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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의 내적 전이 II

피해의식은 사랑을 막는다.

피해의식의 내적 전이

 피해의식의 특성이 있다. 피해의식은 쉽게 전이된다는 사실이다. 피해의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떤 이는 돈에 관한 피해의식이 있고, 어떤 이는 외모에 관한 피해의식이 있고, 또 학벌‧명예‧직장에 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저마다의 피해의식을 가진 이들은 그 피해의식만을 가지게 될까? 즉, 돈(외모‧학벌‧명예‧직장…)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은 그 피해의식만을 갖고 살아가게 될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의 피해의식은 쉽게 다른 종류의 피해의식으로 옮겨 간다.     

 

 ‘인선’은 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자신이 사회에서 받은 불이익은 모두 명문대학을 나오지 못해서라고 믿는다. 그녀의 피해의식은 학벌에만 머물까? 그렇지 않다. 그녀는 어느 사이엔가? 외모‧돈에 관한 피해의식에 휩싸였다. 그녀는 학벌뿐만 아니라 외모나 돈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과민하게 반응하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하나의 피해의식은 또 다른 종류의 피해의식으로 쉽게 전이된다.      



 피해의식 전이의 이유, 무의식과 상상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그것은 피해의식이 ‘무의식’적이며 ‘상상’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피해의식이 쉽게 전이되는 이유다.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피해의식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다. 이것이 합리‧이성적으로 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종류의 피해의식(학벌-돈‧외모)들이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쉽게 전이가 이루어지는 이유다.


 ‘인선’의 피해의식이 그렇다. 인선의 학벌에 관한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다. 그녀도 ‘의식’적으로는 안다. 그녀가 학벌 때문에 상처받은 적은 있어도, 외모나 돈 때문에 상처받은 기억은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는 ‘의식’적인 영역의 일일 뿐이다. ‘인선’은 피해의식(과도한 자기방어)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 ‘인선’에게 중요한 것은 학벌이 아니라 피해의식 그 자체다. ‘의식’적으로야 학벌이 문제인 것을 알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온통 자신을 방어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 ‘인선’은 어느 영역(돈‧외모‧직장‧결혼…)이든 과도한 자기방어를 하려는 마음이 쉽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피해의식은 ‘상상’적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상처 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하지만 이 기억은 ‘사실’의 기억이기보다 ‘상상’의 기억이다. 상상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돈)의 피해의식은 너무 쉽게 다른(외모‧학벌) 피해의식으로 전이될 수 있는 이유다.      


  ‘인선’의 피해의식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인선’의 피해의식은 ‘상상’적이다. ‘인선’은 학벌 때문에 상처 받은 ‘사실’이 있지만, 그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이 더해진 측면이 있다. ‘인선’의 피해의식의 밀도는 그 더해진 상상 만큼이다. 상상은 한계가 없다. 그러니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인선의 피해의식이 다른 피해의식으로 쉽게 전이된 이유다. 학벌 때문에 상처 받은 상상이, 돈‧외모 때문에 상처 받은 상상으로 쉽게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사랑을 막는다.


 이제 우리는 '희정'의 피해의식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부모라는 피해의식은 사실 좀처럼 생기기 어려운 마음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슬픔보다 기쁨이 더 큰 일인 까닭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느 관계에서라면 슬픔을 주어야 할 일(희생)이 오히려 큰 기쁨을 주는 일(헌신)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정'은 부모라는 피해의식이 있다.     

 

 ‘희정’의 피해의식은 왜 생겼을까? ‘희정’의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이다. 희정은 가난 때문에 받은 상처 때문에 자신을 과도하게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다. ‘희정’의 이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인 ‘상상’으로 점점 비대해졌다. 이것이 부모라는 피해의식이 생긴 이유였다. 가난이라는 피해의식이 비대해져 부모라는 피해의식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돈이 없어서 희생당했다는 그 ‘무의식’적이고 ‘상상’적 마음이, 아이의 맑은 미소와 웃음을 가려버렸던 셈이다.      


 ‘희정’만 그런가? “애새끼만 없었으면 이놈의 직장 벌써 때려 쳤을 텐데!” 밥벌이가 힘들어서 투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 역시 부모라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부모라는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미처 치유하지 못한 돈‧학벌‧외모‧장남‧명예 등등의 피해의식이 부모라는 피해의식으로 옮겨 붙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피해의식이 비대해지면 반드시 다른 피해의식으로 전이 된다. 주변을 돌아보라. 과도한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결코 하나의 피해의식만을 갖고 있지 않다. 여러 종류의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을 테다. 피해의식은 얼마나 유해한가? 그 유해함은 하나의 피해의식이 다른 피해의식으로 쉽게 전이되기 때문인가? 이는 분명 심각한 유해함이다. 피해의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 사람의 삶은 피폐해지게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유해함이 있다.      


 사랑의 상실이다. 인간은 사랑하고 또 사랑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러니 중첩된 피해의식은 삶의 조건을 파괴하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대해진 피해의식으로 중첩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사랑할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해, 자신에게 너무나 큰 기쁨을 줄 사람마저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희정’의 삶은 얼마나 불행한가? 자신의 피해의식에 빠져, 누구보다 자신에게 큰 기쁨을 줄 아이마저 사랑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아이조차 사랑할 수 없는 ‘희정’은 누구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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