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 백온유
직장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근거 없는 홀가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매일 같이 몰려드는 학생들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공문들. 스트레스로 늘어나는 살과 머리카락이 빠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일탈이라 믿었다.
그만두면 어디로 여행을 가야지. 이런 걸 먹어야지. 부모님과 혹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야지. 자격증을 따야지. 다시는 이런 회사에 들어오지 말아야지. 등등. 나는 내 미래를 응원하고 있었고, 막연한 위로를 주려고 하는 수필집처럼 새롭고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부서진 건 퇴직하고 한 달이 조금 넘어서였다. 퇴직한 후, 나의 일상을 나열해 보자면. 친구들을 왕창 만나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넷플릭스나 왓챠로 영화를 보고, 근교로 여행도 다니고. 온종일 잠만 자기 등등. 게으름이 의인화되었다고 하면 그 모습은 아마 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딱 한 달이 지나니, 커다란 불안감이 내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현실은 여전히 코로나 때문에 취업이 힘들었고, 마음먹고 해 보려던 공부도 잘되지 않았고, 노는 것에 집중하느라 소설은커녕 글을 쓰지도 않았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이력서를 제출해 보았지만,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 따위는 받지 못했다. 혼자 멍청하게 삶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과 점점 떨어져 가는 통장잔고를 보며 내 성격은 극도로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그 예민함은 주변 사람들까지 건드리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은 같이 살고 있는 외할머니에게로 쏟아졌다.
우리 가족은 총 네 명으로 부모님과 외할머니, 그리고 나였는데, 부모님은 맞벌이하시기 때문에, 집에 일찍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고, 할머니는 고관절이 좋지 않으셨기 때문에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시곤 하셨는데, 코로나 시국이 겹치면서 나와 할머니는 같이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내가 집에만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자주 잔소리를 하였고, 자주 도가 지나치게 잔소리를 하던 탓에 우리는 가끔 싸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할머니와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
「어떻게 그렇게 작위적이고 더럽게 운 나쁜 일이 있을 수 있지, 하고 나는 종종 곱씹는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었다.」
<유원> - 백온유
할머니는 예전부터 청력이 좋지 않았는데, 이명이 있어서 보청기를 하니 마니 하는 얘기가 나오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보청기가 하기 싫다는 이유로 엄마의 제안을 무시했었고, 그로 인해서 TV를 엄청나게 크게 틀어놓고 시청하시거나 대화를 할 때 소리를 지르듯이 말을 하는 버릇이 생겨버렸던 것이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공부하던 도중에도, 책을 읽을 때도 할머니의 TV 소리와 목소리는 내 신경을 어지럽혀 놓았고, 설상가상으로 할머니가 주무시면서 코를 골기 시작하면서(나와 할머니는 같은 방을 썼다) 내 예민함을 극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날부터 할머니와 나는 싸우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싸웠다고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내가 화를 내고 할머니는 아무런 말 없이 TV 볼륨을 줄이는 그런 삶이 반복되었다. 화를 내고 나면 후회가 미친 듯이 몰려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화를 내고 사과하고 하는 일상이 반복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할머니의 귀가 하루아침에 좋아질 순 없었고, 코를 고는 문제가 하루아침에 나아질 순 없었으니까. 서로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계속 싸우다 보니 어느샌가 할머니와 나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서로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는 TV를 보고 있는 할머니를 보며 내 마음속의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취직해야 한다는 강박과 할머니에 관한 죄책감. 하루하루 죄를 짓고 살아간다는 마음이 나를 옥죄어 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만 이렇게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 모두가 행복해도 나는 불행할 것 같은 그런 느낌. 엄마는 할머니가 나이가 들어감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할머니의 잔소리는 나뿐만 아닌 엄마와 아빠에게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아빠와 나를 불러서 할머니를 우리가 이해해 보자고 말했다. 몸도 성치 않은 채로 매번 집안일을 도와주시고, 내가 아팠던 시절 한걸음에 달려와준 과거를 생각하며 할머니를 이해해 보자고 말이다. 이제 얼마 살날도 안 남으셨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는 마음이, 죄책감이 우리들의 마음을 짓누를까 봐 무섭다며 말이다.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가게 했다.」
<유원> - 백온유
나는 생각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녀가 있던 자리를 쳐다봤을 때 후회가 남을까 후련함이 남을까. 답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 대화할 땐 천천히 조금 큰 소리로 말을 걸거나 대답했고, 할머니를 설득하여 보청기를 하러 가기도 했다. 화가 나는 순간에 할머니에게 가서 조곤조곤 상황을 설명하였고, 할머니가 시청하는 프로그램을 같이 보며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할머니와 우리 가족의 모습은 작지만 크게 변화했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많은 잔소리를 하지 않았고, 우리 역시 할머니와 싸우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물론 그렇게 된 것이 부모님과 나만의 노력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노력했던 것만큼 할머니도 노력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년 여름. 외삼촌은 앞으로 할머니를 본인이 모시겠다고 말했다. 그는 거창에 집을 짓고 있으니 추석 때쯤 할머니를 모시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집을 떠나는 날. 우리는 그녀의 짐을 챙기고 배웅을 하기 위해 주차장에 모였었다. 할머니는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직장 열심히 다니라는 말을 하고 차에 올랐다.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할머니를 보며 우리 역시 밝게 인사했고, 엄마와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조금 울었다. 과거에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그녀에게 화를 냈을까. 왜 할머니를 이해하려고 하진 않았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했던 모든 잔소리들은 나를 향한 사랑이었고, 내가 노력한 만큼, 아니 혹은 그 이상으로 할머니 역시 나를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나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같이 살 때는 그렇게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던 할머니의 말들이 요즘은 그 누구의 말보다 귀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끝에는 매번 같은 말을 하며 통화를 끊곤 한다.
"사랑해요."
"그래,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