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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과 선물

10년 전 회사를 떠났다. 회사를 떠나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중 하나는 이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홀로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은 10년 동안 하나의 강박처럼 내 마음에 남았다. 회사를 떠나 철학을 공부하고 글을 쓰는 삶을 이어가며 나에게 이런 저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이들이 있었다. 하나 같이 그들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것은 홀로 서는 일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0년 즈음 지나니 알겠다. 그것은 나를 옳아매는 강박이었다는 사실을.      


 ‘도움’은 의존이고, ‘선물’은 기쁨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때는 의존의 마음이 들지만,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을 때 기쁨의 마음이 든다. 긴 시간 ‘도움’과 ‘선물’을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다. ‘도움’은 받지 않지만 ‘선물’은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 역시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철학을 부여잡은 10년이 남긴 선물. 


 '도움'은 의존이기에 슬픔이다. 그래서 '도움'은 받을 수록 '나'와 '너'와 '우리'는 모두 슬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물’은 기쁨이고, 기쁨은 반드시 ‘나’의 기쁨 너머 ‘너’의 기쁨으로 그리고 끝내는 ‘우리’의 ‘기쁨’으로 퍼져간다. 이 삶의 진실을 구분하지 못해 얼마나 많은 '선물'들을 '도움'이라 착각해서 흘려 버렸던가? '도움'을 '선물'이라 착각하는 이는 나약한 이고, '선물'을 '도움'이라 착가하는 이는 경직된 이다. 둘 모두 타자를 읽지 못하는 미숙한 인간은 것은 매 한가지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앞으로도 그 어떤 이들의 ‘도움’도 받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의 ‘선물’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 안고 싶다. 나약함 너머 경직성 마저 넘어서고 싶다. 경직되지 않는 이들만 '너'를 웃게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에게 선물을 준 ‘너’에게 기쁨을 주고 싶다. 그렇게 기쁜 ‘나’와 ‘너’가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테다. 


 '선물'을 받는데 10년이 걸렸구나. 큰 '선물'을 받았다. 큰 기쁨을 누렸다. 그 기쁨을 잊지 않고 '너'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 마저 기쁘게 해주고 싶다. '나'의 마음 너머 '너'의 마음을 읽는데 10년이 걸렸구나. 큰 선물의 고마움은 쉬이 휘발되지 않게 마음에 담는다. 그저 마음 속으로 되뇔 뿐이다. "선물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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