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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차 Aug 19. 2020

poem,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형편없는 시를 읽는 것은 극도로 수명이 짧은 즐거움이니, 금세 물리고 만다. 그러면 굳이 읽으라는 법 있나? 누구나 스스로 형편없는 시를 지어보면 안 될까? 그렇게 해보라. 그러면 곧 알게 되리라. 최고로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보다 형편없는 시를 짓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中에서-


  당신만이 지니고 있는 그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하겠는가? 자신의 내면에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고 마는 소리를 어디에 담아두겠냐고 묻는 것이다. 사실 바쁜 일상에서 불현듯 찾아왔다가 예고 없이 가버리는 생각을 잡아놓는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하던 일을 멈추고 노트에 잽싸게 적어놓아야 하니 굳이 불필요한 수고를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그때 든 생각이 슬픔이나 연민, 분노, 증오, 수치심과 같은 고통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은 글쓰기 노동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인 것이다. 이는 나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신호이자 내 안에 미해결 된 감정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다는 증거니까. 그것들에 잉크를 먹여 글말로 노트에 풀어놓던지 리듬을 입혀 입말로 토해내던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괜히 애꿎은 타인에게 쏟아내고 후회하기 전에.   

 

  그런데 막상 노트를 펼치면 난감하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거미줄을 뽑아내듯이 쭉 뽑아 쓰려했건만. 생각의 실타래는 온대 간데없다. 쓰는 사람으로 살지 않은지 너무 오래된 것이다. 무엇이 우리 안에 있던 거미 본능을 되살릴 수 있을까. 일단 남이 지어놓은 글 집을 유심히 들여다봐야 한다. 이 집 저 집 구경하고서 마음이 끌리는 집에서는 오래 머물러 보자. 재료가 뭔지, 어떻게 쌓아 올렸는지, 마무리는 어떻게 지었는지 보고 또 보는 거다.     


  지금은 ‘숏폼 콘텐츠’(1~10분 이내의 짧은 영상으로, 언제 어디서나 모바일 기기를 이용해서 콘텐츠를 즐기는 대중들의 소비 형태를 반영한 트렌드) 시대다. 지난 10년 사이 사람의 평균 집중 시간이 8초로 짧아진 데서 기인한 것이다. 어쩌면 금붕어보다 못한 집중력을 지닌 지금이 그 집을 구경할 절호의 시간이지 않나 싶다. 숏폼(Short-form)의 전형, 바로 시집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과학기술과는 전혀 무관하고, 바이러스 시대에 면역력에도 쓸모없는 시가 대체 웬 말인가 할 것이다. 프랑스 시인 프랑시스 퐁쥬는 ‘세상은 시를 통해 말문이 막힌 인간 영혼을 침범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어쩔 수 없이 로봇과 바이러스와 함께 공생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이 시대는 말문뿐만 아니라 얼마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인가. 이때 시가 우리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 답답한 마음을 뚫고 말문을 열어 주리라.     


  미국의 최고 시인인 메리 올리버는 「휘파람 부는 바람」에서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은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이 능력이 발휘되어 나온 것이 시다. 인류애가 응축된 시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 준다. 어디 그뿐인가. 끊임없는 호기심이 깃들어 있는 시는 인간을 늙지 않게 해 준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에 따르면, 시들은 그 나라 국민의 영적 건강을 책임진다 했다. 그렇다면 시가 신체의 면역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가. 어쨌든 시는 분명 쓸모 있다.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다른 시인들의 말들을 더 들어보도록 하자. 류시화 시인은 「시로 납치하다」를 출간하기 전에 SNS에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아침마다 올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누가 읽기나 하겠나 하고 의문이 들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접속해서 시를 읽고 감상평을 달았다고 한다. 이를 보고 그가 느낀 것은 ‘시를 통해 인생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방식은 아직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시인 에머슨이 한 말을 빌려 이 상황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시를 읽어보지도 않고 스스로 시를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면 그 누구도 다 시인이다.’ 본능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좋은 시에 공명하고 자신의 영혼에 전해진 울림과 떨림을 손가락 끝으로 전달하고 싶다. 즉 자신도 그 순간 시인이 되는 것이다.




   ||  1단계검증된 시 뷔페에서 다양한 시를 맛보기  ||  


  이제 슬슬 시를 읽고 싶다는 발동이 걸렸는가. 우선 시의 세계로 들어온 걸 환영한다. 그런데 어떤 시부터 맛봐야 할지 막막하지 않은가. 잘못 먹고 탈 나서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을 수 있다.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서 먹는 요리는 적어도 평타는 친다. 같은 맥락으로 이미 검증된 시들을 모아놓은 시모음집은 대부분 잘 읽힌다. 단지 취향의 차이만 있을 뿐.      


  특히 에세이 형식의 시모음집은 차려놓은 요리도 풍성하거니와 시 뷔페 주인장의 맛깔스러운 해설이 더해져 풍미가 일품이다. 어떤 시는 매워서가 아니라 그때의 마음을 너무 잘 위로해줘서 눈물이 쏟아진다. 그러고 나면 매운 낙지찜을 먹은 것처럼 개운하고 힘이 난다. 그런 시들을 많이 담아놓은 시모음집이 내게는 만화가 박광수 씨가 펴낸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이다. 그가 바라던 대로 삶에 지치고 사람의 온기가 필요할 때 읽으면 참 좋은 시들이다. 시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그의 그림들은 사이드 디시로서 시의 품격을 더 높여 준다, 나는 울다가도 그의 사랑스러운 그림 앞에서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주객이 전도된 시모음집도 있다. 바로 내가 너무도 존경하는 장영희 교수님의 「생일」과 「축복」이다. 모 일간지에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칼럼을 모아 놓은 시 에세이집이다. 영미권 시인들의 시에 대해 거의 문외한일 때, 이 책 속 시들을 읽고 처음에는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나올법한 대사 같다고나 할까. 로미오가 창가에서 줄리엣에게 들려주는 세레나데 같기도 하고. 하여간 왼쪽에 배치된 영시와 오른쪽에 교수님이 번역해 놓은 시를 대조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솔직히 시보다 감상평과 같은 에세이 글이 더 좋았다. 그 시에 대한 장영희 교수님의 해설이 너무 궁금해서 뒷장을 넘겨 시보다 먼저 읽어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분의 포근한 음성을 듣고 나서 앞으로 돌아와 시를 마주하면 태평양 너머에서 온 그 시들이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더불어 김점선 화가의 동심이 살아있는 말과 새, 태양과 나비, 꽃과 집 등의 그림까지 보고 나면 금세 마음이 순해졌다. 그러면 에밀리 디킨스의 시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처럼 낭송하게 된다. ‘난 무명인입니다. 당신은요? 당신도 무명인이신가요? 그럼 우리 둘이 똑같네요!’라면서.      


