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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인문학 강사 C의 실수

기세로 실력을 이길 수 없다.

차가운 복서와 스파링


훈련을 하면서 점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붙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기세가 반이다. 실력 차가 나도 기세로 몰아붙이면 해볼 만하다.” 스파링이 잡혔다. 상대가 나보다 실력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공이 울리고 글러브 터치를 하면서 야수모드로 돌입했다. 그리고 시작부터 강하게 압박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같이 기세를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겁을 먹은 것 같은 표정도 아니었다.


 상대는 마치 직장인이 출근해서 일하는 것 같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드를 바짝 올리고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내 공격을 받아준 건 리듬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는 걸. 2라운드가 되었다. 나의 공격 패턴이나 리듬을 파악한 상대는 얄미울 정도로 정확한 아웃복싱(뒤로 물러서며 공격하고 방어하는 복싱)구사 했다. 내 공격에 빈틈이 생길 때마다 여지없이 공격이 날아들었다. 안면, 몸통 할 것 없이 골고루 맞았다.


 여기서 밀리면 계속 얻어터질 것 같았다. 기세를 올려 더 무식하게 밀어붙였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내가 큰 펀치를 휘두르며 들어가는 찰나에 상대가 카운터펀치를 정확히 내 얼굴에 꽂았다. 순간 정신을 잃으며 다리가 풀렸다. 14온스에 헤드기어가 아니었다면 분명 주저앉았을 펀치였다. 그때부터 기세가 문제가 아니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냉정할 정도로 차가운 상대를 상대로 기세싸움은 통하지 않았다.



인문학 강사 C 사건

C라는 사람이 있다. 입시강사였다가 인문학 쪽으로 영역을 넓히며 대중들에게 알려진 유명강사다. 그는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하다. 사회, 철학, 역사, 경제 등 그가 쓴 책들의 분야를 보면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분야에 정통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그보다 더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강연 능력이다. C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은 이랬다. “강연이 명쾌하다” “잘 요약해준다” “강연이 재밌다” 한 마디로 강연을 잘한다는 것이었다. C가 강연을 잘하는 사람은 맞는 모양이다.


 그런 그가 사고를 쳤다. 내용인즉슨 모 케이블 TV에서 미술 관련 강의를 했는데, 미술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관계 조차 확인하지 않고 강연을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자신도 잘 모르는 분야에서 대해서 TV 강연한 셈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번 일이 사건으로 부각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중들은 C의 강연에 대해 칭찬 일색이었다는 점이다.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미술을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데 놀랐다’다는 식이었다.


 C 사건을 보면서 기세로 밀어붙이려하다가 얻어터진 스파링이 생각났다. 대중들은 C가 명쾌하고 잘 요약해주기에 그의 강연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그의 강연 스타일은 마치 교주처럼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니 믿어도 좋다’는 강한 자기 확신에 기반하고 있다. C가 가진 ‘명쾌함’이나 ‘탁월한 요약’은 강한 자기 확신을 활용한 부차적인 테크닉일 뿐이다.


 

기세로 실력을 이길 수 없다.


C는 기세로 강연을 이끄는 스타일이다. 자신의 강한 자기 확신(혹은 카리스마)을 활용해 청중을 압도해 강연에 몰입하게 한다. 강사에게 기세는 중요한 덕목이다. 우물쭈물하고 쭈뼛거리며 이야기하는 강사에게 눈길을 줄 청중을 별로 없으니까. 하지만 기세만으로는 안 된다. 기세만으로 압도해보려다가 출중한 기량에 냉정함까지 갖춘 진짜 복서들한테 걸리면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얻어터진다. 맞아봐서 안다.


 기세로 실력을 이길 수 없다. C가 명강사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건, 이전 강연에서는 기세와 실력이 어느 정도 겸비되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하지만 기세 그러니까 ‘나는 뭐든 잘 설명할 수 있어!’라는 강사로서의 강한 자기 확신에 빠져서 헛발질을 한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를 자신감 있게 설명하다가 진짜 배기들한테 걸려 망신을 당한 게다. 기본기나 실력이 없다면 기세는 오히려 위험하다. 내가 얻어터졌듯이 결국 역풍을 맞게 마련이다.


 복서로, 글쟁이로 살면서 하나 알게 된 게 있다. 그건 모든 분야에 기세는 중요하지만 기본기나 실력 없는 기세는 없느니만 못하다는 거다. 실력도 없는데 자신감 있게 달려들다가는 흠씬 얻어터지기 일쑤고, 한 분야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도 없이 글을 내깔기다가는 망신당하기 일쑤다. 나는 앎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복싱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당해인지 모른다. 기세만 앞서 달려들다 얻어터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앞으로 최소한 C가 했던 실수만큼은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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