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강차 Sep 26. 2020

이효리와 똑같은 ENFP입니다만

  사람들의 삶과 정체성은 타고난 유전자의 특성과 살아온 환경의 산물 그 이상이다. 누군가의 삶과 정체성은 그 사람의 열망, 헌신, 꿈과 일상적인 행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리틀의 「내가 바라는 나로 살고 싶다」 中에서-



  지금부터 아주 간단한 질문에 깊이 생각하지 말고 바로 답해보라. 만약에 당신의 친구가 전화해서 “나 우울해서 화분 샀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처음에 뭐라고 질문할 것인가? 질문은 크게 두 가지다. 1번. “무슨 화분 샀는데?”와 2번. “왜 우울한데? 무슨 일 있어?” 만약 1번을 택했다면 당신은 사고형(T) 일 가능성이 높다. 일어난 상황에 대한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유형이다. 만약 2번을 택했다면 당신은 감정형(F) 일 가능성이 높다. 일어난 상황 속에서도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유형이다.    

  

  이 시답잖은 질문에 내가 유달리 관심을 갖은 건 MBTI 성격유형에서 다른 영역보다 T인지 F인지가 관계에서 중요한 변수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향형(I) vs 외향형(E), 감각형(S) vs 직관형(N), 판단형(J) vs 인식형(P) 사이의 간극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좁혀지는 걸 느꼈다. 아니 좁혀진다기보다는 다름을 인정하게 된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 같다. 하지만 “무슨 일 있어?”라는 질문을 기대하고 시도한 대화에서 무슨 화분을 샀는지를 묻는 질문을 받는 순간 내 머릿속은 차갑게 얼어버린다. 그리고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든다. 공감받지 못할 거라는 걸 직감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이다. 혹시 당신은 살면서 팔꿈치 바깥쪽을 혀로 핥아보려 했던 적이 있는가? 이 질문에 그런 적이 있거나 지금 시도하려고 했다면 당신은 개방적이나 성실한 편은 아니며 외향적이고 친화적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정서가 불안정한 사람이라면 팔꿈치 바깥쪽을 혀로 핥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도전도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이 어이없는 질문에 대한 답의 해석은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였던 브라이언 리틀의 「내가 바라는 나로 살고 싶다」라는 책에서 본 것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개방성, 성실성, 외향성, 친화성, 정서 불안정성을 기본으로 한 성격의 5대 특성 검사를 해 볼 수 있다. 나는 성격 특징을 간단하게 표현한 15개의 문장에 점수를 매기는 것보다 위의 질문이 더 재미있고 바로 와 닿았다. 질문을 보자마자 ‘내가 해본 적이 있던가?’라고 떠올려 보았다. 기억에는 없었다. 즉시 팔을 최대한 꺾고 혀를 가능한 한 길게 빼서 시도해보았다. 닿을락 말락. 팔을 비틀어 보기도 하고, 눈을 최대한 치켜뜨고 혀가 얼얼할 정도로 더 빼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 순간 소의 긴 혀가 부러웠다.   

네이버 이미지 제공

     

  문득 남편에게도 묻고 싶어 졌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그의 답은 명백했다. “그런 짓을 왜 하냐?” 그러게 나는 그런 짓을 왜 할까. ENFP의 특징인 열정과 호기심이 그 이유이지 않을까. 등불을 들이대서 에로스의 모습을 보고야 마는 신화 속의 프시케처럼, 바다 바깥세상에 있는 왕자를 만나기 위해 기어이 물약을 마시고 마는 인어공주 에리얼처럼. 이러한 성향은 9가지 성격으로 분류하는 성격 유형 검사인 에니어그램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리스-허드슨 테스트라는 비교적 간단한 검사를 통해 나는 7번 유형인 열정적인 사람으로 결과가 나왔다. 우연의 일치일까. 신기하게도 심심풀이로 본 3가지의 다른 성격 유형 검사에서 모두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얻었다고 해서 호기심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각각의 검사에서 나온 결과를 보며 ‘나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사고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구나. 그렇다면 그 이면에 또 다른 성격은 뭘까?’, ‘나에게 부족한 면을 보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타고난 긍정적인 부분은 어떻게 강화시킬까?’ 등 새로운 질문이 생겨났다. 비록 혀로 팔꿈치의 맛을 보지는 못했지만 내 성격과 관련된 다양한 면의 맛을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예전보다 편안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 린다 G 이효리! MBTI 세상에서 나와 같은 동족인 그녀의 삶을 벤치마킹해보고 싶어졌다. 누군들 자기 안에 숨겨진 매력과 열정을 자연스럽게 발산하며 살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들 자기 안에서 빛나고 있는 무지개를 꺼내어 하늘에 걸어보고 싶지 않겠는가. 우선은 내가 가진 본래의 장점과 매력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알아야 꺼낼 수 있고, 꺼내 봐야 어디에 쓸모가 있을지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  ENFP의 인간적인 매력 속으로 ||