  또 다른 영미시 에세이집으로 조이스 박의 「내가 사랑한 시옷들」도 시 못지않게 엮은이의 해설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시를 먼저 읽은 뒤 인문학적 깊이가 더해진 해설을 읽고 나면 한 번 더 시를 읽게 된다. 고은 시인의 <그 꽃>의 시 구절처럼 혹시나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을 보게 될까 봐서. 나는 이 책에서 <한 가지 기술>이라는 시에 꽂혔다. 재앙처럼 보일 수 있는 상실을 이렇게 담담하게 쓰려면 도대체 어떤 체험을 했던 걸까. 미국의 엘리자베스 비숍이라는 시인에 대해 궁금해졌다. 다행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엘리자베스 비숍의 연인>이라는 영화가 있어서 그녀의 사랑과 삶과 시에 대한 열정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본 뒤 시를 다시 읽으니 그제야 이해가 갔다.      


  위대한 시인은 한 편의 짧은 시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담을 수 있구나! 경외심이 들었다. 김사인 시인은 「시를 어루만지다」에서 시를 제대로 읽으려면 일단 시 앞에서 겸허하고 공경스러워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래야 마음의 문이 열리고, 한 편의 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목소리와 빛깔과 냄새들이 나에게 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시를 읽는 행위는 명상과 닮아있다. 나를 낮추고 내 안의 오만함과 분별심을 내려놓고 온전히 지금 이 순간 그 시와 한 몸이 되는 거다. 시가 내 가난한 영혼을 구원해 주리라 믿으며.  

   

  이제 어렴풋이 알겠다. 어쩌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인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 그래서 그에 대해 찾아보고 알아가는 것, 결국 한 사람을 더 깊이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인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속 시 구절처럼 ‘나 스스로 그 상처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 가면 후회할 ‘시 뷔페’를 소개해 볼까 한다. 정채찬 교수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와 류시화 시인의 「시로 납치하다」이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하나의 주제로 관통하는 시와 영화, 대중가요, 소설, 그림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융합하여 시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다채롭고 무엇보다 흥미진진하다. 그의 현대시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왜 매 수업마다 눈물이 고일 정도로 감동했는지, 왜 한 편의 공연 예술을 보는 듯 느꼈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최고급 시 뷔페!

                                                       

  책을 덮을 때쯤 나라면 어떤 시 수업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때쯤 아이유가 부른 김소월 시인의 <개여울>을 자주 듣고 있던 참이었다. “가도 아주 가지는 / 않노라시던 /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 날마다 개여울에 / 나와 앉아서 /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 가도 아주 가지는 / 않노라심은 /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한 사람이 개여울의 한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그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 쓸쓸함과 애절함과 서러움 등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표정으로. 그 상실감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마음 앞에서 얼마나 슬프냐고 감히 물을 수나 있겠는가. 


  줄리언 반스는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둘이었다 하나 된 사람에게 상실이란, 빼앗긴 건 하나지만 그 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긴 것을 의미한다. 수학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감정적으로는 말이 된다.”라고 말했다. 함께 나눈 시간들, 다양한 표정의 웃음들, 눈빛, 움직임, 침묵들 그리고 그 공간들이 통째로 사라지는 거다. 그곳에 있던 나 자신마저도.  

   

  복효근 시인의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라는 시가 떠올랐다. “숨 쉴 때마다 네 숨결이, / 걸을 때마다 네 그림자가 드리운다 / 너를 보내고 / 폐사지 이끼 낀 돌계단에 주저앉아 /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내가 / 운다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 소리 내어 운다 / 떨쳐낼 수 없는 무엇을 / 애써 삼키며 흐느낀다 / 아무래도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그렇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빈껍데기가 되어 버린 내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무엇을 억지로 삼킨다. 텅 비어버린 마음을 그렇게 무엇인가를 삼켜서라도 채우는 것이다. 다시 엘리자베스 비숍의 <한 가지 기술>이라는 시를 가져오련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고 그들과 함께 했던 도시도 대륙도 모두 잃은 상실의 대모 격인 그녀가 이렇게 다독인다.      


“잃어버리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 많은 것들이 잃어버리겠다는 의도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니 / 그것들을 잃는다 하여 재앙은 아니죠. // 매일 뭔가를 잃어버려 봐요. 열쇠를 잃어버리거나 / 시간을 허비해도 그 낭패감을 그냥 받아들여요. / 잃어버리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그토록 많은 상실을 경험했음에도 마지막 연에서 그녀는 지금의 연인마저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반어적으로 내비친다. “심지어는 당신을 잃는 것도(그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 내가 사랑하는 몸짓)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요. / 잃어버리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 / 재앙처럼 보일 수 있을지는 (써 두세요!) 몰라도요.”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버렸고 잃어버리는 기술을 터득했다고 해도 여전히 상실의 가능성 앞에서는 그저 쿨한 ‘척’하는 수밖에. 무슨 기술이 또 있단 말인가.     


  문득 이 시의 마지막 마침표에서 심수봉의 <비나리>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하늘이여, 저 사람 언제 또 갈라놓을 거요 / 하늘이여, 간절한 이 소망 또 외면할 거요 /...... / 생각하면 허무한 꿈일지도 몰라 꿈일지도 몰라 / 하늘이여, 이 사람 다시 또 눈물이면 안돼요 / 하늘이여, 저 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 줘요” 새로운 사랑 앞에서 설렘보다 상실의 두려움이 더 앞서는 그녀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는가. 이번만은 마지막이기를. 이번만은 절대 이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절절한 기도.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지 않았다. 차라리 적극적이었다.  신께 소원을 비는 방법을 택했으니까.     


