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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은 ‘운명’이 아니라 ‘실존’이다.

후회와 정신승리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소중한 것의 소중함을 알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히 소중한 것들을 놓치며 살수밖에 없는 걸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피해의식의 밀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피해의식이 옅은 이들이 있고, 피해의식이 짙은 이들이 있다. 이 밀도의 차이에 따라 소중함을 파악하는 태도 역시 달라진다. ‘민찬’과 ‘도성’은 모두 피해의식이 있다. 그래서 둘 모두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몰라 소중한 것들을 소중히 대하지 못한다. 그렇게 둘 모두 소중한 것들을 속절없이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민찬’은 소중한 인연들을 놓쳤을 때, 때늦은 후회를 한다. “그때 걔가 진짜 좋은 사람이었는데.” 하지만 ‘도성’은 다르다. ‘도성’는 소중한 인연을 놓쳤을 때 후회가 아니라 정신승리를 한다. “결국 걔도 별 볼일 없는 애였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을까? 바로 피해의식의 밀도 차이 때문이다. 옅은 피해의식을 가진 이들은 ‘후회’를 하고, 짙은 피해의식을 가진 이들은 ‘정신승리’를 한다. 후회와 정신승리는 모두 피해의식 때문에 발생한 마음이지만, 이 두 마음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민찬’은 옅은 피해의식으로 ‘후회’하고 있다.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에 연인, 친구 등등 소중한 인연들을 허망하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던 일들에 대해 가슴 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민찬’은 그 후회로 자신의 피해의식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음에 만나게 될 소중한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아채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고통스러운 후회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피해의식의 옅으면 후회라는 마음을 매개로 그 피해의식이 더 옅어지는 선순환으로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도성’은 다르다. ‘도성’은 짙은 피해의식으로 ‘정신승리’를 하고 있다. ‘도성’ 역시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에 소중한 인연들을 떠나보냈지만 그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을 떠난 이들은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정신승리를 한다. 그런 정신승리는 ‘도성’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정신승리는 자기연민을 강화한다. '도성'는 왜 혼자 남겨졌다고 믿는가?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타인의 잘못으로 혼자 남겨졌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은 스스로를 더욱 불쌍한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게 만든다.       


 “결국 세상에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그렇게 강화된 자기연민은 다시 피해의식을 더욱 짙어지게 된다. ‘도성’은 소중한 이들이 떠날 때마다 정신승리를 반복할 뿐,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결코 볼 수 없다. 이처럼 피해의식이 짙으면 그 피해의식은 더 짙어지는 악순환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렇게 ‘도성’은 결국 끝없는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정신승리와 후회 너머 섬세함으로     


 자신의 피해의식과 피해의식의 밀도를 진단해보라.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알아보지 못해 소중한 인연을 떠나보냈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어떤 종류이건 간에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다는 방증이다. 소중한 인연이 떠났을 때 후회하고 있는가? 혹은 정신승리하고 있는가? 전자라면 옅은 피해의식이 있는 셈이고, 후자라면 짙은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퇴행적인 결정론을 읽을 필요는 없다. 

   

 달리 말해, 소중한 것의 소중함을 보지 알아보지 못해 소중한 인연을 떠나보냈다고 피해의식이 영원히 결정되었다고 볼 필요 없다. 또 소중한 것들을 떠나보내고 후회 혹은 정신승리하고 있다고 해서, 옅은 피해의식 혹은 짙은 피해의식으로 영원히 결정되었다고 볼 생각할 필요도 없다. 삶의 진실은 언제나 원인과 결과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진단이 곧 해법일 수 있다. 

    

 후회와 정신승리는 모두 피해의식이 남긴 슬픔이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위상을 가진 슬픔은 아니다. 정신승리보다 후회가 백번 낫다. 정신승리는 ‘기쁜 슬픔’이라면, 후회는 ‘슬픈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신승리를 할 때 후회하지 않을 수 있기에 잠시 기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이내 더 깊은 슬픔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정신승리의 기쁨은 삶의 변화 가능성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회는 다르다. 후회는 잠시의 슬픔을 주지만 곧 기쁨으로 전환된다. 후회는 슬픔이지만 동시에 슬픔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후회라는 아픔(슬픔)에 직면할 때 삶의 변화 가능성(기쁨)에 가닿을 수 있다. 우리가 어떤 행동에 대해 철저하게 후회한다면, 우리는 다시는 그 후회할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 대안이 마련된다.     


 

피해의식은 ‘운명’이 아니라 ‘실존’이다.

    

 옅은 피해의식이면 후회를 하고, 짙은 피해의식이면 정신승리를 한다. 이는 뒤집어 말해, 우리가 정신승리를 할 때 피해의식은 강화되고, 후회를 할 때 피해의식은 약화되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피해의식을 점점 옅어지게 하고 싶은가? 아프게 후회하면 된다. 정신승리의 쾌감을 놓고, 고통스러운 후회를 감내 할 때 우리의 피해의식은 그만큼 옅어질 가능성을 품는 셈이다. 충분히 후회했는가? 그렇다면 이제 피해의식을 넘어갈 준비가 되었다.    

  

 정신승리와 후회 너머에 섬세함이 있다. 어떻게 피해의식을 넘어갈 수 있을까? 섬세해지면 된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만나면 된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받을 때 분에 넘친 것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줄 때 턱 없이 부족한 것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조심스레 살피면 된다. 그때 알게 된다. 내게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소중한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을 때, 피해의식은 저만치 멀어져 있을 테다.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될 때 ‘나’의 상처 너머 소중한 ‘너’의 상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오직 ‘나’의 상처만을 보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환영이다. ‘나’의 상처 너머 ‘너’의 상처를 볼 수 있는 이들에게 피해의식은 없다.


 피해의식은 이미 결정된 ‘운명’이 아니다. 피해의식 자체도, 피해의식의 밀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매순간 어떤 결단을 하느냐에 피해의식 자체를 넘어설 수도 있고, 피해의식의 밀도 역시 옅어질 수도 짙어질 수도 있다. 피해의식은 ‘운명’이 아니라 ‘실존existence’이다. 피해의식은 자신의 결단에 따라 자신 ‘밖으로ex-’ 끊임없이 벗어날 수 있는 ‘존재istence’일 뿐이다. 피해의식은, 삶의 매순간마다 내리는 결단에 따라 얼든지 그 피해의식 밖으로 나설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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