 

  “나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니까 좋은 사람이 오더라.” <효리네 민박>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효리가 아이유에게 건넨 말이다. 이효리의 어록이라고 불리는 여러 말들 중에서 나는 유독 이 표현이 좋다. ENFP의 가장 큰 장점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들은 직관적이어서 타인의 감정이나 상처를 잘 읽고, 그것을 자신에 비추어 따뜻하게 말을 건넬 줄 아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 분명 그녀는 이러한 타고난 본성 위에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로 얻은 지혜를 쌓았기에 적시에 적절한 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런 고백을 한다. “당신을 이렇게 위로하려 애쓰는 이 사람이 당신에게 가끔 위안이 되는 소박하고 조용한 말이나 하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의 인생 역시 많은 어려움과 슬픔을 지니고 있으며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뒤처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사람이 그러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얼마나 깊고 우아한 겸손함인가. 이처럼 이효리도 자신의 상처를 알아차리고 잘 발효시켰기에, 마음자리의 밑바닥에 투명한 우물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곳에 비친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따뜻한 차 한 잔 같은 진심을 우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궁금했다. 어쩌다 그녀는 명언 제조기가 되었을까. 어떻게 내적 성장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을까. 화려한 성공 가도만 달렸을 그녀에게도 표절시비로 인해 한동안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모 프로그램에서 정신과 검진을 받고 들었던 생각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제 자신을 내팽개친 채 다른 사람의 눈만 의식하며 살았어요. 제 자신을 학대하고 방치했어요. 왜 남의 눈만 신경 쓰고 정작 저 자신을 돌보지 못했을까.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녀는 시련을 통해 자기를 돌아볼 수 있었고 현명하게 자기돌봄을 선택하였다. 요가와 명상을 통해서.      


   왜 하필 요가였을까. 발레나 필라테스, 골프나 테니스, 웨이트 트레이닝 등 몸을 이용한 다른 운동을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 요가는 영혼에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운동 이상의 수련법이다. 그렇다면 영감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ENFP의 성향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재미추구형답게 요가에서 더 특별한 즐거움을 발견했을 테지만. 「인생의 태도」에서 웨인 다이어는 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기도라면 영감은 신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영감이 삶을 지배하면 당신을 묶어두고 제약하고 규제하는 온갖 현실적인 비판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요가를 하면서 신이 걸어오는 말을 받아들이며 지혜와 통찰을 얻었을 것이다. 그 깨달음으로 자신을 옥죄는 괴로움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을까. 이후 이 성격유형의 특징인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열정, 에너지를 내면을 탐구하는 데 썼으리라. 그러면서 방치해 온 자기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결과 자기이해를 통해 자신의 단점을 보완해주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사람을 보는 안목이 생겼을 것이다. 천방지축 같은 불안한 영혼의 배가 쉴만한 안전한 항구, 자유로운 영혼의 나비가 안착할만한 듬직한 소나무 같은 사람. 왠지 ENFP와 최고의 궁합인 INFJ일 것 같은 바로 이상순이다.    

 

  나 또한 타인의 인정에 매달리던 때가 있었다. 내면의 우물은 메마르고 온갖 굶주린 동물들이 날뛰던 시절. 타인의 말 한마디에 구름 위를 걷기도, 낭떠러지로 추락하기도 했다. 자만심과 열등감이라는 극단의 감정이 나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호감을 살지 전전긍긍하며 미움 받을 용기가 제로이던 상태. 전원을 켜면 미친 듯이 춤을 추다가도 플러그를 뽑으면 힘없이 축 쳐지고 마는 풍선 인형처럼 나는 내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쥐어줬다.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면 된다는 것도 몰랐다. 사랑은 부모에게서 또는 주위 사람들에게서나 받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으니까. 물론 내면의 힘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내게 내적인 평화를 가져다준 것도 영감을 주는 운동이었다. 바로 108배와 요가이다. 밤 10시 이후에 유튜브를 보고 집에서 하다 보니 워킹맘으로서 시간과 에너지도 절약하고 나의 몸과 마음 건강까지 챙길 수 있어서 일석 몇 조의 효과를 보았다. 내 몸과 마음의 스위치를 스스로 조정하게 되자 그런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면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로 내 속에 수많은 내가 건강을 되찾았다. 내면의 우물에 맑은 물도 차올랐다. 그로 인해 나의 무지와 실수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 타인이 지적하는 나의 잘못에 직면하는 용기, 어설픈 창작물을 공유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타인의 상처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용기까지 샘솟았다.   