  여기 상실 앞에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하는 여인과 떨쳐낼 수 없는 무엇을 애써 삼키며 흐느끼는 여인이 있다. 분명 마음속으로 ‘아무래도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라고 되뇌고 있을 것만 같다. 바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이다. 어쩔 수 없는 이별 이후 여성 화가로서 어렵게 자신의 꿈을 펼쳐가고 있는 마리안느는 한 공연장에서  엘로이즈를 발견한다. 그녀는 원치 않은 결혼의 세계를 택해 귀부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엘로이즈에게 클로즈업되고 연인과의 이별 후에 느꼈을 여러 가지 감정을 보여준다. 슬픔, 원망, 분노 그리고 체념과 같은. 마지막에 그녀는 살짝 웃는다. 기쁨의 미소다. 자신의 소원이 이뤄졌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늘이여, 저 사람 한 번만 보게 해 줘요. 하늘이여, 간절한 이 소망 또 외면할 거요.”라며 매일 밤 신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이 빠르고 격렬하게 흐른다. 아마도 그 격정적인 선율에는 가도 아주 가지는 않겠다는 뜨거운 약속과 재앙처럼 보일 수는 있으니 다 잃어버려도 나만은 굳이 잊지 말라는 절절한 부탁이 내포되어 있지 않았을까. 

     

  잃어버리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역설적으로 잃어버리지 않으면 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사실에 기대자. 상실의 슬픔을 뇌에서 자가 격리시키는 건 어떨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그 불씨가 삭아들도록 기다리자. 그래도 이따금 그 녀석이 울컥 올라오면 실컷 울어 버려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내 마음과 같은 노래를 틀어놓고. 청승맞다고? 우리끼리는 ‘애도 파티’라고 부르자. 좀 있어 보이게!


  이렇게 영화를 끝으로 상실을 주제로 한 나의 어설픈 시 수업의 시나리오는 끝이 난다. 시모음집을 읽는 매력이 바로 이거다. 좌판에 깔린 예쁜 수공예 귀걸이들 중에서도 유독 자기 눈에 띄는 것이 있지 않은가.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손짓하는. 그 작품을 만든 작가마저 마음에 들면 그가 만든 다른 작품들도 괜스레 구경하게 된다. 분위기가 비슷한 액세서리가 있으면 그 작가에게 말까지 붙여본다. “작품들이 다 예뻐요. 이것도 선생님이 만드신 거예요?”     


  왜일까? 그 사람이 알고 싶은 거다. 하물며 작은 액세서리 하나를 만나도 이럴진대 내 마음을 두드리는 시는 오죽하겠는가. 그 시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진다. 나아가 또 다른 영역의 예술작품으로까지 관심이 확대된다. 연상 작용이 일어난 거다. 내가 사랑한 시가 내 손을 잡고 나를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제 류시화 시인의 「시로 납치하다」라는 레스토랑으로 옮겨보자. 그가 엮은 시 모음집은 진리다. 시인이 전 세계의 좋은 시를 찾아내어 번역해 놓은 노고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에서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섬세하게 받아내어 아름답게 시를 지어내는 오십육 명의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시 맛이 참 정갈하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영혼까지 씻기는 느낌이 든다. 더구나 이 레스토랑의 총 지배인 격인 류시화 시인이 들려주는 품격 있는 해설로  시는 더 풍미가 있어지고 육질은 연해진다. 그래서인지 류 시인에 의해 숙성된 시들은 우리의 몸속 깊이 스며든다. 만약 시모음집 미슐랭 가이드가 있다면 별 3개쯤은 거뜬히 받지 않았을까.   

   

  또 한 편의 시가 내 몸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기어이 눈물까지 뽑아냈다.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 검푸른 추위 속에서 옷을 입고 / 한 주 내내 모진 날씨에 일하느라 쑤시고 / 갈라진 손으로 불을 지폈다. / 아무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데도 /......//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 사랑의 엄숙하고 외로운 직무에 대해” 로버트 헤이든의 <그 겨울의 일요일들>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나에게 풀어야 할 숙제이고 상처다. 아직은 앎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은 진정 멀다. 하지만 절반은 온 것 같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에서 양효실 교수님은 성장은 나를 죽일 것처럼 가로막고 누르던 상처를 덧나게 하는 미적 반복의 행위를 통해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본다면 시를 읽는 행위는 내면의 상처를 들춰내고 그 상처를 할퀴기도 하는 미적 반복 행위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서 발생한 고통은 통찰이라는 꽃을 피우고, 찰나의 순간에 또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게 된다.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 모음집 한 권에서 마음에 와 닿는 한 편의 시라도 혹은 한 명의 시인이라도 발견한다면 기뻐해라. 그건 행운이다. 한 편의 시로 인해 뇌에서는 연상 작용이 일어나고 뇌는 춤을 춘다. 덩달아 우리도 춤을 춘다. 밥도 안 되고 돈은 더더욱 안 되는 그 쓸모없는 일이 우리를 웃게 하고 눈물 콧물을 쏙 빼게 한다. 카타르시스의 향연이다. 이 맛에 시를 읽는 게 아닐까.         




 ||  2단계시를 좀 더 재미있게 만나기 ||


  여전히 시에 납치당하고 싶지 않은가. 아직도 시는 지루하고 교과서에서나 배우는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비슷한 샛길로 빠져보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유시인 오르페우스가 환생한 것 같은 싱어송라이터들의 노래를 들어보라.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분명 시인인데 시에 음을 입히고 노래를 부른다. 심지어 악기까지 잘 다룬다. 누가 그들을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덕분에 우리는 아름다운 시를 기막힌 선율과 함께 들을 수 있는 축복까지 누리게 되었다.         


  시작은 나훈아였다.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 영원히 영원히 내가 사는 날까지 / 아니 내가 죽어도 영영 못 잊을 거야”,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 //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 회초리 치고 돌아 앉아 우시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영영>과 <홍시>의 가사 일부다. 굳이 그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가사 자체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냥 시다. 아주 훌륭한 시. 


  <영영>은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비견될 만큼 아름답다. <홍시>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 저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운율을 어쩌란 말인가.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가 떠올랐다. 또 눈물이 났다. 나의 엄마와 엄마가 된 나를 여자 사람으로서 동시에 위로해 주는 시다. 몇 년 안에 표를 구하기 어렵기로 유명한 나훈아 디너쇼에 꼭 부모님을 모시고 가고 싶다.    

