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모두를 위한 그림책테라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동네 공원>을 읽던 도중,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저자 백세희 작가의 비보를 기사로 접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모호하고 쉼 없이 이어지는 대화체에 몰입하느라 애를 먹던 차였다. 누구의 대사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궁여지책으로 젊은 여자의 말에 빨간색 볼펜으로, 남자의 말에는 파란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독서를 이어갔다. 그렇게 해야 혼란한 감정이 정리될 것 같았다.
궁금했다. 백마 탄 왕자만이 구원이자 희망이라고 믿는 판타지를 가진 젊은 여자, "일단 누군가 저를 선택해야 해요. 그렇게 해서 전 달라질 힘을 내게 될 거예요."라고 말하는 이 여자의 수동적이고 우울한 사고의 틀을 그 남자가 깨줄지. 삶의 의욕이 없는 허무주의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는 신문을 읽으며 기분 전환과 몰입을 동시에 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매일 아침 노래를 부르며 면도를 하고, 살아 있는 거 자체가 너무 즐거워서 희망을 안 가져도 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그는 '지금'에서 소소한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지혜는 있으니 말이다.
책을 읽을수록 젊은 여자가 삶의 애환을 털어놓으면 나이든 남자가 인생 선배로서 위로와 작은 조언을 건네는 대화체 방식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하면 젊은 여자와 백세희 작가의 인물상은 모두 우울하고 의존적인 면이 닮아있었다. 사실 진짜 닮은 건 이러한 증상에 취약해지는 착한 사람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고, 타인의 고통을 깊게 느끼는 공감 능력과 화를 잘 참는 인내심이 발달한.
이 착하고 여린 그녀들은 그럼에도 작은 희망이 있는데 그마저 같았다. 사랑! 젊은 여자는 살면서 한 번은 긍정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했고, 백세희 작가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고 했다. 의심 없이 편안하게. 그녀들의 마음 안에는 상처로 인해 사랑이 채워지기 무섭게 빠져나가는 구멍이 있었을 듯싶다. 상처는 우리의 욕구를 좌절시키는데 먼저 부모의 학대나 타인의 비난 등에 의해 이루어지고, 다음으로 스스로 욕구를 억압하고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한 번 더 욕구를 좌절시킨다. 마음의 구멍은 이처럼 좌절된 욕구로 인해 방어기제가 점차 손상되면서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과거에 그 균열을 감지하고 그것을 메울 대단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 믿었다. 구멍에 딱 맞고 으리으리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금두꺼비. 이젠 안다. 내 구멍을 메우는 건 금빛 구원이 아니라,
소소하고 값싼 플라스틱 두꺼비들라는 걸. 작고 허술하지만 계속 바꿔 끼울 수 있는 위로의 장치. 지루하고 지겨워지면 빨리 다른 플라스틱 두꺼비로 바꾸면 되는 거다. 잠시나마 마음의 구멍을 메우고 숨구멍을 열어주는, 그런 작은 기분 전환처럼.
그건 마치 젊은 여자에게는 춤이고, 백세희 작가에게는 떡볶이인 것이다. 춤은 젊은 여자가 추는 동안 자신마저 잊어버리게 하지 않았나. 떡볶이는 죽고 싶지만 우선 먹고 보자는 생의 감각을 일깨워주지 않았나. 이토록 사소하고 값싼 두꺼비가 삶을 버티게 해 준다면 더 많은 플라스틱 두꺼비를 연구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한 잔의 향기 좋은 아메리카노, 빵 한 조각, 한 편의 시, 그림 한 점, 정신을 번쩍 깨우는 마지막 찬 물줄기, 입을 때마다 기분 좋아지는 나만의 찰떡 옷,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쩌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거창한 구원이나 진리의 깨달음이 아니라, 반복되는 미세한 위로들의 합이지 않겠나.
취향이 확고해지고 다양해지면 다른 누군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위로할 줄 알게 된다. 내가 그랬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욕구를 더 챙기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나를 덜 신경 쓰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된다. 여기 어리지만 이런 삶의 지혜를 깨닫고 실천하는 7살 아이가 있다.
다비드 칼리 글, 클로틸드 들라크루아 그림의 <난 나의 춤을 춰>를 보자.
오데트는 치즈를 듬뿍 얹은 볼로네제 스타게티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작가가 있을 정도로 책읽기도 좋아한다. 특이하게 꿀벌 옷을 입고 음악을 크게 틀고 거울 앞에서 춤추는 것도 즐길 줄 아는 나름 취향이 있는 아이다. 이랬던 아이가 날씬해져서 인기를 얻고 싶어 먹는 즐거움을 포기한다. 하지만 초콜릿 앞에서 참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운이 좋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교실에서 만나게 된다. 아이는 작가가 케이크라면 사족을 못 쓰고 몸집이 엄청 크지만, 모두를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에 반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아이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에 집중하고, 자신의 욕구도 존중해준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처럼 볼로네제 스파게티에 치즈를 잔뜩 얹어 먹으면서. 통통한 몸매를 드러내 자신만의 꿀벌 춤도 추면서 말이다.
그게 어쩌면 건강한 삶 아닐까. 내일의 즐거움을 기다리느라 무기력하게 있지 않는 것. 지금 여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 즐기는 것.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것. <동네 공원>에서 나이든 남자가 말했듯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일상의 자잘한 어려움과 희망 앞에서 누구는 용기 있게, 누구는 비겁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때 자신의 감정 상태와 몸의 리듬에 맞춰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거다. 인생에 정답은 없으니까.
5년 전, 백세희 작가의 책을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었다. 혼란스러운 내 감정의 이름과 원인을 찾고 해결책까지 단돈 만 몇천 원에 얻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다시 그 책을 꺼내 읽으며 그녀의 마음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나는 충분히 열심히 살았다."라는 그녀의 고백 앞에서 마음이 무너졌다. 정말 그랬을 거니까. 마음의 구멍 사이로 새어 나가는 에너지를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을 테니까.
책의 마지막에서 그녀가 품었던 희망을 곱씹어본다. 감정의 파동을 삶의 리듬으로 여기며 즐기고 싶다던, 어둠 속에서 발견한 한 조각의 햇살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던, 그녀의 바람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실현해나가는 것이 그녀의 뜻을 기리는 일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집착 없이 가볍게 다짐해본다. 감정의 롤러코스터 속에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돌보는 걸 잊지 않겠다고. 사는 내내, 나만의 소소하고 값싼 플라스틱 두꺼비를 찾아 나서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