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입생 때 노처녀 누나를 만났다. 스물아홉에 대학을 다니려니 외롭고 힘들었나 보다. 마침 시골에서 올라와 어리버리한 내가 불쌍해 보였던지 내게 짝이 되자고 했다. 마침 교회 누나들과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냈던 터라 전혀 어색함 없이 둘은 외로운 캠퍼스에서 좋은 벗으로 지낼 수 있었다.
어느 날 누나는 심각한 얼굴로 “나 영어 좀 가르쳐주라. 도저히 영어를 못 따라가겠어.” 난 대답했다. “나 영어 못해요.” 그리고 오고 간 대화는 대충 “그러지 말고 가르쳐 줘.” “난 영어 진짜 못해요.”였다. 결국 누나의 쇠고집에 못 이겨,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내가 그래도 조금 나을듯싶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영어 교재는 고등학생들이 많이 보는 문법서 정도. 누나는 내게 생전 처음 들어보는 회화책을 들먹이며 ‘입문’ 편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책 표지를 펼치니 처음 시작이 ‘Good morning!’이었다. 자신감이 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굿 모닝’을 잘 알고 있으니까. 자신 있게 읽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누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한번 읽어봐!” 다시 읽는 내게 던진 누나의 말 “이 바보야, ‘굿’이라고 하지 말고 ‘긋’이라고 해봐” 이어지는 교재의 발음은 그동안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유창한 발음이었다.
그때 받은 교훈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어디 가서 절대 아는 체하지 말자.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항상 있는 법이다!” 그랬으면서도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항상 가르치려 들고, 앞에 나서려 하고, 앞에 나설 것을 강요받을 때가 있다. 그때 얻었던 교훈을 잊어버리고 숨어 있는 고수들 앞에 내 얄팍한 밑천을 드러내놓은 적이 많다. 그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쳤을까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하기까지 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NIE(신문활용교육)를 주제라 교사를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강의 후 선생님들과 어울려 식사했다. 옆자리 선생님과 대화했는데 아뿔싸 그분은 숨은 고수였고 열정이 있었고 방법론이 확고한 분이었다. “아니, 왜 이런 분이 연수받으러 오시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분들께서도 더 배워보려고 연수받는데 미천한 지식으로 앞에 섰다는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엔 숨은 고수들이 많다. 그들은 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연마하고 있다. 내가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더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