  물론 본래의 성격이 변하지는 않았다. 다만, 새로운 면이 있다면 합리적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하고,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었으며,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성격 유형의 긍정적인 부분까지 통합하여 활기차고 건강한 나로 변한 모습을 떠올려 보자.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그렇다고 모든 동물들의 장점을 갖게 되었지만 이상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에릭 칼의 「뒤죽박죽 카멜레온」이라는 그림책 속 카멜레온처럼 되자는 얘기가 아니다. 건강한 통합은 뭘 더 채우는 게 아니다. 「에니어그램의 지혜」라는 책에서도 통합의 과정은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가로막는 성격의 어떤 면들을 알아차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는 “붙들고 있는 방어, 태도,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꽃이 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균형의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라고 강조한다.

      

  정말 그렇다. 깨어난 용기가 불안을 잠재웠다. 하루에 잠깐 나 자신에게 집중해 왔을 뿐인데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예전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충만해지고, 일상의 순간에서 소소하지만 작은 통찰을 자주 느꼈다. 개인적이고 독립적이 되었지만 반면에 타인에게 더 섬세하게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속 날개가 조금씩 균형을 찾게 되자 사고방식에도 변화가 왔다. ‘이건 맞고 저건 틀리다’ 또는 ‘네 편 내 편’식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줄어들었다. 그러자 정말로 좋은 사람이 왔다. 아니 내게 온 사람에게서 좋은 점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심지어 내 편이 아니라 여겨왔던 남편에게서도.    

   


 || 어찌 됐건 ISTJ 남자와 잘 살아가는 법 ||   


  “이 상 돌아이 같으니라고”, “고비용 저효율 같으니라고”, “네 멋대로 하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하란 말이야”, “밥이나 해. 딴 거 할 생각 말고”, “네 일이잖아. 네가 책임져” vs “좀 따뜻하고 다정하게 말해주면 안 돼?”

  결혼 10년 동안 남편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vs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이다. 남편은 상처를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의 말 화살은 항상 내 마음속에 깊숙이 박혔다. 그때 나는 화살이 꽂힌 채 직장과 집이라는 숲 속을 쉼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슬픈 짐승 같았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 <상처 입은 사슴> 속 사슴처럼.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바란 게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길. 그때는 몰랐다. 있는 그대로의 타인을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시간이 다 해결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냥 그렇게 살다 보면 상처도 아물고 관계도 좋아질 거라 막연히 기대했다. 착각이었다. 대화다운 대화 없이 부모로서 책임과 의무만을 다하며 살다 보니 방치한 상처는 곪기 시작했다. 온 에너지를 쏟아 서로를 미워하고 비난했다. 매일 고성이 오갔다. 가까운 거리에서 말하면서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을까? 류시화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책에 영적 스승 메허 비바가 들려주는 우화에서 그 답을 찾았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서로의 가슴이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 거리만큼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소리를 질러야만 멀어진 상대방에게 자기 말이 가닿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랬다. 그의 마음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평생 노총각으로 혼자 늙어갈지도 모르는 그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나라고 말하는 혀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던 것도 아님에도, 내 심장은 터져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살 수 있는 길은 이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논리만 옳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며, 융통성을 변덕으로만 생각하고, 다양한 생각들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며, 감정이나 공감 따위는 애초에 키워본 적도 없는 사람. 차가운 이 사람과 사느니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영화 <her> 속 운영체제인 ‘사만다’ 같은 인공지능과 사는 게 더 낫다는 생각까지 했다.    

  

  상대방의 감정을 사려 깊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일을 기꺼이 도와주며, 필요하면 언제든 유쾌하고 편안한 대화를 나눠주는. 언제나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주고, 상대방의 말에 집중해서 조언과 위로를 건네며, 목소리까지 섹시한. 그런 온기 가득한 AI라면 실체가 없어도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혼을 감행했다. 막상 지금까지 삶에서 최고 난이도의 선택과 결정에 맞닥뜨리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정을 배제하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사고하려고 했다. 직관 감정형(NF)으로서 내가 심리적 연장통에서 주로 편안함을 느끼고 집어 드는 도구는 감정이다. 하지만 가족의 위기 앞에서는 냉철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 모든 문제는 그에게 있었을까, 내가 너무 의존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행동 방식에는 문제가 없었을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는 했었나, 수많은 질문들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게다가 걱정을 동반한 질문들까지. 아이가 한참 예민한 때인데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사춘기가 되면 아이가 삐뚤어지는 게 아닐까, 아이가 과연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매일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진지하게 답을 하며 질문을 하나씩 지워갔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물었다. ‘진정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니?’      


