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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차 Aug 04. 2020

쓰면서 나다워지는 걸 느껴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면 비교하면서 괴로워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진정으로 상처 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욕망을 양보’ 하지 않고 자신에게 충실하는 것, 내 삶에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나답게 존재하고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 샤를 페펭의 「자신감 - 단 한 걸음의 차이」 中에서-


  당신은 완전한 침묵과 고독 속에서도 기쁨을 느끼는 자신만의 동굴을 가지고 있는가? 자신이 무엇에 몰입했을 때 진정으로 기쁨을 느끼는지 알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망설이거나 대답할 수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나를 가장 나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나만이 창조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 보길 바란다. 분명 사느라 바빠서, 아이들 키우느라 시간이 없어서 동굴이니 나다움의 발견이니 하는 것은 사치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도 불과 몇 년 전까지 그랬으니까.

      

  사실 욕망은 사치 맞았다. 젊은 날에는 부모의 기대감을 짊어지고 어른들이 가라고 하는 그  길을 쫓아가느라, 부모가 되고서는 의무감을 짊어지고 앞만 보고 달리느라 뒤를 돌아볼 새가 없었다. 분명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달리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으나 ‘진정한 나’는 아니었다. 내 취향도 아닌 마라톤복을 입고 내가 편안하게 느끼지 않는 길 위에서 어쩔 수 없이 뛰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원인 모를 우울증에 시달렸고 심리적 공허감을 관계 속에서 채우고자 애를 썼다. 항상 친구들을 찾았고 그 속에서 위안을 받는다고 착각했다. 관계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에 휴대폰 대신 책을 집어 들었다. 학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에 책을 읽었고, 주말에 모임에 나가는 대신 차라리 혼자 카페에 앉아 책을 읽었다.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그들의 인정을 요구하느라, 매번 이불 킥을 할 만한 말들을 쏟아내느라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오롯이 ‘고요한 나’와 ‘고요한 책’이 만날 뿐이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냈다. 불쑥 외로움이 찾아오면 또다시 습관처럼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무방비 상태에 있는 친구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독서로 가난한 마음이 채워지자 그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오히려 기꺼이 친구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주는 여유까지 생겼다. 그때 나 자신이 얼마나 대견하던지.

     

  따라서 고독의 동굴은 꼭 필요하다. 그동안 가면을 쓴 채 마음의 창밖으로만 향해있던 시선을 돌려 민낯의 내가 마음의 창 안에 있는 내면의 나를 바라봐야 한다. 내면 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나의 관심과 빛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곳, 눌러왔던 욕망과 내가 몰랐던 가능성이 선택받기를 몸부림치는 곳, 즉 나를 나답게 해주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곳으로 가서 내가 직접 그것을 찾아 밖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참 신기하게도 외면의 나와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 두기를 하고, 내면의 나와 심리적으로 가까워지자 우울증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치유의 독서는 치유의 글쓰기로 이어졌다. 창작에 대해 어디에서 배워본 적도 없는 내가 노트에 무엇인가를 계속 끄적였다. 철학자 샤를 페펭이 ‘성장의 기쁨’은 질투라는 바이러스에 대해 백신이 되어주고 슬픔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했던가. 정말로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일이 줄어들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슬퍼하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꼼짝 않고 몇 시간씩 앉아 글을 완성해 갈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힘든 줄도 몰랐다. 백신뿐만 아니라 영양주사까지 맞은 기분이랄까? 그렇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그 무엇을 낚은 것이다.       

  


  

나만의 동굴로 계속 파고 들어가려면


  영화 <연인>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에서 한 말은 내가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배우고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겼다.     

   "굴속에, 굴 깊숙한 곳에, 거의 완전한 고독 속에 자리 잡기. 그리고 글쓰기만이 구원을 주리라는 것을  깨닫기. 책에 대해 그 어떤 주제도 없이, 그 어떤 생각도 없이 있기. 그것은 책 앞에서 자기 스스로를  발견하기, 스스로를 되찾기다."      