 

  김창완은 언제 봐도 감성 충만한 어린 왕자 같다. 그래서인지 늙지도 않는다.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 나에게 커다란 의미 /......//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되네”,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 멀리 뱃고동이 울리면 / 네가 울어주렴 아무도 모르게 /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서” <너의 의미>와 <안녕>의 가사 일부다. 감수성이 충만한 아이가 느껴지지 않는가. 사랑 없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속 제제처럼. 


  최근에 그는 「무지개가 뀐 방이봉방방」이라는 동시집도 냈다. 세상에나, 그 기발하고 영민한 상상력과 표현력을 어쩔 건가. “너 용서가 뭔지 아니? / 용서가 한 번 봐주는 거 아니에요?” <용서>라는 동시의 마지막 시 구절이다. 무릎을 쳤다. 캬! 소리를 내면서.   

    

  이적은 엄청난 다독가답게 구사하는 어휘가 섬세하고 다채롭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이제 숫자로만 남은 것 같아”. “철석같이 믿었었는데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나에겐 마르지 않는 눈물을 남겼네”, “오랜 뒤에도 이렇게 간절할 거라곤 / 그땐 둘 중 누구도 정녕 알지 못했죠”, “아직 네겐 너라는 선물이 있으니까 / 아직 이 황량한 세상 속에”, “오싹한 낭떠러지도 / 뜨거운 불구덩이도 상관없어요/......// 우리가 우리가 되어간다면 그럼 충분해요”, “그대라는 오랜 매듭이 / 가슴속 깊이 남아서” “어느 곳에 있을까 / 그 어디로 향하는 걸까”, “그게 참 맘처럼 쉽지가 않아서 / 그게 참 말처럼 되지가 않아서” 다 열거하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울 것 같아서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발췌한 가사들이 어떠한가. 은유가 살아있지 않은가. 어쩌면 저리도 참신한 어휘가 딱 제 자리에서 빛을 내고 있는지. 독일의 한 철학자는 “서정시란 자연적인 감정을 리듬과 멜로디 같은 예술적 손질을 통해 숭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 철학자의 말대로라면 그의 노래는 서정시고, 그는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는 서정시인이다.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아름다운 시구절로 숭고하게 다듬어 놓았으니까. 만약에 그를 만난다면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라는 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아! 에픽하이의 타블로, 그는 영원해야 한다. 그는 그림책 속에서 갓 튀어나온 시인이다. 바로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이라는 그림책 속 주인공 프레드릭처럼. 이 위대한 시인은 어디에서든 겨울을 위해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고 있을 것만 같지 않은가. 그의 노트는 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한다. 그의 노랫말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어 탄생했는지 보고 싶은 이들이 많을 테니. 나는 그를 통해 힙합에 대한 편견을 깼다. 그 전까지만 해도 힙합은 욕설이나 비속어가 난무하는 듣기 거북한 길거리 문화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힙합이 시적이고 철학적일 수 있다는 것을. 한 편의 서사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자, 여기 Beat 위에 Rhyme의 설계사가 나가신다. 이제 겸허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노랫말을 영접해보자. 비가 오면 <우산>은 무조건 들어보길 권한다. “텅 빈 방엔 시계 소리 / 지붕과 입 맞추는 비의 소리 / 오랜만에 입은 coat 주머니 속 반지 / 손 틈새 스며드는 memory" ‘이’로 끝나는 라임이 꼭 빗물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이번에는 <고마운 숨>을 들어보자. "나를 숨 쉬게 하는 건 잔잔한 비, 친구와의 달콤한 시간낭비, 붉은 꽃, 푸른 꽃, 새벽의 구름 꽃, 사랑이란 정원에 흐드러지는 웃음꽃. Bloom. 내 맘의 휴식. 제주도의 바람. 서울 밤의 불빛. 거릴 걷다 보면 들려오는 에픽하이의 music. 내 아내와 아이의 눈빛”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때 들으면 좋다. 일상의 작은 것들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이 노랫말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비쳤다면 과한 찬양일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의구심이 들고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을 때는 <연필 깎기>와 <낙화>를 들어보자. “시작을 잊지 마 / 이 길이 쉽지 않은 걸 그댄 알고 있었잖아, 땀을 씻지 마 / 그대의 밤이 틈을 잃어버린 삶이 / 사람들의 태양이 된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 “가질 수 없는 꿈이지만 I have a dream / 비틀거리는 꿈이지만 I have a dream / 버림받은 꿈이지만 I have a dream / live and die for this dream"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꿈을 계속 상기시킬 수 있었다.    

 

  <빈차>는 삶의 무게에 눌려 지친 마음을 가만히 위로해 주고 우리 내면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 “내가 해야 할 일. / 벌어야 할 돈 말고 뭐가 있었는데. / 내가 가야 할 일. / 나에게도 꿈같은 게 뭐가 있었는데.”      

  

  아버지와 관련된 그 어떤 시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 <당신의 조각들>도 꼭 들어보길 바란다. “당신의 눈동자, 내 생의 첫 거울. / 그 속에 맑았던 내 모습 다시 닮아주고파. / 당신의 두 손, 내 생의 첫 저울. / 세상이 준 거짓과 진실의 무게를 재주 곤 했던 내 삶의 지구본.” 아버지와 관련된 노랫말은 항상 눈물을 동반한다. 하지만 눈물은 그에게 가는 지름길이 되어준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았는가? 이제 끝장을 보자. 힙합과 트로트의 융합! 그 어려운 걸 타블로가 해냈다. 요즘 대한민국은 <미스트롯>으로 트로트 신드롬에 빠져있다. 그런데 그는 10년 전에 이미 트롯의 대세를 예언했다. 보라. 이 놀라운 lyrics를. 알만한 트로트 노래 제목들을 퍼즐처럼 절묘하게 끼워 맞춰놓았다.      


  “아무리 각 잡아 봐도 똑바로 봐도 / 술 취하면 똑같아 뱃속에 파도 / 일렁일 때마다 되려 술잔을 찾고 / 팔다리는 나풀대 마이크를 잡고 / 딴따라 딴딴따 트로트 가락에 / 맞춰서 움직여 네 박자 / 땡뻘 같은 하루에 유일한 동반자 / 술 깨면 떠나 사랑은 나비인가 봐 /.......// 힙합 댄스 락 발라드도 좋지만 슬플 땐 what? / 힙합 댄스 락 발라드도 좋지만 슬플 땐 트로트!”


