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남도 여행을 떠났던 지인의 안부 끝에 남원의 단골 식당 소식을 들었다. 구례와 남원에 갈 적마다 들렀던 밥집이 올봄 문을 닫을 거라는 소식이었다. 지난겨울도 찾아갔다가 문 닫는 기간이라 해서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는데, 나물 손질도 고되고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장사가 힘들어 그만 두어야겠다던 주인아주머니의 수척한 모습이 떠올랐다.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가방을 꾸렸다. 나의 봄 여행은 그렇게 산수유와 산나물비빔밥 한 그릇을 위해 시작되었다.
차를 타고 가며 어느새 노란 산수유가 피었을까, 회색빛 풍경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겨울 숲을 막막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달리다가 불현듯 노란 빛을 본 듯하여 멈춰 보면 꿈결처럼 산수유 꽃봉오리가 피고 있었다. 겨우내 매서운 추위를 이겨낸 노란 꽃망울이 반짝반짝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밥그릇 안의 그득한 쌀밥처럼 노란 꽃망울이 봉긋이 맺혀 있는 모습은 끝나지 않을 듯 길고 지루했던 겨울만큼 경이로운 풍경이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끼고 노란 꽃물결이 굽이치는 구례 산수유는 3월 초부터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 일원에 화사하게 피어난다. 코로나 펜데믹 이전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산수유 마을인 구례군 산동면에 자생하는 수십만 그루의 산수유나무 꽃을 주인공으로 해마다 산수유축제가 성황리에 열렸다. 산수유의 꽃말인 ‘영원한 사랑’을 주제로 산수유 군락지와 연계된 산수유 사랑 공원이 조성되었다고 하니 봄나들이 떠난 가족이나 연인들에게 눈부신 봄날의 추억을 안겨줄 것이다.
산수유만 보고 가기 아쉬워 구례의 천년고찰 화엄사와 천은사, 연곡사 중에 천은사에 잠시 들렀다. 구렁이 전설이 깃든 감로천을 지나 무지개다리와 수홍루 그리고 일주문까지 아름다운 사찰 천은사에는 구구절절한 설화가 가득하다.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감로사라고도 불렀다는 천은사를 둘러보고 봄기운이 스며드는 절 풍경에 마음을 잠시 돌아볼 수 있었다.
굽이굽이 은은하게 초록 물이 올라오는 산길을 또 얼마나 달렸을까. 지리산 자락의 정령치 들머리에서 여행자를 반갑게 맞아주던 산나물밥 집은 안타깝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누군가에게 애틋한 추억이 되어줄 산나물밥을 위하여
지리산 자락의 산골에 있던 산나물식당은 20년간 나물 본연의 맛을 살려낸 산나물 백반으로 등산객과 여행객들에게 사랑받았던 곳이다. 지리산 자락에서 채취하는 산나물 덕분에 구석구석 산나물 식당이 여럿 있지만, 사랑이 한 가지인 것처럼 입맛도 익숙한 것을 그리워하는 법. 봄마다 잊지 않고 찾았던 산나물 식당의 그 밥상이 그리운 것이다.
부지깽이, 뽕잎, 쑥부쟁이, 머위, 참비름, 비비초, 미역초, 고사리 방풍나물 등 지리산 자락에서 채취해 말리는 10여 가지 산나물들이 지난하고 정성스런 손길을 거쳐 밥상에 올라오고 묵은 나물이 대부분이지만 섬세한 손질 덕에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향기로운 나물을 맛볼 수 있었다.
남원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아홉 살부터 동네 산을 타며 산나물을 뜯었다는 주인장은 나물 박사였는데, 이제는 나이들어 산나물 뜯으러 갈 기운도 없다며 아쉬워했다. 억센 줄기를 추려내고 나면 말린 나물의 반도 안 남는다고 푸념도 했지만, 산나물 밥상을 말끔히 비우고 가는 단골들을 보면 절로 기운이 난다고 흐뭇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봄날처럼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남원 시내에서 여행자들 사이에 소문이 나고 있는 산나물 밥상을 찾았다. 지리산 심원 계곡에서 장사하다가 입소문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지면서 시내로 나온 심원첫집 식당이다. 이집 역시 20여 종류의 산나물이 그득하게 올라온 밥상을 보면 나물 이름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민들레, 뽕잎, 다래순과 참나물, 엄나무 순, 명이 잎, 땅 두릅과 오가피순, 풍년초, 피마자 잎, 고사리, 곰취 등 지리산에 자생하는 약초를 직접 채취해 천연재료로 맛을 내니 약초밥상이라 불러도 손색없다.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에서 나물을 한 젓가락씩 맛보고 구수한 청국장에 밥 한술 뜨고 나면 마침내 대접에서 모든 나물이 만나야 할 차례다. 금방 짜온 들기름도 몇 방울 넣고 수저보다는 젓가락으로 포슬포슬하게 슬렁슬렁 비벼야 제맛이다. 밥알이 깨어지지 않고 나물이 물러지지 않게 은근하게 재료에 섞이도록 비벼 한 입 크게 떠서 입에 넣는다. 고추장 없이 나물 고유의 향과 양념만으로 먹는 게 지리산 산나물 비빔밥의 특별한 매력이다.
향긋한 들기름 향과 구수한 나물 향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순간, 기막히게도 지리산 봄날의 향기가 입안에 가득 찬다. 햇살 가득한 날, 평상에서 바삭하게 말려놓았던 묵은 나물에서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과 신선한 바람이 느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