  

  곧바로 책 쓰기 프로그램을 알아보았다. 나만의 동굴로 파고들고 싶은 의욕은 넘쳤으나 방법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열의가 금세 시들해질까 하는 우려도 한몫했다. 책 쓰기 프로그램의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적게는 몇십만 원부터 많게는 천만 원을 훌쩍 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우선 일일 특강을 신청해서 들어보았다. 두 곳은 수강료도 너무 비싼 데다가 상업적인 냄새가 풀풀 풍겨서 내가 원하던 방향과 맞지 않았다. 돈보다는 순수하게 글쓰기에 대한 수업을 듣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첫 책 쓰기 모임으로 택한 곳이 ‘글 Ego 자아실현적 책 쓰기 프로젝트’이다. 수강료도 저렴한 편이고, 함께 글을 쓰는 동기들이 있기에 왠지 자극이 될 것 같았다. 한 주에 한 번 총 6주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글쓰기에 대한 대략적인 이론은 2시간씩 소설가 성해나 님께 들을 수 있었다. 결국 글은 혼자서 인내의 시간과 엉덩이의 힘으로 쓰는 일이지만 매주 과제를 제출하는 의무감과 작가님의 따뜻한 피드백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었다.

     

  책은 POD 방식으로 출판되었다. 이는 책 구매자의 주문이 있을 때만 책을 제작하는 맞춤형 소량 출판 시스템을 말한다. 10명의 동기의 설익은 글이 <치유 행진곡>이라는 제목 하에 한 권의 책에 담겼다. 처음에는 동기들이 모두 20대 청춘들이어서 어색했었다. 하지만 첫 책을 쓰겠다는 목적과 진로에 대한 고민은 비슷했기에 나이와 상관없이 용기와 열정을 깨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글 Ego에서 나만의 동굴을 파기 위해 곡괭이질을 조금 했다면 본격적으로 굴을 더 깊게 파기 위해 굴삭기가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좀 더 숙련되고 전문적인 책 쓰기 프로그램이 필요했던 것이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고 했던가. 우연히 네이버 카페 첫 화면에 뜬 글쓰기 카페에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해 들어가 보게 되었다. 상업적인 냄새는 전혀 없었다. 글쓰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 감돌뿐. “아무 스펙도 없는 평범한 교사인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될까요?” 바로 대표님께 전화를 걸었다. “물론이죠.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의 첫 책 쓰기> 17기 회원이 되었다.

        

  심리학자 융은 인간의 삶은 결국 자아(의식의 나)가 자기(무의식의 나)를 찾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의 책 쓰기 과정이 바로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 그 자체였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철학적 질문에 매일 리포트를 써나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무엇에 살아있음을 느끼는가?, 향후 5년 안에 하고 싶은 욕망은?, 남은 삶이 딱 일 년이 주어졌다면 어떻게 보낼 것인가?, 나의 강점은 무엇인가? 등등. 과제 하나를 하기 위해 이 책 저 책을 읽고 날을 새 가며 온전히 나를 주제로 한 글쓰기에 몰입했다. 관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내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누구죠? 먼저 나에게 대답을 해주세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일어날게요. 그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말해 줄 때까지 나는 여기서 꼼짝 하지 않을 거예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대사다. 어쩜 그동안 나도 앨리스처럼 바라 왔던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누가 대신 가르쳐주기를, 누가 와서 일으켜주기를. 그러나 내가 스스로 나 자신을 공부하고 파헤치고 그 결과를 글로 써 내려가는 과정에서 나는 자유와 자신감을 느꼈다. 넘어져 있던 내가 벌떡 일어나 “나,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거다.

 


    

   내 욕망을 부추겨주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


  그러나 내가 쓴 글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카페에 글을 올릴 때마다 내 안에 겁쟁이가 튀어나왔다. ‘내 글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으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앞섰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내 생각과 내 삶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일이니까. 그때 두려움을 떨쳐내고 계속 쓸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준 말 한마디가 있다.      

  “그대는 천상 글쟁이고, 글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소심하고 자존감이 낮던 마돈나는 무용 교사 플린 선생님이 해주신 “너는 아름답고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폭발적인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어”라는 말 한마디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한다. 슈퍼 모델 장윤주도 “얘 다리 좀 봐라. 너 범상치 않구나. 넌 커서 톱모델이 될 수 있겠어”라는 수학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모델의 길로 들어섰다고 했다.      


  그렇게 내게도 글쟁이의 욕망을 알아보고 이끌어 내주신 스승이 있다. 바로 너무도 인간적인 오병곤 사부님! 스승의 진심 어린 격려의 말 한마디는 마법과도 같다. 마음속 저항을 용기로 바꿔 놓는다. 심지어 자는 동안 나의 욕망에 자기 신뢰의 날개를 달아 놓는다. 제자가 준비되면 스승이 나타난다고 했던가. 그때 나타난 스승은 분명히 나다움을 향해 가는 여정에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줄 것이다.