  딱 후회할 것 같았다. 내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장점도 조금은 보였다. 아이는 초등학생이라지만 여전히 엄마의 손길이 필요해 보였다. 돌이켜보니 나는 유리 멘탈로 인해 가시를 바짝 세운 고슴도치 같았음을 깨달았다. 작은 비판에도 내가 무가치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나는 피해자, 그는 나쁜 사람이 되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받아들일지 요구할지 판단하면 되는데 항상 감정이 앞섰다. 그런 나를 고쳐 쓰기로 했다. 내가 가진 단점은 보지 못한 채 타인을 바꿔보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MBTI 검사를 개발한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는 「성격의 재발견」에서 성격이 매우 다른 사람과 결혼하려는 사람은 상대방이 가진 성격유형의 결점보다는 미덕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를 다시 읽었다. 그의 이름 옆에 ‘신뢰의 아이콘’, ‘성실 왕’, ‘논리 왕’이라는 착한 별명을 썼다. 차갑고 무심해 보이는 면은 ‘한결같음’으로 덮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도 꽤 괜찮아 보였다. 내가 열등한 부분을 장점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 세상의 소금형 ISTJ. 가정에서도 소금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분석이 끝났으니 결단을 내렸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자고, 좋은 방향으로”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렇게 나는 이혼에 실패했다. 그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임을 받아들였다. 나 또한 쉽게 상처 받는 사람임을 인정했다. 대신 그의 말을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하거나 감정적으로 듣지 않고 사실 그 자체만 객관적으로 들으려고 노력했다. 몸이 피곤하거나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는 어김없이 공격받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곧바로 반응하지 않고 내 마음에 집중하면서 무슨 말을 할지 생각했다. 그러자 멘탈이 예전보다 강해졌고 듣는 귀도 순해졌다.    

  

  내가 바뀌니까 그도 바뀌었다. 행복한 남녀관계를 위한 지침서 「그녀를 모르는 그에게」에 이런 말이 나온다. “말하는 남자보다 들어주는 남자가 더 섹시해 보입니다. 일방적으로 떠드는 것보다 물어보는 편이 더 섹시해 보입니다.” 맞는 말이다. 들어주고 물어봐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애무를 받는 느낌을 준다. 무뚝뚝하고 애정 표현도 없는 남자지만,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는 문정희 시인의 시 <남편> 속 딱 그 남자,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이다. 시 구절처럼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를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새끼를 함께 만든 남자라는 의미는 남편을 뛰어넘는다. 이제는 백점짜리 아빠인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요즘은 나의 성격유형의 장점을 발휘하여 남편과 별 갈등 없이 양질의 대화를 나눈다. 남편이 무슨 말을 하던 맞장구를 치고 본다. ‘아니거든’, ‘하기 싫거든’이란 말은 꿀꺽 삼킨다. 대신 받아들인다는 뜻에서 그의 생각이나 느낌을 읽어주는 표현을 한다. 전문 용어로 ‘공감적 미러링’이라고 한다. 「당신은 타인을 바꿀 수 없다」라는 책에 따르면 이 소통 방법은 당신의 입장을 상대방과 동일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당신이 상대방을 존중하고 있다는 신호만 보내면 된다. 그런 다음에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아주 침착하게 전달하고 성공적으로 협상하면 된다.” 일단은 쉽게 느껴지지 않은가. 먼저 공감한다고 해서 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드러운 대화 분위기를 만들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갈등 없이 얻어낼 수 있다.    

  

  다음의 대화가 바로 공감적 미러링의 성공적인 경험 사례이다.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뜬금없이 남편이 말을 걸어왔다.   

남편 : (당연하다는 듯이) 야, 감자조림 해 먹자

나 : (아주 다정하게) 감자조림이 먹고 싶구나. 그러어어어엄 여보가 해주면 안 돼?

남편 : (쌀쌀맞게) 너는 뭐할 건데?

나 : (아주 귀엽게) 나는 글을 쓸 거야.

남편 :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상 돌아이 같으니라고.

나 : (아주 아주 귀엽게) 고마워, 돌아이도 아니고 상 돌아이라고 해줘서.     


  결국 남편은 아주 맛있는 감자조림을 만들었다. ISTJ 답게. 백종원의 레시피를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며. 나는 ‘역시 당신 요리 솜씨는 끝내줘’라며 입에 여러 번 침을 바르고 칭찬했다. 공감적 미러링 덕분에 글도 두 장 쓰고 감자조림까지 얻어먹었으니 이만하면 성공적인 협상 아닌가. MBTI 궁합에서 ENFP와 ISTJ는 파국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 해석은 틀렸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말에 경청해주길 바라고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고 싶어 하며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 욕구만 서로 충족시켜준다면 정반대 성향이어도 팀워크를 발휘할 수 있다.  

