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윤도현의 ‘흰 수염고래’와 이하이의 ‘한숨’에 꽂혔다. 오후에 텅 빈 교실에서 멍하게 앉아 듣고 또 들었다. 서이초 선생님의 추모 집회에 참여했을 때 광장에서 들었던 노래로 왠지 음악으로나마 나름의 추모를 이어가야 할 것 같은 기분에 그렇게 했다. 그날 이후 설명할 수 없는 불편감이 마음을 누르고, 입맛도 없고, 일은 손에 잡히지 않은 이상 상태가 이어졌다. 살아남은 자의 스몰 트라우마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 똑같은 교육환경에서 또 다른 죽음을 들으며 부정적인 감정들이 꼬리를 물고 올라왔다. ‘나는 올해 그 정도의 악성 민원은 없으니 다행이다.’라는 안도감과 함께 한편으로 그런 행운을 가졌다는 자체만으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무엇보다 악성 민원으로 매일 힘들어했던 과거의 기억과 ‘내년에 그런 학부모를 만나면 어쩌지?’라는 미래의 불안까지 연합하여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며칠 전, 이번에는 동료 교사의 한숨과 마주했다. 그 반에는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배의 관심을 쏟아야 하는 두 명의 아이가 있다. 간혹 힘들어하긴 했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씩씩하고 열정적으로 반을 꾸려 갔다. 그러다 학폭이 터진 것이다. 학부모의 일방적인 고소와 고압적 태도로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긁어 부스럼이 되었다. 워낙 야무지고 노련한 그녀지만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입은 듯했다. 그래서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잠시나마 그녀의 마음속 응어리를 털어놓을 자리를 마련했다. 그저 들어주고 싶었다. “며칠 동안 정말 한숨도 못 잤어요. 왜 그 선생님들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저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너무도 이해가 갔다. 교사들은 학급에 힘든 일이 있어도 잘 티 내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비칠까 봐. 그것이 자신의 취약한 점으로 받아들여질까 봐. 애써 담담하게 털어놓는 그녀의 모습이 슬프도록 당당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다독여 왔을지 짐작이 갔다. 예전에 나도 그랬으니까. 웃는 얼굴로 아이들 앞에 서기 위해 눈물을 닦고 ‘괜찮아’와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수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용감했다. 발 빠르게 학교에 상황을 보고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개인적인 심리상담도 신청했다. 죽도록 힘들 때 무작정 참고 견디는 게 능사는 아니란 걸 이번 사태로 안 것이다.
두 시간 남짓한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 내부에 선생님들의 아프고 힘든 경험을 편안하게 터놓을 ‘슬픔 나눔 공동체’ 같은 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위에는 이미 수차례 ‘그 강’을 넘어왔고 나름의 지혜와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선생님들이 많다. 이제 진짜 나눔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 선생님은 어떻게 살아남으셨나요?”라는 물음과 함께. 상처 입은 선생님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내부 사정을 가장 잘 알아서 함께 머리를 맞대줄 따뜻하고 현명한 ‘사람 1393(자살예방상담전화)’인 것이다. 학부모와의 소통의 문제로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감과 무력감이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과 막막함으로 희망을 잃지 않도록 곁에서 긴급처방전을 내려줘야 한다. 그 차디찬 책임감이라는 녀석을 홀로 감당하지 않도록.
학부모 또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 아이를 멸균상태에서 길러내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정녕 완벽한 환경에서 자식을 키울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완벽하게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완벽한 부모인가? 완벽한 가정환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갑질과 악성 민원까지 불사하며 한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부모를 자식은 ‘나를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 부모라고 생각할까? 그 충격이야말로 정서적 학대가 아닐까?
나도 한때 내 자식에 대한 특권의식을 가졌던 오만한 부모였고 그로 인해 부모와 자식 모두 올바른 성장을 할 수 없음을 경험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부모로서 자식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다. 다만, 부모가 자식에게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용서와 화해의 과정을 보여주는 성숙한 태도, 잘못을 인정할 용기, 작은 상처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마음가짐 등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제발 한 번만 생각하자. 내 자식이 금지옥엽으로 귀하듯 교사들도 그들의 부모에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딸(아들), 별로 해준 것 없어도 착하고 반듯하게 자라줘서 미안하기까지 한 귀한 자식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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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어딘가에서는 갑질과 악성 민원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제 카뮈가 영원히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운명을 지닌 시시포스를 통해 전해 준 부조리를 대하는 태도를 장착하자. 하나는 갑질에 굴복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뭣이 중헌디의 마음으로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반항정신’이다. 또 다른 하나는 ‘무심함’이다. 『나를 살리는 철학』에서 다음과 같은 통쾌한 글을 만났다. “그 누구도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고 선언하라. 나를 향한 어떤 공격도 그 근거가 내 안에 있지 않음을 명확히 인식하라. 상대방의 상처받은 자기애와 자만을 내 문제로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굳이 그들 내면의 문제로 떠들어대는 말에 휘둘리지 말자. 감정은 둔감하되 생각은 명료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 주변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면서. 마지막은 ‘삶에 대한 열정’이다. 이때 필요한 게 자기 사랑과 자기 신뢰다. 어떤 악성 민원에도 쓰러지지 않고 계속 나다운 삶을 불태울 연료이자 백신.
다시 ‘꿈꾸지 않으면’을 듣기 시작했다. 들을 때마다 가슴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학교는 항상 ‘꿈’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게 없으면 사는 게 아니니까.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걸 수십 번 들으며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더 이상 약한 생각 하지 말고 살아남은 자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과거보다 더 대담하게 세상 속으로 뛰어들자. 그래야 그 ‘희망’이라는 녀석을 노래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을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