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랑 같이 용산 후암동 임장 가실래요?

365 모두를 위한 그림책테라피

by 고은혜

하나도 안 변했다. 용산 말고 내가. 후암동에 있는 자작나무 책방에서 '김사인 시인'이 무슨 토크를 하신다길래 뇌는 따 시키고 튀어나온 심장이랑 덜덜 떠는 손가락끼리만 눈을 맞춰 신청서를 작성하고 참가비를 입금했다. 드디어 그날. 혹시나 심장이 멋대로 불타오를까 물도 챙겼다. 처음 가보는 후암동. 그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어른 소년. 그의 미소를 떼어다가 내 입가에 붙이고 싶었다. 주름 사이에는 수줍음과 당당함이 적당히 시소를 타고 있었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가끔 머리를 긁적이실 때는 내가 그 어휘가 되고 싶었다.

사실 용산의 역사니 변천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관심이 가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다. 단지 김.사.인. 시인님이 용산에 대해 이야기하시기에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듣다 보니 재미있기도 했다. 역시 좋아하는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과목은 점수가 잘 나올 수밖에 없는 이치다. 그중 세 명의 인물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고아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돌봐주었다는 영락보린원의 '소다 가이치'라는 일본인.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가 조선이라는 이유로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이 나라에 왔다가 고아들의 자비로운 아버지가 된 사람. 이야기를 듣자마자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하얀 천사의 날개가 그 분의 턱에 길게 자라나 있었다. 대부분의 일본인이 식민지의 나라에서 일확천금을 꿈꿀 때 어떻게 순수한 박애주의를 실천할 수 있었을까. 난세에는 하늘에서 영웅만 보내주는 게 아니라 천사도 보내줌이 틀림없다.

<네이버 이미지- 소다 가이치>

1930년대 조선일보 만평에 실린 한 젊은 여성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나는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사람이면 일흔 살도 괜찮아요.". 꽤 자극적인 풍자다. 당시 서구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후암동 일대에는 고급 서양식 주택이 들어섰다고 한다. 근대 문화를 접한 모던 걸들의 눈에 전기와 수도, 수세식 변기가 있는 세련된 집에서의 결혼 생활이 로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기사가 조금 불편했다. 일부 젊은 여성의 치기 어린 순수한 열망을 기생과 허영으로 과장하여 폄하한 것 같으니 말이다. 젊은 남성들도 과도하게 대출하여 문화주택에 투자하는 바람에 패가망신한 경우도 있었다는데 인간의 속물근성 잣대를 여성에게만 들이댄 것은 아닌지. 그나저나 그 옛날에도 영끌 문화가 있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독립투사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숙연해진다. 부끄럽지만 이번에 알게 된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홀로 일본 군경 1000명과의 격전 끝에 마지막 남은 총알 한 발로 자결하며 임시정부 요원들과 작별할 때 했던 말을 지키신 분.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가 몸을 숨긴 매부 고봉근의 집 앞을 지나는 동안, 화약 냄새가 코끝을 진동했다. 운이 좋게 현 시대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끔찍했을 그 시절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상상해볼 수는 있지 않은가. 그가 담을 타고 다니며 총격전을 펼쳤을 영화 같은 장면을. 두려움 없는 기개를 가지셨던 분이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불현듯 또 부끄러워졌다. 끔찍한 현실이었는데 스크린 안에서 펼쳐진 영화처럼 상상해서.

이러다가 곧 어두워질 것 같아요. 누군가 그만 투어에 나서자는 말에 착한 시인님은 내가 너무 말이 많았지요.라며 토크 자리를 정리하고 앞장서셨다. 용기 있는 자는 끊기도 적절한 타이밍에 참 잘한다. 고맙게도. 그런데 후암동 동네 걷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던 차에 이 어리석은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해 준 목소리가 있었다. 점점 붉게 부풀어 오르는 내 오른쪽 귀. 걷는 내내 얼굴만 해지고 뒤로 젖혀진. 내 귀를 이 모양으로 만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박.연.준. 시인'이었다. 모두 일어서서 서점 밖으로 나가려고 줄을 서 있는데 팟캐스트에서서 들어 본 적 있는, 가늘고 소녀스러운 설렘과 떨림이 살아있는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심장도 막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듯 했다.


