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모두를 위한 그림책테라피
루이스 부르주아 전시장 입구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침을 크게 한 번 삼키고 숨은 세 번 정도 들이마시고
내쉬 고를 반복했다. 누군가의 내면세계로 초대받
은 기분. 작가의 불안이 내 안의 불안을 건드렸다. "괜찮으시겠어요? 마음의 준비는 되셨나요?" 그녀가 묻는 것 같았 다. 작은 의식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You abandoned me!
공격적이면서 파괴적인 조각상과 설치 미술품들을 보는 내내 짙은 회색 공간에 흐르던 또 다른 잿빛 예술 작품. 이 노랫말에 꽂혔다. 음울한 바이올린 선율 위에 한 여성이 단조로운 음으로 부르는 자기 고백적 어조의 노래. 아버지의 부정에 대한 배신감과 어머니의 묵인은 어린 부르주아에게 버려진 감정을 불러온 것이다. 그 감정은 보호받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공격성을 지닌 서로 상반된 양가감정을 지니게 했다.
“오이디푸스 시기에 나는 결코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그녀의 고백은 아마도 많은 딸들이 공감할 부분일 것이다. 어린 시절 질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엄마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사랑의 대상인 아빠를 증오하게 되는 사건은 크든 작든 경험할 수 있는 거니까. 그녀의 기억 속을 함께 걸으며 이따금 심장이 아릿하고 조여
왔다. 내 무의식의 문이 열리고 두려움에 떨었던 어린 나와 마주한 느낌. 천천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맞다. 그녀가 지독할 정도로 날 것 그 자체로 형상화한 감정들이 그녀만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부르주아만
큼이나 상처를 파고 넓혀서 밖으로 끄집어내는 작가인 아니 에르노는 <진정한 장소>에서 이렇게 말하며, 경험 의 특수성이 아닌 그것의 형언할 수 없는 보편성에 대해 언급한다. "그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러니까 저에게 만 일어난 일이 아닌 거죠.". 이러한 그녀들의 확신 덕분 에 지금 우리가 예술의 쓸모를 누리는 게 아닐까.
그녀의 말년의 작품들에서는 밝고 평화로운 기운이 깃 들여 있었다. 특히 꽃 작품. 그녀의 해설이 말해주듯, 드디어 치유의 최종 단계인 용서에 이르렀음을 보여준 다.
“꽃은 나에게 있어 보내지 못하는 편지와 같다. 나는 아버지의 부정을 용서해 주고, 어머니가 날 버린 것을 것을 용서해 준다. 또한 아버지를 향한 나의 적개심도 사그라지게 한다. 꽃은 나에게 있어 사과의 편지이고 부활과 보상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나는 공격성에서 답을 찾았다.
자신을 불편하게 했던 이 감정이 오히려 고통스러운 감정의 괴물과 대적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지 않았 을까. 조각가로서 자기 방식대로 조각 내고 절단하고 비틀고 꼬고 찢고 꿰매면서.
집에 돌아와 가족이라는 관계를 되돌아보았다. 어쩌면 그 시절 우리는 가족이라는 무거운 이름 하에 부모에게 과하게 기대하다가 실망하고 결국엔 말 못 못하고 삐진 게 아닐까. 그런데 부모가 되고서야 알게 되지 않았나. 부 모 역시 자신만의 상처와 한계를 지닌 불완전한 존재임을. 부모라는 무게를 버리고 자유롭고 싶기도 한 욕망의 인간임을. 그럼에도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약한 존재임을. 그리고 어린 나의 상처가 자기중심적인 해석일 수 있음을.
이번에 떠올린 그림책은 이처럼 가족이라는 무게감을 덜어내고 밥을 같이 먹는 '식구'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자는 느낌을 주는 책.
이현민 글, 그림의 <토라지는 가족>이다.
어떤 이유로 밥상머리에서 가족은 잠시 해체된다. 보편
적으로 가정에서 종종 일어나는 광경이다. 가족 구성원
모두는 각자도생식으로 자신의 토라짐을 해결한다. 그
리고 다시 모여 아주 맛있게 식사를 하며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배고픔을 해소한다. 가족 내 상처가 자라나기 전
, 단순 명료한 해결 방법으로 신박하기까지 하다.
사실 토라짐의 감정은 공격성을 품고 있다. 그 공격성이
자신과 남을 해치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고 상처를 아물 게 하려면 그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오은영 박사는 나 를 지키기 위해 공격성을 발달시키라고 하면서 가족관 계에서 부모님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라고 말한다. 부모 님의 반응이나 답에 관계 없이. 대신 격분하지 말고 좋 게. 그러면서 이걸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서는 혼자 중 얼중얼 연습을 많이 하라고 덧붙인다. 나 또한 이 연습 을 참 많이 했다. 억압된 공격성을 혼자 말과 글로 풀어 내며 부르주아처럼 용서에 이르렀다.
이제는 공격성의 건전한 발현의 중요성을 안다. 그래서
딸아이가 아주 가끔씩 드러내는 공격성을 환영한다. 반
짝이는 송곳니를, 날카로운 눈흘김을, 문 좀 닫아달라는 뾰족한 요청을. 이번 전시 작품 중 <아버지의 파괴>를 보며 딸 아이를 위해 한 가지 꼭 지켜야겠다는 약속이 생겼다. 절대 손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외모를 지적하지 말 것! 여기에서 생긴 토라짐은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
도 해결 불가다. 아이에게 덧없고 영원한 트라우마를 남겨줄 수 있으니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