    

  변광호는 「E형 인간의 재발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완벽한 성격은 없다. 다만 내가 가진 타고난 성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내가 처한 환경은 어떠한지 판단하여, 성격의 단점을 보완하려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나는 이혼의 위기 앞에서 이 말의 뜻을 정확히 실감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위기가 닥치면 우리 각자는 녹슬어 있던 마음의 연장을 꺼내 쓸 수 있다는 것을. 부부는 서로의 형편없는 모습도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관계다. 하지만 마를린 먼로가 한 말을 조금 바꿔서 서로가 가장 못되게 굴 때 서로를 감당해 줄 수 없다면 최상일 때 서로를 가질 자격도 없다. ‘감당’하면서 나도 그도 성장한다. 더 좋은 사람으로. 최상일 때의 상대를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 과신은 금물, 나와 너 이해 놀이 정도로 즐기기 ||


  그런데 자신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고 익숙하지 않은 마음의 연장까지 쓸모 있게 사용하려면 내면이 평온해야 한다. 마음이 불안하면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마음속에서 쉴 새 없이 재잘대는 목소리들 가운데서 지혜를 선택할 판단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강점은 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할뿐더러 약점은 더욱 부각된다. 따라서 타인에게 공감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 공감하는 것이다. 공감이란 나의 잘난 점과 못난 점을 모두 포용하는 것이고, 감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라는 존재를 어떤 한 가지 유형으로 규정짓지 않고 내가 가진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성격 유형을 한 가지로 규정짓지 않는다는 게 MBTI 검사로 나온 결과를 믿지 말라는 뜻일까. 알파벳 네 글자로 심플하게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MBTI는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검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아 그 결과를 과신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메르메 엠레는 「성격을 팝니다」에서 윌리엄 화이트라는 작가가 성격 검사를 비판한 글을 인용함으로써 MBTI의 모순점을 드러낸다. 그는 성격 검사가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도구로써가 아니라 충성 가능성에 대한 검사, 즉 개인의 개성을 무시하고 조직문화에 완전히 통합시키려는 검사로 둔갑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혹은 지원하는 조직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평가받으려면 성격 검사용 페르소나를 하나 준비하라고 조언한다. 자신의 민낯 그대로가 아니라 기업이 바라는 인재상과 직무의 특성을 반영한 가상의 인물이 되어 검사에 임하라는 뜻이다.   

   

  위의 주장을 들으니 MBTI가 대학 입학이나 회사 입사에 사용될 때, 사람들이 거짓으로 검사에 임할 수 있겠다는 개연성이 있어 보였다. 게다가 이 검사를 만든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는 이 성격에서 저 성격으로 넘나드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지만, 검사를 할 때마다 다른 유형이 나온다는 사람들이 있으니 신뢰성은 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성격의 재발견」에서 MBTI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현실 속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는 직관보다 감각이 더 바람직하고, 가능성을 보는 데는 직관이 더 유용하고, 일을 조직하는 데는 사고가 훨씬 더 적절하지만 인간관계를 다루는 일에는 감정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점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재능 모두를 보다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데 필요한 열쇠를 갖고 있는 것이다.”     


  왠지 오해가 풀리지 않는가. 우리가 성격 유형에서 뭔가 배우려고 한다면 자신의 그림자 속에 숨은 정신작용을 꺼내어 균형을 맞추어갈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자신이 억압했던 그 정신작용까지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기에, 심리적으로 건강해지고 엄청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녀는 감각과 직관, 사고와 감정은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나는 재능이고, 누구나 필요에 의해 개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만, 지배적으로 사용하는 정신작용과 그렇지 않은 정신작용이 있으니 보완의 필요성은 강조한다. 어쩌면 우리는 성격을 보완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사용하는 정신작용이 더 우수하다는 교만함을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성격 유형 검사를 극단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데 활용한다면 관계에서 마찰을 줄이고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나름의 매력도 찾을 수 있다. 직장에서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들과 일을 하다 보면 화법, 업무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등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유형의 스펙트럼에 있는지 감지한다. 그러면 말로 인해 상처를 덜 받고 오해도 덜 하게 된다. 함께 프로젝트를 할 때도 조율하는 데 어려움을 덜 겪는다. 태도에서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니 섣부른 기대를 하지 않게 된다. 그로 인해 심리적 거리 조절을 할 여유까지 생기니 MBTI가 꽤 쓸모가 있다. 뜻밖의 장점도 있다. 상대방이 사고형인데 감정을 써서 인간미를 보여줄 때 느끼는 신선함이다. 공감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이와 같이 MBTI의 양면성을 모두 이해하면 자신의 성격유형과 여기에서 파생된 연애유형이니 궁합 등을 신봉하지 않을 수 있다. 그냥 쉽고 편안하게 즐기는 무료의 ‘나와 너 이해 심리테스트 놀이’ 정도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과신하고 편견 갖고 선 긋고 그런 유치한 거 하지 말자. 무슨 무슨 유형이니까 나랑 잘 맞을 거야, 혹은 맞지 않을 거야라는 환상을 버리자. 우리는 모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무지한 인간일 뿐이지 않은가. 직접 만나고 부딪히고 서서히 알아가자. 진실은 환상을 깨는데서 시작되는 거니까.   

