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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의 내적 전이 I

희생은 피해의식을 낳는다.

희생은 피해의식을 낳는다.

“왜 나 혼자만 애를 봐야 하는데.”     


 ‘희정’은 육아 문제로 남편과 자주 다툰다.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만 희생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희정’의 남편이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남편은 나름대로 육아에 신경을 쓰고 있다. 직장에서 일을 빨리 끝내려고 노력하고, 가급적 회식이나 모임은 참석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아이를 보느라 지쳤을 ‘희정’을 조금이라고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희정은 남편의 그런 마음을 보지 못한다. 자신이 엄마이기 때문에 혼자 희생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렇다. ‘희정’은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다. ‘부모’라는 피해의식.   

   

 부모라는 피해의식은 여느 피해의식과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 어떤 피해의식이든 그것은 희생과 관련되어 있다. 즉, 과도하게 희생하면(했다고 믿으면)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돈이 없다(계급이 낮다‧못생겼다‧학벌이 낮다)는 이유로 갖가지 희생을 했다면, 돈(군대‧외모‧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부모’라는 피해의식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것은 정말 고된 일이다. 자신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한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삶의 질서를 완전히 재배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당연했던 여유로운 아침, 차분한 저녁, 자유로운 주말 등은 언감생심이다. 그뿐인가? 아이의 양육을 위해 직장을 옮기거나 그만두거나 혹은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아이를 낳아서 키운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 요구되는 일이다. 


     

부모라는 피해의식

     

 피해의식이 희생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면, ‘부모’라는 피해의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만약 누군가 ‘그렇다’고 쉽게 답한다면, 그 사람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희생 때문에 발생한다. 이는 희생이 지나친 슬픔을 주기 때문이다. 즉, 피해의식은 어떤 삶의 조건 아래서 기쁨보다 슬픔이 클 때(크다고 믿을 때) 발생한다. 돈‧군대‧외모‧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라. 그 피해의식은 모두 특정한 삶의 조건 아래서 기쁨보다 슬픔이 컸기(컸다고 믿기) 때문에 발생한 마음이다.

      

 바로 여기에 부모라는 피해의식의 독특한 점이 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은 분명 큰 슬픔을 유발하는 희생이 따른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서 키워본 이들은 안다. 아이의 맑은 미소 한 번, 꺄르르 웃음 한 번, 고사리 같은 손이 움직이는 모습 한 번, 새근거리며 자는 모습 한번, 걸음마를 하는 모습 한 번으로 슬픔을 유발하는 큰 ‘희생’은 순식간에 엄청난 기쁨을 주는 ‘헌신’으로 전복된다는 사실을.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기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느 피해의식과 부모라는 피해의식이 다른 지점이다. ‘부모’라는 피해의식은 여느 피해의식보다 드물고, 설사 그 피해의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밀도가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슬픔을 압도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의문이 든다. ‘희정’은 부모라는 피해의식이 있고, 그것도 아주 고밀도의 피해의식이다. 이런 일은 왜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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