그때부터 갈까? 말까?가 아닌 할까? 말까?로 고민이 바뀌었다. 우선 찬물을 한 모음 들이켜 진화 작업을 했다. 그리고 두 번 심호흡을 한 뒤 "안녕하세요. 박연준 시인님이시죠?"라며 말을 건넸다. 그 다음은 뭐냐고? 없다. 이게 끝이다. 그렇게 툭 한 마디 던지고 도망가지 않은 게 다행이다. 팬이에요. 하고 말하지 그랬냐고? 상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자 수필가다. 상투적인 말 말고 싱싱한 말을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나 찾지 못했고 어색한 말만 주고 말았다.


<모월모일>부터 그녀의 산문집을 세 권 가지고 있고, 당신의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을 때때로 꺼내 먹으며 언어 앞에서 다소곳해지고 겸손해지며 커지는 자의식을 잠재운다고. 당신의 시에는 수줍은 연분홍 소녀, 사랑에 빠진 꽃분홍 어린 여자, 농염하고 지혜로운 어른 여자가 함께 살고 있다고. 이 말들이 쓰디쓴 약처럼 입안에서 맴돌았다. <모월모일>속 시 창작 수업에서 그녀가 했던 말, "왜 다 말해줘요 듣고 싶지 않은데, 왜 안 말해줘요 가장 중요한 것을" 그 말 뜻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모자란 사람이라서 말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왜 이렇게 시인을 좋아하고 시집 한 권은 꼭 가방에 넣고 다니려고 하고 영양제 챙겨 먹듯 수시로 시를 눈과 입으로 읽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떠오른 그림책.


박완서 글, 이성표 그림의 <시를 읽는다>.

시그림책의 장점은 각 장에 적힌 글이 적은 만큼 시구와 그림 각각에 오래 머물며 느리게 읽게 된다는 것이다. 간이 심심한 나물을 씹듯 재료 본연의 맛을 음미하며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 그림 모두, 다 보여주지 않으니까. 콧대 높아서가 아니다. 시와 그림 속으로 더 들어오라는. 자신을 진실로 이해해주길 바라는 조용한 부탁이자 초대인 것이다.


이 책에는 박완서 님이 시를 읽는 네 가지 이유가 소박하고 고급스러운 질그릇에 정갈하게 담겨 있다. 그중 두 가지 이유가 마음에 와닿는다.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는 말. 정말 그렇다. 시는 내게도 안갯속을 헤맬 때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준 조용한 손이었고, 나약해지고 느슨해졌을 때 벌떡 일어나게 해준 일침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시를 읽는 진짜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 시인의 정신을 닮고 싶기 때문은 아닐른지.

김사인 시인은 <시를 어루만지다>에서 시인은 가장 순결한 형식으로 시를 섬기는 사람, 하잘것없는 글 몇 줄에 자신의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이 혼탁한 세상에 그들의 순수를 마지막까지 쥐어 짜낸 정수를 부어 조금이라도 맑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착한 사람들! 아무리 세속적이 되더라도 본디 우리 안에 있는 착함 한 조각은 쥐고 가고 싶은 건 욕심일까.


해방촌에 도착했을 때쯤, 비로소 내 귀와 심장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박연준 시인님은 더 이상 무리에 없었고, 10월의 쌀쌀한 밤공기가 짝사랑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처럼 108계단 옆 승강기를 함께 타서였을까. 처음 만난 사람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초승달을 보고 함께 감탄하며 사진을 찍고, 근처 베이커리에서 산 단호박 카스테라를 손으로 떼어 나눠 먹었다. 김사인 시인님이 사주신 귤도 나눠 먹으며 우리는 아주 조금 달콤해졌다. 작고 동그란 귤 하나가 제법이다. 느슨한 관계를 부담 없이 이어주는 연결 장치가 되어주었으니까.

이렇게 나의 첫 후암동 임장은 만족스럽게 끝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책이 예쁘게 디스플레이된 책방이 있는 곳, 좋아하는 시인님과 두 시간 남짓 딱 적당한 걷기 여행을 할 수 있는 곳, 볼거리가 풍부하고 역사적 현장을 걷는 느낌을 주는 곳, 그리고 운이 좋으면 좋아하는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곳. 이만하면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지 않은가. 딱 하나 아쉬운 건 바로 나였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뚝딱거리고 얼어버리는 나. 말 한 번 붙이고 싶어 집에 있는 시집을 사서 들이미는 나. 다음에 이 시인님들을 만나게 된다면

"사인 좀..." 이런 거 말고 한 번은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진짜 많이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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