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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연민과 피해의식 II

피해의식은 자기연민을 강화한다. 

피해의식은 자기연민을 강화한다.


 이제 ‘민희’와 ‘재훈’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민희’의 자기연민은 어디서 왔을까? 과도한 관심(혹은 과도한 무관심)에서 왔다. 하지만 의아한 지점이 있다. ‘민희’가 받은 관심(혹은 무관심)의 정도는 흔하다. ‘재훈’ 역시 그 정도의 관심(혹은 무관심)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재훈’은 자기연민이 덜하고, ‘민희’는 자기연민이 과한 측면이 있다. 세상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부모에게 적절한 관심을 받고 자란 이들은 드물다. 많은 이들은 대체로 과도한 관심 혹은 과도한 무관심 속에서 지내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민희’처럼, 심한 자기연민에 빠져 살지는 않는다.     


 과도한 관심 혹은 무관심이라는 원인이 자기연민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유사한 정도의 관심(혹은 무관심) 속에서도 사람마다 자기연민의 정도는 차이가 난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피해의식이다. 피해의식은 자기연민을 강화한다. ‘민희’는 자기연민이 심하다. 왜 그럴까? 피해의식 때문이다. ‘민희’는 일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민희는 회사에서 자신만이 더 많이 일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로 인해 과도하게 자신을 방어하려는 마음이 있다. 이런 피해의식이 ‘민희’의 자기연민을 강화했다. 이것이 ‘재훈’ 역시 ‘민희’와 유사한 정도의 관심(혹은 무관심)을 받았지만 자기연민이 덜한 이유다. ‘재훈’은 ‘민희’보다 피해의식이 덜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피해의식도 마찬가지다. 돈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를 알고 있다. 그는 누군가가 보기에는 제법 부유한 편이다. 그런 그는 술을 마시면 종종 신세한탄을 하며 혼자 울곤 한다. (자신이 보기에) 돈이 없는 자신이 한 없이 불쌍하기 때문이다. 학벌과 젠더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학벌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자(혹은 남자)라는 이유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믿는 이들은 너무 흔하다.         



과도한 관심(혹은 무관심)→상처→피해의식→자기연민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은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자기연민을 촉발하는 것은 과도한 관심 혹은 과도한 무관심이고, 그것을 강화하는 것이 피해의식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근본적으로 자기연민은 피해의식으로부터 온다. 자기연민이 발생하는 우리의 마음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과도한 관심(혹은 무관심)→상처→피해의식→자기연민’ 즉, 과도한 관심(혹은 무관심)은 이미 피해의식을 촉발할 수 있는 상처다. 그러니 자기연민은 근본적으로 피해의식으로 오는 셈이다.


 여기서 의아함을 느낄 수 있다. 과도한 무관심이 상처 받은 기억이 되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과도한 관심이 어째서 상처 받은 기억이 되는 걸까? 어떤 아이도 늘 과도한 관심 속에서만 살아갈 순 없다. 과도한 관심 밖으로 나서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때 과도한 관심은 큰 상처가 된다. 과도한 관심 속에서 자란 아이가 그 관심 밖으로 나서야 되는 순간이 오면, 모든 일상이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작은 상처에도 주변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상황에서 자란 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 이가 일상적 상황(학교‧직장…)에 놓이게 되면 그 일상은 엄혹하고 냉정한 고통의 구렁텅이처럼 느껴질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바로 그 고통과 상처 때문에 피해의식이 촉발되고 강화될 수밖에 없다. 

      

 과도한 무관심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누구에게도 관심 받지 못한 기억은 그 자체로 이미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된다. 이렇게 과도한 관심도 과도한 무관심도 한 사람에게 상처로 기억되어 피해의식(과도한 자기방어)이 된다. 자기연민은 그 과도한 자기방어(피해의식)로부터 온다. ‘과도한 관심(혹은 무관심)→상처→피해의식→자기연민’ 이것이 자기연민의 발생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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