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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연민과 피해의식 I

자기연민의 논리

자신을 가장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기연민

“민희야, 회사 일 때문에 힘든 거 아는데, 우리 만날 때마다 회사 불평불만 듣고 있으면 나도 힘들 때가 있어.”
“미안해, 이제 회사 이야기 안하고 참아볼게.”     


 ‘민희’와 ‘재훈’은 3년 째 연애 중이다. ‘재훈’은 늘 ‘민희’의 회사, 가족, 친구들에 대한 불평, 불만, 짜증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런 ‘재훈’은 며칠 전 건강검진에서 작은 혹이 발견되어 수술을 했다. 큰 수술은 아니었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 놀라기도 했고 이러저런 고민의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 지쳐있었다. 그런 ‘재훈’에게 ‘민희’는 다시 회사의 불평불만과 짜증을 쏟아내었다.    

  

 지친 ‘재훈’은 ‘민희’에게 ‘그런 이야기 계속 듣고 있으면 나도 힘들 때가 있다’고 정직하게 말했다. 그 말에 ‘민희’는 “미안해, 이제 회사 이야기안하고 참아볼게”라며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민희’는 왜 울음을 터뜨렸을까? 수술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연인에게 불평‧불만‧짜증을 쏟아낸 것이 미안해서 일까? 그렇지 않다. 남자친구한테마저 자신의 힘듦과 고통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된 자신의 모습이 한 없이 불쌍해서였다. 그렇다. ‘민희’는 지독한 만성적 자기연민에 빠져 있다. 


     


자기연민의 논리

     

 자기연민이 무엇인가? 세상에서 유독 자신만 상처받고 있다고 여기기에, 세상에서 자신을 제일 불쌍하게 여기게 되는 마음이다. 이런 자기연민은 어디서 오는 걸까? 먼저 자기연민의 논리를 살펴보자. 자기연민은 역설적이다. 자기연민은 자기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자기연민은 ‘자기’로부터 온 것일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자기연민은 ‘타인’으로부터 온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인보다 자신의 고통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인간은 누구나 남 등에 꽂힌 칼보다 내 손에 꽂힌 가시가 더 아픈 법이다. 그렇다면 자기연민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불가피한 마음일까? 그렇지 않다. ‘타인’의 고통보다 ‘자신’의 고통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보편적 고통의 감수성이 반드시 자기연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기연민은 어떻게 발생하게 될까? 

    

 자기연민은 일종의 집단적 최면이다. 자기연민이 최초로 생기는 시점으로 돌아 가보자. 최초의 자기연민은 과도한 관심 혹은 과도한 무관심으로부터 발생한다. 걷다가 넘어진 아이가 울고 있다고 해보자. 이때 타인들이 과도한 관심을 보이거나 혹은 과도한 무관심을 보인다면 아이는 자기연민을 빠지게 된다. 과도한 관심이 자기연민이 되는 경우부터 말해보자. 과도한 관심은 무엇일까? “어쩌지? 많이 아프니? 병원 가봐야 하나? 흉 지지는 않겠지?” 이처럼, 아이의 주변 사람들이 다들 호들갑을 떠는 상황이 바로 과도한 관심이다.


      

자기연민은 타인들이 만들어낸 집단적 최면이다.

      

 이 과도한 관심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이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고통이 자신이 감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라고 인지하게 된다. 즉 과도한 관심은 자신이 느낀 고통이 가장 큰 아픔이라고 여기게 만든다. 이는 자기연민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크다고 여기는 이는 반드시 자기연민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타인들의 과도한 관심이 자기연민을 촉발하는 과정이다. 부모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과보호를 받고 자란 아이가 쉽게 자기연민에 빠지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반대로 과도한 무관심 역시 자기연민을 촉발한다. 걷다가 넘어진 아이가 울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 그 누구도 그 아이에게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보자. 아이의 마음이 어떨까? 아이는 그 고통이 자신만의 고통이라고 여기게 된다. 과도한 무관심 속에서 자란 아이는 타인들의 고통을 볼 여력이 없다.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 믿는 아이가 어찌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없기에 오직 자신의 고통만을 보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자기연민을 촉발하게 된다. 주변 이들로부터 턱 없이 부족한 보호를 받고 자란 아이들이 쉽게 자기연민에 빠지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기연민은 과도한 관심 혹은 과도한 무관심을 보여주었던 타인들이 만들어낸 집단적 최면인 셈이다. 

     

 적절한 관심을 받고 자란 아이는 자기연민이 적거나 없다. “그건 울 일이 아니야. 씩씩하게 털고 일어나야지.” 넘어진 아이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던 부모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보자. 그 아이는 자신의 고통을 느끼지만, 그것에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통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 볼 여유가 생긴다. 그렇게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있게 된 이들은 결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자기연민은 세상에서 자신을 제일 불쌍하게 여기게 되는 마음 아닌가.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더 큰 고통 속에 있는 타인들을 볼 수 있는 이들에게 이런 마음이 생길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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