  한 번 따라 해 보고 싶지 않은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이 힙합트롯을. 톨스토이는 위대한 예술은 누구나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용이하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타블로의 힙합은 분명 위대한 예술이다. 오래전에 라디오 모 프로그램에서 타블로가 게스트로 출연하여 영어를 가르쳐주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한 학생이 ‘배고프다’를 “I'm hungry"가 아닌 다른 예쁜 표현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뭐라고 답했을 것 같은가. 참고로 그는 시인이다. 바로 ”My stomach is crying"이었다. 놀랐는가. 나도 그랬다. 별개 아닌데도 슬프도록 예뻐서. 너무도 시적이어서.   

    

  마지막으로 그가 19살 때 쓴 'One lesson'도 꼭 들어보길 바란다. 내용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여러 모순에 던진 철학적 질문들이다. “Genius is not the answer to all questions. It's the question to all answers." 이 문장이 내내 머릿속에 맴돈다. ‘천재성(특별한 재능)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모든 답에 대한 질문이다.’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까. 우리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에서 당연함을 걷어내고 호기심을 입은 질문을 던져보자. 혹시 누가 아는가. 나만의 라임으로 랩을 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질지. 아니 우선 하상욱 시인 따라쟁이라도 될 수 있을지.     

 

  아무튼 나는 소망한다. 언젠가 타블로가 칠레의 민중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을 능가하는 시집을 내기를. 더 기발하고 촌철살인적인 질문들로 가득한. 현재 마음이 괴로운가? 아니면 외롭거나 쓸쓸한가? 그것도 아니면 삶이 평범하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타블로의 머리가 아닌 몸에서 꺼낸 말들을 읽고 들어 보아라. 힙합 명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을 테니.    

   

  가끔은 젊은 싱어송라이터들의 노래도 들어보라, 이 젊은 음유시인들의 노랫말은 아름답고 처연하기까지 하다. 중년의 나에게도 공명을 일으킨다. 혁오밴드의 <톰보이>나 <위잉위잉>, <Hey Sun>을 듣다 보니 조금은 보인다.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그들이 느끼는 불안과 불만, 희미한 희망까지.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 /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만 가는.”, “집에서 뒹굴뒹굴 할 일 없어 빈둥대는 / 내 모습 너무 초라해서 정말 죄송하죠” 나는 이렇게 말하는 그들의 속이 오죽할까 해서 마음이 아팠다. 흔들리지만 견고한 문장이 20대의 불안한 나를 소환했다.      


  나 역시 잘 다니면 회사를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겠다며 백수가 된 적이 있었다. 집에서 쉬어도 쉬는 게 아니고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도 죄송하게만 느껴지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Hey Sun>에 나온 노랫말 “the end is here another beginning of the end"처럼 끝은 여기서 끝의 또 다른 시작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 새로운 문을 두드렸다. 금수저도 은 젓가락도 없었지만 지금까지 잘 살아냈다. 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부끄러움이든 분노든 거기에서 동력을 얻어 도전하길 바란다. 아니 그럴 거라 믿는다. 그러니 너무 오래 비틀거리지 않기를. 너무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끝으로 딘의 <인스타그램>은 싸이월드를 하던 시절의 다크서클 가득한 나를 불러왔다. 당신은 예전에 싸이월드를 열심히 했던 부류인가? 나는 하마터면 열심히 할 뻔했다가 발을 뺐었다. 어느 가을, 밤새도록 내 아이의 사진을 올리고 친구,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싸이월드를 구경하느라 날을 꼬박 새웠던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 문득 든 생각이 내가 노출증 혹은 관음증 환자인가라는 거였다. 왜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삶을 몰래(?) 들여다보고 나서 마음이 헛헛하고 기분이 나빠지는지. 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어이 이 새벽에 디지털 세상 속에 내 포장된 삶을 띄워놓는지. 내게 묻기 시작했다.      


  더 이상 비교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웃고 있는 사진 속 핑크빛 위선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의 평화를 위해 싸이월드를 떠났었다. 그런데 10년이 넘은 지금 나보다 거의 20년은 젊은 한 청년이 새로운 소셜 미디어인 인스타그램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닌가. “잘난 사람 많고 많지 / 누군 어디를 놀러 갔다지 / 좋아요는 안 눌렀어 / 나만 이런 것 같아서 /......// 부질없이 / 올려놓은 사진 / 뒤에 가려진 내 마음을 / 아는 이 없네 / 난 또 헤매네 / 저 인스타그램 속에서” 그 마음속이 얼마나 복닥거릴지 알기에 대신 가사를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자아와 내면아이를 데리고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디지털 자아’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얼마나 심리적 부담이 클까. 「테크 심리학」이라는 책을 보면 신화 속 나르시시는 오로지 자신의 모습에만 빠져들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밑 빠진 앱이라 불리는 소셜 미디어을 사용하면서 훨씬 사교적인 자아도취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즉 현대인에게 자기자랑은 타인과 연결되어야 하는 필요에서 나온 공동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 우리가 억지로 사교성을 띤 꼬리를 흔들며 그 위험한 바다에서 부유해야 하는가. 독의 유무가 확인도 안 된 인정과 칭찬을 받아먹으면서.      


  우리 모두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에 속해있다고 한다. 원래부터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내 맘에는 구멍이 있어 / 그건 뭘 로도 못 채우는 것, yeah / 난 지금 가라앉는 중인걸 / 네모난 바닷속에서” 마음속 구멍은 타인과의 연결로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자아도취에 빠져 마르쿠스 피스터의 그림책 속 무지개 물고기처럼 자신의 반짝이 비늘을 기쁘게 나눠줄 수 있다.     


   모처럼 젊은 음유시인들 덕분에 과거를 떠올려 보고 ‘그땐 그랬지’라고 추억할 수 있어서 좋았다.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예술이란 쾌락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킴으로써 함께 동일한 감정을 결합시키고, 인생 및 개인을 온 인류의 행복으로 이끄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세대 간의 감정을 결합시키고 소소한 행복을 견인하는 작고 위대한 예술이라 하겠다. 

