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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 고통을 과장하고 싶은 욕망 II

피해의식은 어떻게 과공감‧과몰입이 되는가?

피해의식은 어떻게 과공감‧과몰입이 되는가?   
  

 피해의식은 어떻게 과공감과 과몰입을 유발하는 걸까?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의 특징이 있다. 고통을 과장하고 확대하고 싶은 욕망이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자신이 받은 고통을 과장하고 확대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바로 이 욕망이 바로 과공감과 과몰입을 유발하게 된다. 피해의식은 자신의 고통을 과장‧확대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바로 이것이 과공감과 과몰입을 유발하게 된다. 여기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피해의식→고통의 과장‧확대→과공감‧과공감→피해의식→…


 이 반복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과장‧확대하고 싶은 욕망과 과공감‧과몰입의 상태는 확대 재생산된다. 노골적으로 말해, 자신은 군대에서 고참의 가래침을 먹기를 강요당하거나, 공공장소에서 자위행위를 강요당한 적이 없음에도, 마치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고 확대하는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동시에 과도한 공감과 몰입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다시 피해의식은 강화된다.       



과공감과 과몰입은 한 개인은 불행하게 만든다.      


 피해의식은 ‘사실의 기억’이 아니라 ‘상상의 기억’ 때문에 발생한다. 자신이 상상한 일들이 기억화될 때 피해의식은 강화된다. 이 ‘상상의 기억’이 유발되는 메커니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고통을 과장‧확대하고 싶은 욕망은 과공감‧과몰입을 촉발하고, 그것은 다시 자신의 고통을 과장‧확대하게 된다. 그 악순환의 과정 속에서 겪지도 않은 상처가 마치 내가 겪은 것처럼 믿게 되는 ‘상상의 기억’이 된다. 이제 피해의식으로부터 유발된 과공감‧과몰입이 어떻게 한 개인을 불행하게 하는지 알 수 있다.      


 행복과 불행은 상처 받은 기억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즉, 상처 받은 기억을 잘 치유하는 것이 행복이고, 그렇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다. 그러니 피해의식의 과공감과 과몰입은 필연적으로 불행해지는 길이다. 과공감과 과몰입은 있는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없는 상처도 과장하고 확대하게 되는 일 아닌가. 그러니 피해의식으로 인해 과공감과 과몰입에 자주 빠지는 이들이 더 불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피해의식은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둔감하게 한다.

  

 피해의식은 한 개인만을 불행하게 하는가? 아니다. 이는 사회적 불행마저 야기한다.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의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심하거나 그것을 함부로 대한다는 것이다.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 있는 이들은 쉽게 말한다. “돈 없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일해서 돈 벌면 되지” 반대로 돈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못생긴 게 뭐 대수라고 돈만 많은 성형 수술하면 되지” 이처럼,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 대해 둔감하고 무심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턱 없이 부족한 공감능력(둔감‧무심)은 그들의 과도한 공감 때문에 발생했다. 다시 군대에 관한 피해의식의 이야기를 해보자. 그런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은 보편적 고통에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을까 즉, 군대에 대한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이  장애인들이 겪는 상처와 고통, 여성들이 겪는 상처와 고통, 노동자들이 겪는 상처와 고통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장애인, 여자, 노동자들의 상처와 고통에 둔감하거나 무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바로 그들이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오직 군대 문제에만 과공감하고 과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보편적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기 어렵다.


      

과공감과 과몰입은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


피해의식은 없는 고통을 만들거나 있는 고통을 과장하게 만든다. 그렇게 과공감과 과몰입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촉발된 과공감과 과몰입은 자신의 피해의식이 향하는 특정한 영역에만 집중될 수밖에 없다. 과공감과 과몰입이 건강한 연대의식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논리는 얼마나 순진한 이야기인가. 상황은 정반대다. 우리 시대에 건강한 공동체 의식이나 연대의식은커녕 아귀다툼 같은 갈등과 마찰이 끊이지 않는 것은 바로 피해의식으로부터 유발된 과공감과 과몰입 때문이다.     

 

 일부 군필자들은 왜 여성운동을 하는 이들을 갈등하고 다투는가? 일부 여성운동을 하는 이들은 왜 성수자들과 함께 연대하지 않는가? 노동자들은 왜 장애인들의 곁에서 함께 연대하지 않는가? 그럴듯한 명분으로 정당화할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이유는 그네들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과장하고 확대하고 싶은 욕망, 그로인한 과공감과 과몰입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건강한 공동체의식 혹은 연대의식은 점점 증발되고, 아귀다툼 같은 갈등과 마찰이 더욱 심해질 뿐이다.     


 한 개인이 불행에도, 한 사회의 불행에도, 그 근본에는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피해의식에 대해 깊이 고찰해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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