     



  || MBTI를 너머 우아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     


  이쯤에서 우리는 성격유형검사와 관련된 이런저런 논의를 넘어서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자신의 성격유형 뒤에 숨어서 그것이 가진 약점에 속아 두려워하며 뒷걸음치고 있지는 않는지 나에게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나도 조금 알고 너도 조금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조금 안다’는 것은 어설프다. 사람 잡기 딱 좋은 선무당 수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더 알고 ‘과거의 나’를 딛고 ‘새로운 나’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인간의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 50%이고, 약 10%는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한다. 나머지 약 40% 정도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인데 여기에서 ‘새로운 나’로 넘어갈지 말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타고났거나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성격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목표를 세워 실행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브라이언 리틀 교수는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목표를 ‘퍼스널 프로젝트’라고 명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퍼스널 프로젝트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 개인이 각자의 맥락에서 실행하는 지속적인 행위들의 모음이다.” 이를 역으로 해석해보면 우리가 하는 행위들이 우리의 고유한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다.      


  나는 퍼스널 프로젝트의 가장 상위 목표로 ‘우아한 인간’을 정했다. 내가 본 어른들 중에 본받고 싶은 분들에게서는 그들의 성격이 보이지 않았다. 성격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었다. 바로 우아함이었다. 우아함은 딱딱함이 아닌 유연함에서 나온다. 경직된 마인드와 태도로는 절대 우아함이 나올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우아한 인간의 유형을 MBTI처럼 분류해보면 이렇다. 한계를 아는 인간 vs 한계를 모르는 인간,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인간 vs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고 남을 돕는 인간이다.   

  

   “자기 숨이 다 있어. 열 발이면 열 발 자기가 갈 수 있을 만큼만 가. 그 이상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우리 한계가 있어” 고희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물숨>에 나오는 대사의 일부다. 해녀들에게는 엄격한 계급이 존재한다. 수심 5m 이하인 가장 낮은 바다에서 일하는 하군, 수심 5~9m에서 일하는 중군, 숨을 오래 참고 수심 15~20m까지 내려가는 상군. 이렇게 해녀들의 계급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숨이다. 숨이란 태어날 때 하늘이 주고 바다가 허락해야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자신의 숨을 받아들인다.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도 바다를 결코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의 술과 자식의 학용품을 살 수 있게 도와준 바다에게 목숨을 내어준 것이라 생각한다. 힘든 물길질의 삶 속에서도 자신의 숨에 만족할 줄 알고, 주어진 환경에 감사할 줄 아는 태도에는 분명 순박한 우아함이 깃들어 있다.     


   더! 더! 더! 를 외치며 내가 가진 모든 것에 만족할 줄 모르던 때가 있었다. 초라한 내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화려하게 꾸미고 과장해서 밝은 척을 했다. 능력 있는 척을 하려고 혼자서 다 짊어지고 끙끙 앓았다. 워킹맘으로서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균형 있게 사용했어야 함에도 나는 한계를 잊은 사람처럼 지냈다. 해녀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욕망의 숨인 물숨, 내가 그것을 마신 것이다. 발버둥을 칠수록 더 가난해지는 것을 느낄 때쯤 명상을 만났다. 흉내만 냈을 뿐인데도 독서로는 해결되지 않던 집착의 끈을 조금씩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살아있음에 감사했고 건강한 가족들에게 감사했다. 내 일이 있음에 감사했고 누울 집이 있음에 감사했다. 그렇게 나는 내 숨, 내 호흡을 찾아갔다.    

  

  그러나 집착과 욕심은 참 질기다. 방심한 순간 슬그머니 마음의 빈자리에 들어찬다. 그때마다 나는 자맥질하는 해녀처럼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108배 몸 명상을 한다. 마스크를 쓴 채 땀을 흘리며 양쪽의 화장실 청소를 1시간 이상 하기도 한다. 집안에서든 직장에서든 걸레를 손에 들고 닦기 시작한다. 해녀들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하루에 8시간가량 물질을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에 비하면 약한 강도의 몸을 쓰는 일이지만 받아들이고 내려놓는데 그만한 게 없다.

     

  하지만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과거의 나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폴 투르니에는 받아들임의 양면성을 「고통보다 깊은」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체념 어린 마음을 거치면, 수동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원한에 사무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도약, 현실 적응을 위한 활기찬 노력, 인격적 성장을 요구하게 마련인 삶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과 나의 단점은 인정하되 어쩔 수 있는 부분과 나의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 한계를 모르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 망가지는 연기를 하는 데도 우아한 여인이 있다. 바로 배우 김혜은이다. 그녀는 서울대 성악과를 나와 기상캐스터를 거쳐 연기자가 되었다. 이처럼 완전히 새로운 분야로 진로를 변경한 것은 대단한 도전이었지만 사실 그녀가 맡았던 역할들은 대부분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드라마 <해운대 여인들>에서 천박하고 무식한 호텔 안주인 역,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술집 여사장 역, 드라마 <밀회>에서는  무개념 재벌 딸 역으로 강한 캐릭터들을 연기했다.   