  사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스승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먼저 자신답게 살았던 그들의 삶에서 나답게 해주는 무기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추억의 보글보글 게임을 기억하는가? 사탕이나 신발 아이템을 먹으면 공룡들은 힘을 얻어 움직임이 빨라진다. 더 많은 양의 버블도 쏠 수 있어서 몬스터들을 쉽게 가둘 수 있다. 이처럼 나는 스승의 삶에서 엿본 지혜를 통해 멈추지 않고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창작의 가장 나쁜 적인 두려움과 의심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득템 한 것이다.  

   

  먼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프랑스의 지성 아니 에르노는 《진정한 장소》라는 인터뷰 집에서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명백한 감정’을 가지라고 말한다. 즉 자신이 겪은 일을 다른 사람도 겪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글을 쓰라는 것이다. 그녀는 절망과 만족감을 교대로 느끼며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일, 그것을 향해 용감하게 돌진해서 마침내 원고를 완성해 낸다. 원고를 끝내고 나서 하는 생각은 ‘자, 해치웠어!’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도 손끝에 ‘확신’이라는 무기를 장착해야겠다. 다 해치울 때까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에서 마치 살아있는 알몸과 같은 글쓰기를 하라고 말한다. 절망을 버티며 아니 절망을 품고 쓰라고 조언한다. 짐승들이 밤중에 내지르는 울음, 모든 사람과 나의 울음, 개들의 울음 같은 글을 쓰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글을 쓰면서 그녀는 새로운 자아를 찾았고 생물학적 나이를 뛰어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나도 ‘절망’과 ‘울음’을 품은 채 글을 쓰며 진정한 나를 찾아서 나이를 잊은 채 살고 싶다.      


  정여울 작가는 《까르륵까르륵》이라는 월간 정여울 3월호에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 이유를 나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조금 느리고, 많이 뒤처지더라도 자신만의 느리고 소중한 글쓰기를 하고 싶단다. 인기가 아니라 진심 어린 공감과 글쓰기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문학과 심리학의 하모니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 만큼 스펙트럼이 넓고 깊이 있는 글을 쓴다. 그녀의 글은 단순한 위로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트라우마와 마주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준다. 나도 느리더라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간직한 채 글쓰기를 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쓰는 행위 자체에서 희열을 느끼면서.    



 

   아티스트로 거듭나기 


  이처럼 내 욕망을 정확히 알았고, 스승들로부터 욕망에 불을 지펴주는 무기까지 얻었다면 이제 남은 일은 노출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에 바탕을 둔 《하루 50초 셀프 토크》에는 ‘욕망 이후에는 반드시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타인에게 공헌할 수 있는 비전이 존재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 비전은 바로 아티스트가 되는 것! 자신이 창조해 낸 작품으로 누군가에게 위로나 기쁨을 주고 싶은 것이다.      


  나는 다양한 분야의 책 읽기를 통해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왔다. 치유된 자리에서 피어난 글쓰기에 대한 욕망의 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자기다움을 찾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그래서 노출을 감행했다. 바로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 브런치에서. 무관심과 거부에 대한 면역력은 5개월간 글쓰기 카페에서 출간 일기와 과제 글을 올리며 어느 정도 키웠다. 댓글의 유무와 개수에 일희일비하며 주변의 시선에 얼마나 휘둘렸던가. 그러나 나는 도전하기로 했다. 《이카루스 이야기》에서 세스 고딘은 아티스트란 자신의 노력이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잘 알고서도 과감하게 뛰어들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 아티스트가 되기로 했다.


  예술을 하겠다고 큰 소리는 쳤지만 사실 내면에서 ‘끈기도 없는 네가 과연?’, ‘전문가도 아니면서 도대체 무슨 책을?’이라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이 소리를 잠재운 건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이다.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 일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는 증거라는 것, 나에게 딱 맞는 일을 찾아 하게 되면 내 안의 초인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주제에 대한 고민은 오스틴 클레온이 《훔쳐라, 아티스트처럼》에서 한 말을 읽고 날려버렸다.


명심하라. 자신이 감상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자신이 운영하고 싶은 비즈니스를 시작하고,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을 연주하고,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쓰고, 자신이 사용하고 싶은 제품을 만들어라, 만들어졌으면 하는 제품을 당신이 만드는 것이다.     


