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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차 Oct 03. 2022

아빠가 부끄러웠어요

-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딸이 되자> 중에서-

  당신은 아버지 혹은 부모를 객관적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가? 여기 픽션을 거부하고 자기를 글쓰기 재단에 재물로 바친 용감하다 못해 처절하게 솔직한 작가가 있다.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해부해서 코르크 마개처럼 목구멍을 틀어막은 가장 묵직하고 은밀한 이야기를 살기 위해 토해내는 것이다. 어떠한 은유나 묘사도 없이 ‘칼 같은 글쓰기’를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글에서 진하게 배어 나오는 슬픔과 좌절은 완벽한 사실과 진실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리라. 그래서 작가 아니 에르노는 동시대의 어떠한 작가보다 당당하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헌신이었다. 몸과 마음을 바쳐 온 힘을 다해 알을 깨고 나와 뚝뚝 떨어지는 피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책을 쓰지 않았다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라고. 무엇에 대한 죄책감이었을까. 단지 아버지에 대한 마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불안과 우울, 슬픔과 번민 등으로 괴로워하며 ‘온전한 나’, ‘순수한 나’로 존재할 수 없음에 대한 ‘나 자신’을 향한 미안함이 아니었을까.     


  <부끄러움>이라는 책에는 아버지의 폭군적 행위와 노동자 계층에서 경험하는 저열하고 곤궁한 삶에 대해 아니 에르노 작가가 느낀 부끄러움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굉장히 담담하고 차갑게 당시의 상황과 감정이 서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감정에 몰입했다. “한 사건 후에 일어난 사건은 앞선 사건의 그늘 아래서 체험되는 것이다.”라는 말에서는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묘한 동질감과 함께 그녀와 나 모두를 향한 연민의 눈물이 흘렀다.    

  

  나 또한 오랜 시간 동안 내 안을 지배해 온 감정이 바로 ‘수치심’과 ‘열등감’이었다. 자기중심적이고 버럭 화를 잘 내며 폭언을 하고 완력까지 쓰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웠고 내가 존중받을 자격이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고 여겼다. 특히 다섯 살 무렵 엄마를 향한 폭군적 행위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던 경험은 그대로 내 머릿속에 선명한 사진처럼 찍혀 그 사건 이후 더 이상 아빠를 예전처럼 대하지 못했다. 아니 에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로 그 이후의 삶은 앞선 사건의 그늘 아래서 펼쳐진 것이다.   

   

  아무리 아빠가 성실하고 간혹 화기애애한 집안 분위기를 조성해도, 밝게 웃으며 내 볼에 뽀뽀를 해줘도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 인간의 존재를 종합적이고 통합적으로 바라보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다. 어리석게도 흑과 백의 논리에 갇혀 이분법적으로 아빠를 바라본 것이다. 다정다감한 모습은 거짓과 위장이고 오로지 폭군이 되었을 때의 모습만 진짜라고 여겼다. 그에게 눈물이 많은 여린 면이 있고 정이 넘치는 인간미가 있음을 그때는 정녕 알지 못했다.   

    

  자아정체성이 형성되는 초등학교 1학년 이후 친구들이나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문득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꽤 오래 심리적 불편함을 느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나는 괜찮아’, ‘우리 집은 문제없어’라고 생각하는 자기기만에 빠졌고 그것이 오래 지속되면서 커져 버린 깊은 슬픔이 무의식 속에 감춰진 것이다. 존재 자체로 존중받고 일관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친구나 선생님이 조금만 뭐라고 하면 별거 아닌데도 주눅이 들고 억울해했다. 미세한 바람에도 금방 꺼질 듯한 작고 여린 촛불 같았다.     

  사춘기를 지나고 고등학교 때부터 드디어 나는 아빠와 부딪히기 시작했다. 우울이 깊어지면 분노로 바뀐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대학 입학과 취업, 이직 등 모든 중요한 진로 문제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 고민하고 결정했다. 그로 인해 아빠의 모진 폭언들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아이가 아닌 나는 아빠에게 대들기도 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완력 앞에서는 절규하기도 했다. 아빠는 내가 왜 그랬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으셨다. 지금은 이해한다. 자신의 내면도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사셨는데 어떻게 가족이라는 이름을 한 타인의 내면을 읽어줄 여력이 남아 있었겠는가.   

   

  연애를 하고 사랑을 받는 동안에는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대체 불가능한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경험은 확실히 수치심이나 열등감을 약화시키기 충분하니까. 하지만 아빠와의 관계에서 충족되지 못한 사랑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관계에 너무 집착했다. 나의 존재 가치는 상대의 사랑을 통해서만 증명되는 것처럼 느껴졌고 나의 정서적 안정감도 상대의 손에 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젊고 아리따웠던 그 시절, 아빠를 향한 부끄러움, 나에 대한 수치스러움이 자리 잡은 내 내면은 지극히 소란스러웠고 위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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