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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 이중의 뒤틀림

피해의식은 자신을 부정하게 만든다.

“쟤는 세상에 자기 혼자 잘났나봐”     


 신입사원이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발표했다. ‘민재’는 그 모습을 보고 혼잣말을 했다. 민재는 왜 그랬을까? 피해의식 때문이다. 민재는 소심함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민재는 어린 시절 내성적인 성격 탓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들이 민재의 피해의식이 되었다. 이 피해의식은 ‘민재’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떤 악영향일까? 자신의 피해의식을 폭로하는 사람에 대한 분노일까? 혹은 언제 어디서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사람에 대한 반감일까? 그 모든 것이 피해의식이 민재에게 미칠 악영향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악영향이 있다. 피해의식은 이중으로 뒤틀어진 마음이다. 피해의식은 부정적인 자아를 긍정하게 만든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피해의식의 논리를 되짚어보자. 특정한(소심함‧가난‧뚱뚱함…) 피해의식이 있다는 말은 그 특정한(소심한‧가난한‧뚱뚱한…) 자아를 부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민재는 소심함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이는 소심한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다른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가난‧명예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은 가난한 혹은 유명하지 않은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피해의식, 이중의 뒤틀림

 

 이처럼, 피해의식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게 만든다. ‘부정적 자아’(‘나’를 싫어하게 되는 것) 이것이 첫 번째 뒤틀림이다. 피해의식의 뒤틀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 번 더 뒤틀어진다. 피해의식은 싫은 ‘나’의 모습을 긍정하게 만든다. ‘부정적 자아의 긍정’(싫은 ‘나’를 긍정하는 것) 이것이 두 번째 뒤틀림이다. 이것이 난해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의 피해의식이 내밀한 곳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소심한 자신을 온전히 부정하고 있을까?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민재는 자신의 소심함을 극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을 테다. 자신의 어떤 모습을 정말로 싫어할 때 우리는 그 모습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게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민재’는 자신의 소심함을 극복하려 애쓰지 않는다. 왜 그럴까? 피해의식은 부정적 자아(소심함)를 무의식적으로 긍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민재는 자신이 싫어하는 모습(소심함)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긍정하고 있다. 

     

 이 인지할 수 없는 무의식은 어디서 드러날까? 부정적 자아(소심함)의 반대편에 있는 모습(당당함)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난다. ‘민재’는 왜 당당한 신입사원에게 반감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부정적 자아(소심함)의 반대편에 있는 당당함 때문이다. 쉽게 말해, 민재는 신입사원이 당당하기 때문에 싫은 것이다. 민재가 당당함을 부정하는 마음은, 소심함을 긍정하는 마음과 동시적이다. 민재가 갖고 있는 당당함(소망하는 자아)에 대한 거부감은, 소심함(부정적 자아)에 대한 무의식적 긍정인 셈이다. 

     

 이렇게 피해의식은 ‘소망하는 자아’(당당한 ‘나’)를 부정하게 만들고, ‘부정적 자아’(소심한 ‘나’)를 긍정하게 만든다. 다른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이는 가난한 자신(부정적 자아)을 부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부富(소망하는 자아)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게 만든다.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 마찬가지 아닌가? 이 피해의식은 못생긴 자신(부정적 자아)의 모습을 부정하게 되는 동시에 아름다움(소망하는 자아)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게 한다. 이처럼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이든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이중으로 뒤틀어지게 만든다. 피해의식의 이런 특성은 심각한 문제를 유발한다. 


     

피해의식은 원치 않는 삶으로 빠져는 늪이다.

    

 피해의식은 늪이다. 원치 않는 삶으로 조금씩 빠져드는 늪. 즉, 피해의식은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원하지 않는 삶으로 말려들어가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소망하는 자아’와 ‘부정적 자아’가 있다. 뚱뚱한 자신을 싫어하는 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에게 ‘뚱뚱한 나’는 부정적 자아이고. ‘날씬한 나’는 소망하는 자아이다. 이때 피해의식은 ‘소망하는 자아’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부정적 자아’로 가까워지게 만든다.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은 소망하는 삶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해의식의 세기는 그 소망의 세기와 같다. 소심함(가난‧뚱뚱함)에 대한 피해의식의 세기는 당당함(부유함‧날씬함)에 대한 소망의 세기와 같다. 저마다의 피해의식이 강렬할수록 그 소망 역시 강렬하다. 바로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피해의식은 이중의 뒤틀림을 발생시킨다. ‘부정적 자아’(소심함‧가난‧뚱뚱함)을 긍정하게 만들고, ‘소망하는 자아’(당당함‧부‧아름다움)을 부정하게 만든다.   

   

 피해의식의 치명적 해악은 바로 여기서 발생된다. 우리는 누구나 기쁜 삶을 원한다. 기쁜 삶은 무엇일까? ‘부정적 자아’로부터 벗어나고, ‘소망하는 자아’로 다가서는 삶이다. 하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결코 이런 기쁜 삶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들은 슬픔의 늪으로 점차 빠져들게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부정하고 있는 삶으로 다가서게 되고, 자신이 소망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의 기묘함, ‘소망의 부정’, ‘부정의 소망’

 소심함이라는 피해의식은, 당당한 이들을 싫어하게 만든다. “당당한 척 하는 애들은 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애들이지.” 이런 마음은 자신이 ‘소망하는 자아’(당당함)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에 ‘부정적 자아’(소심함)에 더욱 다가서게 만들 수밖에 없다. 자신이 비난했던 삶으로 적극적으로 다가서려는 이들은 없으니까 말이다. 

     

 뚱뚱함‧가난‧명예라는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날씬한 것은 머리에 든 게 없는 애들이야.” “돈 많은 것들은 다 도둑놈들이야.” “유명한 애들은 다 관종들이 아니야.” 이런 피해의식을 가진 이들은 필연적으로 슬픔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 그들이 소망했던 삶은 날씬하고, 부유하고, 명예 있는 삶 아닌가. 하지만 피해의식은 자신들이 원했던 삶(날씬함‧부유함‧명예)을 부정하게 만듦으로써 그 삶으로부터 점차 멀어질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에 빠진 이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이 원하는 삶(당당함‧날씬함‧부유함‧명예)을 바라는 만큼, 그것을 부정하게 되고, 그로인해서 그 원하는 삶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뿐인가?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기묘한 정신적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소망하는 자아’(당당함‧날씬함‧부유함‧명예)을 부정하고, ‘부정적 자아’(소심함‧뚱뚱함‧가난함‧무명)를 소망하게 되는 그 기묘한 분열 상태가 이어질 때, 어찌 삶이 피폐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피해의식이 만들어내는 그 기묘한 이중의 뒤틀림은 삶 자체를 뒤틀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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