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과 절망이 지나간 자리

by 글로 쓰는 바람

어릴 적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할머니가 자주 흥얼거리시던 문주란 님의 노래,
“때는 늦으리~”라는 가사가 함께 떠올랐습니다.

그저 흘려듣던 노랫말이었지만,
나중에 그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고 보니
이 속담과 참 찰떡궁합이더군요.
학교에서도 이 말은 늘 ‘뒤늦은 후회’의 예시로 등장했고,
“미리미리, 철저히, 대비하자”는 말이 머릿속에 정답처럼 새겨졌습니다. 


하지만 살아보니,
사는 일은 그렇게만 흘러가지 않더군요.
아무리 대비해도 놓치는 순간이 생겼고,
애썼는데도 결국 잃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때때로 '내'가 참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리고,
오래 품었던 일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붙잡아온 마음마저 의심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정말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어 집니다.
이미 잃은 것을 붙잡고 자책하거나,
남은 것까지 전부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실망과 절망을 싣고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인생의 고삐를
다시 움켜쥐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독하고 고된 일입니다. 


그런 순간일수록
잠시 멈춰 서서, 내가 쓰러져버린 '그 자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시는 떠올리기조차 싫어도,
그 자리에 다시 서야만 한다는 걸.
무너졌다고 그대로 두면 안 된다는 걸.
울며 불며라도, 그때 손을 대야 한다는 걸.


저도 반백 년 가까이 실패하고 좌절하며,

그렇게 배웠습니다.


망가진 외양간을 고치는 것은
잃어버린 금송아지를 되찾아오는 일이 아닙니다.
내일을 위해
지금 무너진 여기를 다시 메꾸어 세우는 일입니다.


때는 늦었다고 한탄하기보다,
그 실망과 절망에 올라타기보다,
죽도록 원망스럽고, 땅을 치며 후회막급이라 해도
외양간을 고치는 게 맞습니다.
틀린 게 아닙니다.


나를 무릎 꿇게 만든 모든 순간들은
혹독한 값을 치른,

두터운 경험이니까요. 


잃은 자리를 딛고 서서

다시 짓는 사람은
결국 가장 단단하게 살아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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