   

  그녀는 모 인터뷰에서 연기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고백한다. “아마 이미지를 쫓았으면 배우를 안 했을 테지, 기상캐스터로 고상하게 살았을 거다. 배우가 평생 할 만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건 직업의 가치에 많은 의미를 뒀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도전, 도전, 도전이다. 어떤 역할이든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이 힘이 느껴지는 답변에서 프시케가 연상되지 않은가. 미래의 직업의 가치를 보고 기상캐스터를 그만둔 결단력, 역할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 임하는 도전정신과 용기. 이는 남편 에로스를 다시 만나기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네 가지 과제를 수행해나가는 프시케의 강인한 우아함과 닮아 있다.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직업을 세 번 바꿨고 지금은 가장 내 몸에 맞고 가르치는 일에서 가치와 기쁨을 느끼는 교사라는 옷을 입었다.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응용하여 수업이나 삶에 적용해본다. 매년 대회나 공모전에 나가는 것도 정체되어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올해는 내 마음 그릇이 얼마나 커졌는지 시험하기 위해 부장이라는 역할에 도전했다. 쉽지 않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인정 욕구와 ‘내가 옳다’라는 자만심, 쓸데없는 자존심 등이 뒤엉켜 간혹 화도 나도 눈물도 난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에서 건강한 늑대와 여성은 심리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건강한 여성은 늑대와 아주 비슷하고 활력이 있고, 힘과 생기가 넘친다. 자기 영역을 잘 지킬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북돋우며, 창의적이고 충직하다. 그러나 야성을 잃으면 나약하고 초라하고 파리해진다.” 나는 현재 내 안에 야성이 눈을 뜬 걸 느낀다. 힘과 생기가 넘치는 날이 훨씬 많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야성을 잃고 심리가 불안정하고 유약해질 때도 여전히 있다. 그럴 때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색가형 가면을 쓰고 잠시 역할극을 한다. 이후에 느끼는 피로감은 나만의 깜짝 쉼 놀이 활동으로 회복하면 되는 것이다. 이 또한 성장통이라 생각하면서. 도전하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그 자리의 무게. 그렇게 흔들리면서 감당해나가다 보면 아주 조금 또 성장해 있는 나를 발견하리라. 상처에서 얻은 야성적인 지혜로 나의 직관은 더욱 섬세해지고 더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리라. 김혜은 그녀 말대로 쉬운 역할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눈물을 닦고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 도전, 도전한다.

    

  여기 백발의 긴 머리에 조곤조곤한 말투와 은은한 미소까지 장착한 또 한 명의 여인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가장 평온한 마음의 상태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라고 말하는 자연 치유가이자 배우인 문숙. 그녀에게서는 편안한 우아함이 엿보인다. 그녀는 많은 이가 선망하는 폼 나고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심각한 두통을 앓았다. 하지만 요가와 명상을 만나면서 자기 안에 욕구들과 마주하고 비움을 통해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연 건강식과 치유식과 같은 음식을 통해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치유할 수 있었다.    

 

  그녀는 40년 만에 연기를 하며 어느 중견배우에게 신인만 못하다며 핀잔을 듣고, 너무 곱게 살아 그렇다는 호통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도, 나에 대해 뭘 아느냐고 대들지도 않았다. 그렇게 버텨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걸까? 그녀가 쓴 「위대한 일은 없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아니 모르는 것이 전부라는 사실만 알아차리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게 위대하지도 않으며 위대할 것도 없고 위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엄청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 두 문장만으로도 일순간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는가. 도대체 우리가 뭘 안다는 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렇게 안달복달 대는가.

출처 - 문숙의 <위대한 일은 없다> 책 속 사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겸손함으로 촬영에 임했기에 그녀는 촬영 현장에서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덤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많은 것들을 가볍게 시도해 볼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문숙의 자연 치유」를 읽다 보면 그녀가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했는지 놀랄 따름이다. 미국의 한 예술대학에서 최고상을 받고 졸업하여 화가로서 유명세를 날린 적도 있고, 꽃꽂이와 요가 자격증뿐만 아니라 자연 치유식 조리사 자격증까지 갖추어 전문 강사로도 활약을 했다. 그런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삶을 살아간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결국 배움이 비움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아닐까. 마음 그릇에 배움이 켜켜이 쌓이면 그것이 넘쳐흘러 마음은 원래의 상태로 맑게 돌아가고, 그 그릇의 크기는 예전보다 더 커지는 게 아닐까. 지식은 희미해지나 지혜는 오롯이 남아 또 다른 지식을 받아들일 공간을 마련하는 게 아닐까. 아마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할 수 있는 힘은 겸손일 것이다.  