     

  그런데 뭔가 빠진 것 같지 않은가? 노랫말의 신이라 할 수 있는 ‘유재하’, ‘김광석’, ' 신해철', '심수봉'은 이미 왕좌에 앉아계시므로 감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밖에 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루시드 폴의 <오, 사랑>, <평범한 사람>,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등 대부분의 노래, 스텔라 장의 <Villian>, 요조의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도 꼭 노랫말을 곱씹으면서 들어야 한다. 시인은 현재 이 자리에 없는 것을 언어로써 불러내는 자라고 했다. 이 주술사들이 내리는 말의 비를 흠뻑 맞아보자. 혹시 아는가. 우리도 운 좋게 그들의 마법에 걸리게 될지.  



    


 ||  3단계. 마음에 드는 시인의 시집 사서 읽기 ||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시집들(2020년 8월)

  자, 이제 마음에 드는 시인도 찾았고, 샛길에서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렸지만 살아남았으니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시집 사냥에 나서자. 시집을 집에 들이는 일은 꽤나 신중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죄를 알 것이다. 그 옛날 라면 냄비 받침대로 사용해서 시인의 얼굴에 화상을 입힌 죄. 두툼한 책들 속에 끼워둬 짜부라지게 만들고 시인의 존재감을 지운 죄. 더 이상 그런 우는 범하지 말자. 이성복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들을 구제하는 게 문학이요, 모든 미친 것들에게, 미치지 않으면 안 될 사연 하나씩 찾아주는 게 시다. 그런 착한 일을 하는 시를 홀대하면 되겠는가. 

    

  우선 읽기 편한 시집부터 읽자. 그래야 한 동안 내 손에 머무르며 시인과 함께 호흡할 수 있을 테니. 아무리 유명한 시인의 시집이라도 알아듣기 어렵고, 공감되는 부분이 적다면 아직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우리가 바쁜 일상 속에서 시의 세계로 떠나려고 하는 건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 잠시나마 시에 기대어 위로받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고 싶기 때문이다. 시의 문장들을 곱씹어 말랑말랑한 풍선껌으로 만들어서 헐벗고 구멍 난 마음을 메꾸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풍선껌도 더러워지고 딱딱하게 굳어 떨어지고 만다. 다시 시집을 펼쳐 곱씹을만한 시를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시집은 내 시야와 손길이 쉽게 닿는 곳에 있어야 한다. 사서 보자는 얘기다. 나는 현재는 독서를 위해 도서관과 알라딘 중고서적을 주로 이용하는 편이지만 시집만큼은 꼭 서점에서 직접 보고 구입한다. 아마도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 때문이리라.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 국밥이 한 그릇인데 /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든 공’이 얼마일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나조차도 흉내만 내본 정도이니까. 황현산 선생님은 「밤이 선생이다」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작업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인이 제 몸을 상해 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소명 의식을 가지고 시를 쓰는지 이제 알았는가. 시집의 무게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인 것이다. 시인이 밤마다 제 몸을 상해가며 쓴 시는 밤마다 상한 마음을 붙들고 우는 이들에게 위로 한 그릇, 용기 한 사발이 된다. 그래서 나는 비싼 아메리카노 두 잔 값밖에 안 되는 만원을 기꺼이 지불한다.     


  그런데 책에도 시절 인연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그때 내 마음이 무엇을 끌어당기는가에 따라 집에 데리고 오는 시집의 종류가 다르다. 어른의 지혜와 통찰이 필요할 때는 잠언시집을, 지적 허영을 채우고 싶을 때는 노벨 문학상 시인의 시선집이나 그해 신춘문예 당선시집을, 복잡한 마음을 비워내고 싶을 때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산문집을, 비슷한 연배의 중년 아줌마와 시적인 생활 수다를 떨고 싶을 때는 성미정 시인의 시집을, 요즘 세대들의 삶과 기발한 사유가 궁금할 때는 젊은 시인들의 시집을 그리고 맑은 영혼들의 빛나는 호기심이 그리울 때는 동시집을 데려왔다.     

    

  류시화의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은 고전처럼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달리 읽힌다. 30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잠언시가 무거운 훈계 말씀처럼만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경험에서 얻은 지혜와 성장의 순간이 거기에 녹아있다. 시의 문장들은 가볍게 춤을 추며 내 안으로 들어온다. 가령 루티야드 키플링의 시 <만일> 속 “그리고 만일 내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1분간을 /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60초로 대신할 수 있다면, / 그렇다면 세상은 너의 것이며 / 너는 비로소 / 한 사람의 어른이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이제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완벽한 날들이 어디에 있을까. 한없이 허수아비나 겁쟁이 사자로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럴 때 펼치면 지혜와 용기를 주는 마법 같은 시집이다.    

   

  한 번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혹은 ‘유럽과 미국 양쪽에서 숭배 대상이 된 시인’이라는 사람이 쓴 시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데리고 온 시집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과 찰스 부코스키의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이다. 제목에서 글들의 품성이 느껴지지 않은가. 그러나 이 대단한 사람들은 결코 잘난 체를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고상하게 글말로 풀어썼고, 한 사람은 걸쭉하게 입말로 풀어썼다는 차이일 뿐이다. 결국은 거짓 없이 진실 되게 현재를 살아내라고 이야기한다. 아직 한참 모자란 내게는 그만큼 들렸다.    

  

  어쨌든 <선택의 가능성>이라는 시를 보고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하고, 신문의 제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하고,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하는’ 그녀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송구스럽지만 잠깐이나마 같은 부류로 느껴졌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택한’ 그녀에게 감사하다. 덕분에 양파처럼 겉과 속이 일치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꾸게 되었으니까.      


  아! 찰스 부코스키! 가식이라는 기름을 쫙 빼버린 니체 같으니라고. 지금이라도 그를 알게 돼서 얼마나 감사한지.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분노 뒤에 숨은 슬픔이 느껴져서 자꾸 눈물이 난다. 아마도 그의 아픈 유년시절을 알기에 더욱 울림이 큰 것 같다. <불씨>라는 시에서 그가 뱉은 말은 위로와 용기를 넘어 성장에 ‘불씨’가 되었다. “많이도 필요 없어, 그냥 불씨만 살려 둬. / 불씨 하나가 / 숲 전체를 태울 수 있어. / 그냥 불씨 하나만. / 그걸 살려 둬. // 해낸 것 같다. / 다행이도. / 참 우라지게 복도 / 많지.” 이 욕쟁이 거리의 철학자 시인의 거역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보라. 세상을 향해 욕을 날리고 싶을 때 보면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해질 것이다.         


