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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 '정통' 너머 나의 길

“지랄한다. 지랄해. 계속 지랄해라. 나중에 원투하는 날이 올끼다.” 

    

 어렸을 때부터 삐딱했다. “그건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그 말이 싫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반대로 했다. “원래 학생은 공부해야 하는 거야!” 그때부터 공부를 접었다. 그 반골 기질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체육관에서도 그랬다. 격투기로 일본에서 이름을 날렸다는 관장은 늘 말했다. “원래 원투부터 하는 거야!” 그 말은 들은 후부터 원투를 안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내 마음대로 했다.      


 혼자 체육관에서 이리저리 팔다리를 휘두르며 이상한 동작만 하고 있던 어느날, 관장은 내게 웃으며 말했다. “지랄한다. 지랄해. 계속 지랄해라. 나중에 원투하는 날이 올끼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관장은 작은 꾸중을 할뿐 크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관장의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돌아보니, 지금 내 나이가 그때 관장의 나이와 비슷해졌기 때문일까? 이제 그때 그 관장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겠다. 

 

 세상에는 정통正統과 이단異端이 있다. 전통적으로 올바른 길을 정통이라고 하고, 그 정통에서 벗어난 변칙적인 길을 이단이라고 한다. 사십 대 중반에 들어서서 내 삶을 돌아보니 지극히 ‘이단’의 삶이었다. 나는 항상 “원래 그런 거야”라는 길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 이단의 길을 돌고 돌아 철학의 길로 들어섰다. 자본주의적 길이 ‘정통’이라고 믿는 시대에서 철학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보다 더 큰 '이단'도 없다.      



 나의 ‘이단’적 기질은 철학의 길로 들어서서도 멈춘 적이 없다. “원래 철학은 이렇게 공부하는 거야!” 이런 정통 철학자들의 모든 가르침을 거부했다. “고대(플라톤) 철학부터 시작해야 한다.” “철학사를 공부해야 한다.” “이름 있는 철학자(칸트‧헤겔 등등)들을 먼저 해야 한다.” 이런 정통 철학의 가르침을 모두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공부했다. 이단의 삶을 걸어 온지 40년이 훌쩍 넘었고, 그렇게 철학을 공부한지 10년이 넘었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누구보다 ‘이단’으로 살아왔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통’의 길 위에 서 있다. 철저하게 '정통'을 거부하며 기를 쓰며 '이단'의 길을 내달려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통'의 길 위에 서 있다. 내 마음대로 시작한 철학 공부였다. 그렇게 철학을 공부하다보니 나는 고대 철학 위에 있었고, 철학사 위에 있었고, 이름 있는 철학자들을 옆에 있었다.

      

 철학만 그런가? 내 삶도 그렇게 되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술은 점점 마시지 않게 되었고, 삶은 점점 더 단순해졌고, 반복과 기본기의 힘을 알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졌고,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은 줄이게 되었다. 젠장. 이것은 내가 그리도 싫어했던 ‘정통’의 표본 아닌가? 마흔을 넘겨 혼자 웃음이 날 때가 있다. “삶의 진실은 이토록 단순한 것이구나!” 느낄 때 그렇다. 

      

 정통과 이단은 하나다. 정통의 길 끝에는 이단이 있고, 이단의 길 끝에는 정통이 있다. 이것을 분리하려는 마음은 철없는 호승심일 뿐이다. 내 삶은 '지랄'하는 삶이었다. 정말 열심히 '지랄'하며 살았다. 최선을 다해 '지랄'한 내 삶이 좋다. 그 '지랄' 덕분에 '지랄' 끝에 '원투'가 있음을 온 몸으로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지랄'하며 지냈던 한 해를 마무리 하며 체육관에서 ‘원투’를 반복했다. 어린 시절 관장의 말이 들렸다. “지랄한다. 지랄해. 계속 지랄해라. 나중에 원투하는 날이 올끼다.” 

     

 이제 ‘이단’에도 ‘정통’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단’과 ‘정통’ 너머 진정한 나의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다시, 나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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