인들을 학살할 수 있었을까? 오직 유대인으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인종적 특징(유대인)만을 갖고 있지 않다. 어느 유대인은 제빵사이며, 슈베르트를 좋아하며,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강아지를 키우고, 저녁에는 산책을 하는 사람이다. 한 사람이 가진 그 다양한 면을 모두 제거하고 단지 유대인이라는 사실만을 볼 때 파시즘은 시작된다. 파시즘이 작동할 때 상대를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가능해지고 끝내는 상대(적)을 참혹하게 살육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피해의식의 작동원리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피해의식은 일종의 안경이다. 다양한 세상을 오직 두 가지로만 보게 만드는 안경. 돈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은 세상을 ‘돈’과 ‘돈 아닌 것’으로만 본다. 학벌에 대한 피해의식 심한 이들은 ‘명문대’와 ‘명문대 아닌 것’으로 세상을 본다. 성(젠더)에 대한 피해의식 있는 이들은 세상을 ‘남성’과 ‘여성’으로만 본다. 피해의식에 휩싸일 때 우리는 눈앞에 있는 상대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없다. 단지 자신의 피해의식이 비추는 하나의 면만을 보게 된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파시즘의 원인인 동시에 이미 그 자체로 파시즘적이다.


      

우리 사회의 파시즘적 씨앗들    

 

 파시즘은 멀리 있지 않다.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은 파시즘적 태도를 갖고 있다. 또한 피해의식이 심한 사회는 파시즘적 사태의 문턱에 와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에 드러나 있는 사회적 갈등들을 생각해보라. 빈부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등등 이는 모두 파시즘적 갈등이며 이런 갈등의 근본에는 모두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빈부 갈등은 왜 생기는가? 가난한 이들의 피해의식(“돈 많은 인간들은 다 도둑놈들이야!”)과 부유한 이들의 피해의식(“돈 없는 인간들은 남의 돈을 거저 먹으려고 해!”)의 충돌 때문이다. 세대 갈등은 왜 생기는가? 신세대의 피해의식(“우리만 억울하게 취업이 안 되는 세대야!”)과 구세대의 피해의식(“우리만 억울하게 배고픈 시절을 보냈어!”)의 충돌 때문이다. 젠더 갈등은 왜 생기는가? 여성의 피해의식(“남자들 때문에 우리만 억울하게 피해보고 있어”)과 남성의 피해의식(“여자들 때문에 억울하게 우리만 피해보고 있어!)의 충돌 때문이다.  

    

 이런 (피해의식과 피해의식의) 충돌이 무비판‧비합리(광신적)‧폭력적 ‘묶음’으로 세력화되어 발생할 때 파시즘적 사태로 비화된다. 물론 우리의 사회적 갈등이 역사상 최악의 파시즘(나치즘)만큼 참혹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는 단지 우리 사회의 피해의식의 강도가 그들(나치)의 강도보다 높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피해의식의 강도가 어느 임계치를 넘어가게 되면 우리 사회 역시 거대한 ‘아우슈비츠’가 될 가능성을 될 수도 있다는 섬뜩한 전망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피해의식을 성찰하고 극복하려고 애써야 하는 이유다.


     

파시즘적 갈등 너머 사회적 논의로

     

 파시즘 혹은 파시즘적 사태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피해의식을 성찰하고 극복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만큼 한 사람이 가진 다양한 모습들을 더 많이 조망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파시즘으로부터 더 멀어질 수 있다. 생각해보라. 피해의식을 성찰하고 극복한 독일인이 어떻게 유대인을 학살할 수 있겠는가? 슈베르트를 들으며 두 아이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제빵사를 어떻게 아우슈비츠의 독가스실로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피해의식을 성찰하고 극복한 이들은 파시즘적 사태(사회적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다. 돈‧학벌‧젠더에 관한 피해의식을 극복한 이들에게 파시즘적 갈등은 없다. 그들은 가난-부유, 명문대-비명문대,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한 사람을 파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부유한 사람(명문대 출신‧남성) 혹은 단지 가난한 사람(비명문대 출신‧여성)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삶에 대해 고민하고, 반려견을 사랑하고,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볼 수 있을 때 파시즘적 갈등은 없다. 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가진 다양한 면들을 모두 볼 수 있는 이들이 모인 사회는 파시즘적 갈등을 넘어설 수 있다.

      

 물론 피해의식을 성찰하고 극복한다고 해서, 즉 한 사람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사회적 갈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갈등이 사라지는 것이 좋은 일도 아니다. 건강한 사회적 논의는 언제나 필요하다. 이 건강한 논의는 파시즘적 갈등을 넘어야 가능하다.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상대를 (무비판적‧비합리적‧폭력적인 ‘묶음’을 구성할) 동지로도 볼 수 없고, 동시에 상대를 (어떤 경우에도 박멸해야 할) 적으로 볼 수도 없다. 바로 이 상태, 적과 동지의 구분을 넘을 때만 우리는 건강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 피해의식의 성철과 극복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 우회할 수 없는 과제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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