  종교와 무관하게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은 필수품이다. 정화수이자 성수이고 청아하고 품격이 높은 국화차이다. 수녀님의 시들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고요한 성당 안에 앉아 있다. 부글부글 끓던 화도 방울방울 거품이 되어 날아간다. 「그 사랑 놓치지 마라」 속 <바다를 꺼내 끌어안으며>를 읽다가는 나도 모르게 “네 그렇게 할게요.”라는 말이 새어 나왔다. “밀물이 들어오며 하는 말 / 감당 못할 열정으로 / 삶을 끌어안아보십시오 / 썰물이 나가면서 하는 말 / 놓아버릴 욕심들을 / 미루지 말고 버리십시오”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큰 바다를 번쩍 들고 오실’만큼 큰 사랑을 품으신 수녀님! 그 마음을 눈곱만큼이라도 닮고 싶다.


  “늘어진 트레이닝복 차림 / 에 맨 얼굴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 / 를 들고 광화문 일대를 걸어다니는” 아줌마풍 시인과 배꼽 잡고 울고 웃으며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성미정 시인의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를 읽기를 권한다. 행색은 저래도 ‘새벽 두 시까지 한 땀 한 땀 오른손 셋째 손가락에 땀나도록’ 시 쓰기에 매달리는 영락없는 시인이다. 나는 이 중년 아줌마 시인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소박해진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처럼 거기에 하얀 털이 났다고 대놓고 호들갑을 떠는 이 시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 근래에 들어 읽기 시작한 시집은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와 「뼈」이다. 싱그러운 울울함을 풍기는 젊은 여성 시인들의 자기 고백적 글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원하 시인은 하늘, 돌, 바람, 나비, 바다, 꽃 등 제주의 자연을 통해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이야기하듯 풀어낸다. 꼭 빨간 머리 앤이 시인이 되어 돌아온 것 같다. 읽다 보면 그녀의 귀여운 상상력에 빠져들어 계속 읽게 된다. 왠지 술은 셀 것 같다. 문창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시집을 딱 한 권밖에 읽어본 적도 없는 이가 이런 흡인력 있는 시를 썼단다. 시는 시인을 알아보나 보다. 대부분 유명한 시인들을 보면 어느 날 문득 시가 내게로 왔다고 얘기하지 않던가.

     

  「뼈」는 이르사 데일리워드라는 흑인 여성의 시집이다. 비열한 남자 어른들에게 성적으로 짓밟힌 이야기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절박하게 풀어놓았다. 아니 피멍이 든 몸과 뼈에서 뽑아내었다. “아름다움은 또다른 형태의 감옥이다”와 “그곳에서는 / 아무것도 너를 찌르지 않는다. / 그 무엇도.”라는 <또 화요일>에 나오는 시 구절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약자의 위치에 있었을 때의 여성의 몸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웬만하면 나는 읽히는 시집을 읽는다. 물론 다른 시인들의 시집도 가지고 있지만  초현실주의 시법의 현대시는 여전히 어렵다. 아무래도 내가 가진 배경지식이 미천하여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가끔 도전한다. 황현산 선생님은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상상해냄으로써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정신을 해방하려 한다.”라며 이해하기 어려운 시에 대해 친절하게 해설했다. 그 말씀을 믿고 꾹 참고 읽어본다. 읽다가 바로 덮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시는 시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쓰고, 독자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읽는 문학이라고 했다. 머리에 쥐가 나게 하는 시 말고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시를 읽자. 어려운 시도 마음이 편한 쪽으로 해석하자. 우리는 날카로운 평론가가 아니라 더 순해지고 싶은 순한 독자가 아닌가. 마지막으로 구입한 시집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은 시집을 사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필요할 듯한 시를 골라 귀퉁이를 접어 선물해보자. 시 찜질은 누구에게나 필요할 테니까.




   ||  4단계. 시처럼 생긴 것 긁적거리기 ||


  이제 시와 친해지는 방법에 대한 긴 여정의 종착역에 거의 다 왔다. 지금쯤 당신만이 지니고 있는 그 생각과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일 채비가 다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섬세한 관찰력을 지닌 뇌, 연민의 마음을 지닌 심장, 시처럼 생긴 것을 쓸 용기까지 다 준비되었다. 드디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마법만 부리면 되는 것이다. 시인이 될 수 없다면 시처럼 살라고 했던가. 나는 이 말이 더 어렵다. 도대체 시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오덕 선생님은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라는 책에서 우리 아이들이 시를 만드는 장인바치가 아니라 시를 생활에서 찾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찾았다! 시처럼 살라는 말의 의미를. 시를 생활에서 찾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나를 시생인이라 부른다. 내가 지은 말인데 ‘시처럼 생긴 것을 긁적이는 사람’의 줄임말이다. 몸을 상해가면서 시를 쓸 자신도 없고, 시인처럼 고뇌와 기쁨들을 보는 천 개의 눈을 가지지도 못했으니 그냥 비슷한 것을 쓰는 사람이라도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오덕 선생님이 말씀하신 ‘시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과도 의미가 통한다. 줄임말마저도 딱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마음에서 일렁이는 목소리를 담을 그릇은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그 해답은 미국 시인인 메리 올리버가 30년 넘게 늘 뒷주머니에 넣고 다닌 공책에서 찾아보자. 그녀의 산문집 「긴 호흡」을 보면 후에 시로 재탄생할 언어의 알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보고 들은 것, 생각들, 책에서 인용한 문구, 일상의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 예를 들어, “흰뺨오리들은 아직 그레이트 연못에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쓴 많은 글은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에 쓴 게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였기 때문에 쓴 것이었다.”, “당밀, 오렌지 하나, 회향 씨, 아니스 씨, 호밀 가루, 이스트 두 덩어리” 등등. 이렇게 어떠한 형식 없이 순간순간을 포착해서 기록해두면 된다.  