    

  ‘내가 안다’는 오만함이 고개를 쳐들게 되는 때가 있다. ‘나를 알아봐 주지 않는다’는 억울함이 울컥 올라오기도 한다. 대부분 내 마음이 무엇인가로 꽉 차 있을 때이다. 겸손은 힘을 잃고 자존심만 시퍼렇게 날이 서 있게 된다. 이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춰 비우라는 신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몸 명상을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 리셋하기 위해. 내가 우주의 작은 모래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고귀한 우아함이 엿보이는 어른이 여기 있다. 돈과 시간, 사랑과 에너지를 모두 내어주는 마음이 부자인 여인. 기부 천사, 봉사의 아이콘, 국민 엄마 등 별명까지 부자인 배우 김혜자다. 물론 일반인으로서 그녀의 수많은 미담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배우 김수미에게 선뜻 전 재산이 든 통장을 건네 준 사연이나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30년 넘게 해오고 있고, 매달 후원금을 지원하는 자식이 50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는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그녀를 조금이나마 닮고 싶은 이유는 그녀의 진실한 마음과 몸소 보여준 이타적인 행동 때문이다.  

   

  “아프리카 한 번 가봐. 가보면 우리가 지금 하는 고민들은 다 쓰레기 같은 고민들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몇 년 전 그녀가 모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한 말이다. 부끄러웠다. 빈곤과 질병, 전쟁으로 매일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그 아이들 앞에서 내 안의 에고와의 전쟁으로 고통스러워한 날들이 다 쓰레기 같았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전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내려놓고 있는 중이다. 그로 인해 남은 에너지로 가까운 곳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바로 나의 일터인 교실 속 내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에게. 그리고 동료 교사들에게.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이나 조손 가정 아이들에게는 먹는 것부터 챙겨주고 학습을 더 봐주고 더 자주 안아주었다. 그 아이들이 기죽지 않도록 그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멋진 장점이 많은지 알려주었다. 마음에 상처가 있는 아이들과 학부모의 이야기에는 더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편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뭔가를 더 많이 줄수록 나 역시 아이들과 학부모로부터 더 많은 신뢰와 응원을 받게 되었다. 덩달아 자존감도 올라갔다.

    

  한때는 듣는 귀는 나쁘고 마음 그릇도 작아 아이들과 학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 몰랐고, 마음을 읽는 눈도 없이 지식만 전달하려던 어리석은 교사였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해주고 마음공부를 꾸준히 하다 보니 조금씩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동료 교사들에게도 내가 가진 지식과 내가 만든 자료들을 아낌없이 공유했다. 그 행위에는 인정 욕구니 자존심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나마 내가 가진 능력 선에서 작은 봉사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어쩌면 우아한 인간은 의학박사 변광호가 「E형 인간 성격의 재발견」에서 이상적인 인간 유형으로 제시한 E형 인간이 아닐까. E형 인간은 스트레스에 유연하고 타고난 성격의 단점을 그대로 인정하되 겸손과 감사, 배려, 봉사하는 마음을 갖추려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태도를 갖춘 사람이라면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이 <무엇이 성공인가?>라는 시에서 말한 진정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 아닐까 싶다.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것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사람,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으므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하게 하는 사람.   

        

  그러고 보니 내가 되고자 하는 우아한 인간은 지식이나 교양,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마음의 평화를 주변에 전파하는 사람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에서 동훈이 안정적인 삶을 찾은 것처럼 보이는 지안을 향해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대,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나는 아직 이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 나는 “그곳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렇기도 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많이 발전했다. 이제는 부족한 내 모습도 마음의 우물에 비춰볼 용기가 생겼으니까.      


  아직까지 나는 E형 인간도 우아한 인간도 아니다. 하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 목표에 다다르리라 믿는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성격의 단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할 테니까. 힘들더라도 긍정의 에너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테니까. 타인의 삶에 작은 온기라도 건네려고 노력할 테니까.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우리의 등 뒤에도 찐 어른의 아우라가 희미하게 생기지 않겠는가. 균형을 잃다가도 곧 제자리로 돌아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 엄마로서의 열망과 헌신만으로도 당신과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 더 이상 자기 성격의 장단점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감 있게 살아가자.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꿈을 향해 나아가자. 우아함은 꾸미거나 감춰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진정한 우아함은 내 안의 긍정과 영감을 믿으며 최선을 다해 산 오늘들이 쌓여 내면에서 흘러넘친 생기가 아니겠는가. 나를 감당해줬던 사람들에게 최상의 나를 가질 자격을 주자. 어떤 성격유형이든 중년의 아름다운 그대여, 이제 진짜 시작이다. 아직 우리의 최고의 날은 오지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poem,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