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안 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내는 사람은 없지요. 첫 책 출간 축하드려요. 다음 책도 응원하겠습니다.” 영풍문고 종로본점에서 한 나의 첫 북콘서트가 끝나자 어느 우아하고 기품 있는 여인이 신뢰감을 주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는 길지 않은 사인회 줄이었지만 내가 처음이라 서툴러서 너무 길게 글을 쓰는 나머지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 마지막 차례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살짝 얼이 빠져있는 상태였기에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하지만 그분은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와 여유 있는 목소리로 어색할 수 있는 분위기를 물 흐르듯 편안하게 만들어 주셨다.
“이거 제가 여기 영풍에서 직접 산 제 책이랍니다. 선물로 드릴게요. 안락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가요?”
“아, 그럼요. 몇 년 전에 ‘미 비포 유’라는 영화를 보고 더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잘 읽을게요.”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구급상자처럼 생긴 살구색 책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와 책 커버처럼 심플한 명함을 얼떨결에 받고 기분이 묘했다. ‘아, 작가로서 고작 한 발을 뗀 초짜인 내가 중견 작가분과 뜻밖에 인연을 맺다니. 삶은 참 신기하기도 하지.’ 그렇게 나는 얇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스. 안. 다.>를 만났다.
이 책은 신아연 작가님이 암으로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한 독자분으로부터 스위스 조력사 여행에 동행해 줄 것을 제안받은 어느 날의 기록으로 시작한다. 조력사로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죽음 여행의 동행자로서 느낀 생생한 기록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나 또한 그 여행의 일원이 된 듯해 오만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글을 읽는 내내, 읽고 나서도 힘이 들었다. 이 여행에 동참하는 게 맞는지 끊임없이 올라오는 의구심과 신의를 지키려는 마음, 끝까지 하나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체념 사이를 오가는 글쓴이의 마음의 동요에 나 역시 어지러웠다.
그리고 이 여행을 기획한 주체자이자 안락사의 여정을 선택한 그분이 하신 말씀, “무지막지한 통증을 참느라 침대 매트리스가 온통 젖을 정도로 진땀 흘리던 때가 있었지요. 내가 그렇게 아파보지도 않고 이런 결정을 한다면 자살과 다를 바 없으니까...” 이 말에 가슴이 미어지면서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상상조차 하지 못할 그 고통을 어찌 감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수천수만 번의 고뇌를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그의 절체절명의 선택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단 말인가.
<미 비포 유> 영화에서도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주인공의 선택에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대사가 있었다. “난 내 인생을 사랑했어요. 진심으로요. 난 이 삶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당신이 옷을 입었든 안 입었든 손 하나 까딱 못하고...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거야. 내가 어떤 심정으로 당신을 바라보는지.” 그가 느꼈을 참담함을 어떤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다이내믹한 스포츠를 즐기며 자신의 삶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녀를 만나기 전의 그는 더 이상 없다. 휠체어에 갇힌 채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심지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마저도. 그토록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이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이성적인 사고’를 유지하며 ‘인간답게’ 살아낼 수 있을까.
<미 비포 유 영화 속 장면>
어쩌면 그들이 안락사를 선택하기까지 했었을 수많은 질문들 중에 니체가 던진 질문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삶을 똑같이 반복해서 살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 병이든 극심한 고통이든 장애가 없는데도 매일 자신을 극복해 나가고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며 ‘반복하고 싶은’ 삶을 만들어 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하물며 더 나아질 수 없다는 걸 의사들도 알고 자신도 아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극복은커녕 어떤 발전을 모색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이 삶을 사랑하며 버텨내는 건 희망고문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교든 영적 체험을 통해서든 ‘기적’을 믿어 보자고 말하고 싶다. 물론 “네가 그 고통을 알아? 모르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니체의 말을 빌려 다시 설득하련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고. 이 문장을 매일 쓰고 말하고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어 내면에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고,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북돋아 주고 싶다. 의식이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바람을 외면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스위스행 티켓의 유효기간을 조금만 더 늘리자는 얘기다.
스위스 조력 자살 단체인 디그니타스의 회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마지막 선택권이 주어지자 역설적으로 삶에 최선을 다하게 됐다는 거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무에타이도 계속 배우면서 오히려 더 도전적인 삶을 사는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스스로 설계하고 나면 오늘 하루도 더 알차게, 최선을 다할 수 있어요. 저는 그걸 보여 주려는 거예요.” 바로 이거다.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이라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을 고통이란 없다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한 번만 더 발휘해 보자는 거다.
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 볼 것을 권유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잘 나가던 프랑스 잡지 <엘르>의 편집장이던 장 도니미크 보비! 그는 42살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왼쪽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그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왼쪽 눈꺼풀을 이용해 위대한 자유를 창조해 낸다. 15개월 동안 무려 20만 번 이상의 눈 깜빡임으로 알파벳을 지정하여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을 완성한 것이다. 내면의 힘인 ‘상상력’과 ‘기억’을 동원하여. 이처럼 자기 긍정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그 무엇에 온 에너지를 쏟아붓는다면 고통도 이 위대한 과업에 동참해주지 않을까.
며칠 동안 안락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이런저런 글들과 책과 영화를 보았다. 그들의 선택에 비난이나 동정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다만 죽음의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는 현명한 판단을 하도록 주위에서 최대한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그 비행기에 오른 분들에게는 루이스 헤이가 『치유수업』에서 한 말로 그들의 선택에 깊은 존중과 따뜻한 애도를 보낸다. “우주는 영혼을 잃어버리거나 깜빡 잊거나 잘못된 장소에 놓지 않습니다.”
죽음을 공부하다 보니 결국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니 후회 없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이 삶을 어떻게 최대한 열심히 살아갈까?’라는 질문이 남았다. <미 비포 유>에서 윌이 사랑하는 루이자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속 응원의 말을 기억하자. “대담하게 살아요. 끝까지 밀어붙여요. 안주하지 말아요.” 그러자. 누가 뭐라고 하든 범블비 스타킹을 신고 당당하게 삶에 뛰어 들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한 번 더!’라고 외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