    

  그런데 엄마는 바쁘다. 우리는 메리 올리버처럼 아침마다 바닷가 근처를 산책하며 늑대거북의 움직임과 흉내지빠귀의 노랫소리를 관찰할 수 없다. 우리는 어느 시인들처럼 단지 시를 쓰기 위해 제주도나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여기저기서 ‘엄마’, ‘여보’하며 나를 찾는 식구들의 소리에 고독의 시간을 내기란 여간 쉽지 않다. 그렇다고 포기하긴 이르다. 이부영의 「자기와 자기실현」에서 언급된 융의 부인이자 여성분석가인 엠마 융은 이렇게 말하여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여성의 창조성은 생활의 영역에서 표현된다.” 우리의 주 활동 무대는 가정이다. 이 생활 공동체가 창조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인 것이다. 가족을 위한 모든 생활이 시로 올 수 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빨래를 개다가, 아이를 교육시키다가, 장을 보다가. 

    

  나도 순간들을 잘 메모해 두는 편이다. 한 번은 프라이팬에 김을 굽고 있는데 한 템포 늦게 뒤집어서 김 한 장이 살짝 탔다. 그런데 그 순간 김이 화상을 입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얼른 나의 사물응시독후감 노트에 ‘김, 그녀의 몸이 화상을 입었다’라고 적어두었다. 그날 밤, 이 한 문장이 단초가 되어 <구운 김>이라는 시처럼 생긴 것이 탄생했다. 뒷부분만 들어보자. “그런데 너무 뜨거웠나 보다 / 예민한 그녀의 몸이 화상을 입었다 //.....//드디어 드러나는 오묘한 검푸른 빛 / 단단하고 바삭한 결 / 나는 경건하게 가위질을 했다 / 그녀의 슬픔이 우수수 떨어졌다 // 오목한 쇠 요람에 갓 태어난 미끄덩미끄덩한 밥알을 / 눕혔다 그리고 그 위에 막 눈물을 닦아낸 보송보송한 / 검푸른 이불을 덮어주었다 / 그제야 하얗게 피어오르던 울음이 뚝 그쳤다” 어떤가. 시까지는 아니어도 시처럼 생기지 않았는가?     

 

  이성복 시인의 말대로 버림받은 것, 평범한 것을 귀하게 여기니 소박한 생활의 시 한 편을 낚을 수 있었다. 이때 즐거운 몰입을 통해 얻은 희열은 덤이다. 최근에는 키우던 강낭콩의 꼬투리가 통통하게 올라오고 잎이 시들해지는 모습을 보고 순간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났던 적이 있다. 신호다. 몸에서 강낭콩에 대한 시가 뚫고 나올 거라는. ‘새끼를 낳고 자신의 몸에서 진액을 뽑아내 키우느라 늙어가는 일은 강낭콩도 마찬가지다’ 이 한 문장을 노트에 적어놓았다.  언젠가 투박하고 못생기더라도 시처럼 생긴 것이 얼굴을 내밀 거라 기대하면서.     


  이거다. 시가 별게 아니다. 나태주 시인은 「꿈꾸는 시인」에서 시인은 곡비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곡비란 옛날 상갓집에서 주인을 대신해서 울어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 번쯤은 어떤 사물과 한 몸이 되어 교감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의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를 놓치지 마라. 시처럼 생긴 것이 탄생하려는 징조다. 시생인이 될 절호의 찬스인 것이다.  

  

  만약에 순간은 잘 메모해 두었는데 그다음 문장을 잇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시인들의 시 창작 강의를 들어보자.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는 아포리즘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읽기 편하다. 시에 대한 엑기스만 모아놓은 개론서라 보면 될 것이다. 매일 냉동실에서 꺼내 먹고 싶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같다. 나태주 시인은 「꿈꾸는 시인」에서 시인 지망생에게 아주 쉽고 다정하게 시를 쓰는 법을 알려준다. 시를 쓰기 전, 쓸 때, 쓴 후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친절하고 꼼꼼하게 짚어준다. 장석주 시인은 「은유의 힘」에서 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은유를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40년의 연륜을 바탕으로 자세히 알려준다. 책을 덮고 나면 은유가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지도 모른다. 요즘은 도서관에서 주관하여 줌으로 하는 온라인 강의도 있다. 힘들게 문화센터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시 쓰기를 편하게 배울 수 있다니. 참 좋은 세상이다.


참 고마운 시 선생님들!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우리는 대체 이 밥도 안 나오고 돈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일을 왜 하려는 걸까? 나는 시라는 것을 읽는 행위, 그리고 쓰는 행위를 ‘살아있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숨’을 느끼기 위한 작은 발버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내가 숨 쉬지 않고 살아있지 않다면 그 아름다운 것들을 어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짧은 글로 풀어쓰는 동안 잊고 있던 숨도 지금 살아있음도 모두 느끼게 될 것이다.   

      

  시는 자기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성미정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엄마가 감정 조절을 못하면 자녀에게 잔소리를 쏟아내기 마련인데 본인은 시로 풀었기에 아들을 많이 혼내지 않았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아이에게 화를 낼 것 같으면 시를 읽었다. 밤에 나의 감정을 꺼내어 시처럼 생긴 것을 쓰다 보면 낮에 왜 아이에게 야단을 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다. 화가 나고 울컥할 때 시만 한 것이 없다. 시는 우리 안에 사는 괴물을 순한 양으로 만들어주는 심신 안정제이다.    

  

  나는 안다. 시를 읽고 쓰고 향유한다고 해서 마침내 내면의 소리에 모두 응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아니라는 걸. 하지만 시는 분명 소화되지 못한 감정들의 배설을 돕는다, 종이 위에 쏟아내고 다듬다 보면 건강하지 못한 감정이 엉뚱한 곳으로 튀는 걸 막을 수 있다. 그러니 일단 쓰자. 그것이 타인을 공격하기 전에, 심지어 방향을 틀어 자신의 몸을 아프게 하기 전에, 자신을 배신하기 전에. 참고로 고상하게 말고 그냥 아줌마풍으로 쓰자. 감자 껍질을 벗기는 단순한 작업도 의식을 가진 행위라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은가. 의식을 가지고 집안일을 해보자. 고무장갑을 벗는 순간 좋은 시까지는 아니어도 뭐라도 적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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