  누구든 처음 창작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새기는 것이 좋겠다. 왜 자신이 필요로 하는 창작물을 다른 사람이 만들 때까지 기다리는가? 자신이 셀프 맞춤형 아티스트가 되면 된다.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의 주제를 잡은 뒤 글을 한 편씩 완성할 때마다 완벽하지 않아도 내 글을 사랑해주었다. 안쓰러워서 사랑했고, 정말 예뻐서 사랑했다. 내 작품이 왜 탄생하게 되었는지, 무엇을 말하려는지, 어떤 노력이 깃들어져 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에. 분명 온 마음을 다해 만든 작품이라면 어느 누군가는 자신의 고독 속에 그 작품을 초대하지 않겠는가?   

  

  아티스트가 된다는 것은 작가의 고독이 타인의 고독에게 말을 거는 일, 각자의 고독이 우연히 만나 서로를 위로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일이다. 나아가 또 다른 건강한 고독을 탄생시키는 일 즉 나의 나다움이 타인의 나다움을 끄집어내 주는 일이다.



  

   엄마로서 나다움을 찾으면 내 아이에게 가는 혜택


  나의 창조적 삶이 비단 타인에게만 영향을 미치겠는가. 나와 가장 가깝게 연결되어 있고 일상을 대부분 공유하고 있는 내 아이가 최고의 수혜자일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퇴근 후에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랫감을 널고, 개고, 집을 대충 청소하고 나서 앞치마를 두른 채 책을 읽는 모습을 매일 본다. 밤마다 모니터 화면 속 흰 종이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엄마도 본다. 운이 좋으면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도 듣는다. 그러다가 자정쯤에 “이제 그만 이 닦고 자라. 엄마는 좀 쓰다 잘 테니.”라는 말을 매일 듣는다.  

    

   언젠가 내가 “엄마가 글 쓴다고 더 많이 신경 써주지 못해 미안해”라고 말하니 아이가 이렇게 답해서 나를 감동시켰다. “엄마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집에 와서 또 집안일하고 저도 챙겨주면서도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글을 쓰잖아요. 엄마는 정말 잘하고 있어요. 대단해요. 저도 제 공부 열심히 하며 살게요.” 아이는 스스로 공부 목표와 학습 계획을 세우며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을 한다.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내가 몰입하는 그 시간에 아이도 자기만의 몰입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처럼 엄마의 나다움을 찾는 여정은 단순히 나 개인의 성장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주게 된다. 독서 습관, 끊임없는 노력, 도전 정신, 시간 활용법 등. 내 아이에게 최고까지는 아니어도 인생의 롤 모델이자 멘토가 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사실 워킹맘으로서 창작 활동을 병행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늦은 밤 컴퓨터 앞에 앉아 남은 에너지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야 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길은 있다. 이때 나를 도와줄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소환하면 된다. 우리가 깨워주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아이, 낙천성과 용기로 똘똘 뭉쳐있는 아이, 바로 융이 말한 퓨엘라(소녀)이다. 나는 최근에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인상 깊게 보고 그녀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다. 프랑스 최고의 여성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는 한 인터뷰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영화를 만드는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게는 한 가지 해결책밖에 없고, 그건 바로 ‘슈퍼우먼’이 되어 한번에 몇 가지 삶을 동시에 사는 거예요.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게 그거죠. 한 번에 몇 개의 삶을 살면서 포기하지도, 그중 어느 것도 버리지 않는 거요."     - 메이슨 커리의 「예술하는 습관」 中에서 -     

  

  포기하지도 버리지도 말자. 우리 안에 있는 퓨엘라가 슈퍼우먼이 되도록 도와줄 테니. 인생길은 쭉 뻗은 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 미로와 같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자아(ego)가 힘들게 헤쳐 왔다면 나머지 중반은 자기(self)와 함께 미로를 헤쳐 나가자.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표현대로 ‘누구도 만질 수도 없고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내 안의 무언가를 믿고 나다움을 찾아 나서자.    

  

  아직은 나를 나답게 해주는 동굴이 허름하고 볼품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그 동굴이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확신을 주기에 끝까지 가보려고 한다. 나도 아니 에르노처럼 나 자신을 제물로 바쳐 독자의 뿌리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글쟁이가 되고 싶다. 자, 이제 나는 이쯤에서 마침표를 찍고 또 다른 아이디어와 욕망과 감정들을 주우러 가야겠다. 잘 준비해야 다시 흰 종이 위에 용감하게 돌진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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