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 일주일

by 강석우

제주 여행 첫날

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변, 멀리에는 산벚꽃이 흐드러지고 가까이에는 파릇파릇 돋아난 새싹들이 천지다. 사자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듯 집안에만 웅크리고 있다가, 겨울잠을 자던 동물이 봄을 맞아 기지개를 켜듯 밖으로 나오니 참 좋다. 싱그러운 바람과 부드러운 음악에 맞춰 손끝과 마음이 들썩인다.


요즘은 사람보다 기계를 통한 일 처리가 일상이다 보니 매사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하지만 공항에서의 탑승 수속을 무사히 마쳤다. 이 작은 성취 또한 기쁨이다.


제주 공항에 내리니 빗방울이 마중을 나온다. 렌터카를 예약하며 '완전자차' 보험 신청과 결제까지 마쳤는데, 막상 차를 인수하려니 대인·대물 보험과 블랙박스를 추가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내가 어리숙한 것인지 업체의 상술인 것인지 마음이 불쾌해졌다.


그럼에도 비가 오락가락하는 제주의 거리에서 차의 기능을 하나하나 살피고 풍경을 감상하며 운전하다 보니, "아, 여기가 제주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좋다.


숙소는 방 두 개와 거실이 딸린 넉넉한 곳이다. 창밖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대형 크루즈선까지 정박해 있다. 베란다 아래 계곡물 흐르는 소리까지 들리는 이 근사한 곳에서 일주일을 지내게 되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서귀포 올레 야시장에서 식사를 하고 시장 곳곳을 둘러봤다. 평일임에도 관광객으로 활기가 넘친다. 먹고 싶은 것은 많지만, 절제의 미덕과 탐식의 욕구 사이에서 묘한 줄타기를 하며 제주에서의 첫날을 갈무리하려니 아들들이 마음에 걸린다. 이 좋은 곳에 우리만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제주 여행 둘째 날

눈앞에 펼쳐진 아침 바다에 더는 잠을 이룰 수 없다. 깊은 밤까지 환하게 불을 밝히던 크루즈선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지금쯤 또 어느 먼바다를 항해하고 있을까. 비 소식을 전했던 일기예보와 달리 날이 맑다.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이 든다.


<가파도>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었던 곳이다. 청보리밭으로 유명한 학원농장을 몇 번 찾았으나 늘 무언가 부족했다. 어린 시절, 끝없이 이어지던 보리밭 사이로 친구들이 들어가면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던 그 아득한 풍경이 그리웠다.


드디어 이번 여행에서 가파도 보리밭을 마주하게 되었다. 운진항 매표소에 도착하니 주차장은 이미 만석이었고, 주차 요원의 안내에 따라 길가에 겨우 차를 세웠다. 몰려든 인파에 줄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다행히 예약 창구는 한산했다. '예약 필수'라는 사실을 놓친 채 나름대로 꼼꼼히 준비했다 자부했던 스스로가 멋쩍어졌다.

하지만 가파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오길 잘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보고 싶었던 바로 그 보리밭이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아 키는 조금 낮았지만, 바다에는 수평선, 김제에는 지평선이 있다면 가파도에는 '맥(麥) 평선'이 있었다. 드넓은 보리밭 사이로 점점이 박힌 무꽃과 유채꽃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장관을 연출했다. 참으로 예뻤다.


오후 3시부터 비가 온다던 예보를 비웃듯 쨍하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3시가 되자 점차 흐려지더니 빗방울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새삼 기상청의 정확도에 감탄하며 발길을 옮겼다.


<곶자왈>

가파도에서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된 탓에, 가는 길목에 있던 김정희 유배지를 그냥 지나쳐야 했다. 아내와 함께하는 여행이기에 예정된 곶자왈 일정을 우선시하며 속으로 '다음에'를 외쳐보았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제주의 생태계를 품은 곶자왈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너무 늦게 도착한 데다 날씨까지 흐려 숲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울창한 숲은 맑은 낮에도 빛이 들지 않을 정도라는데, 해 질 녘의 숲은 더욱 고요하고 깊었다.


비록 테우리 길 전망대까지만 짧게 발을 들였음에도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 역시 아쉬움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인생이 늘 그렇듯,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가고 싶은 곳을 모두 갈 수는 없는 법이다. 하루 만에 가파도와 곶자왈을 모두 품으려 하고, 그 와중에 유배지까지 들르려 했던 나의 욕심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렇게 곶자왈도, 못다 본 제주의 풍경도 다음을 기약하는 미련으로 남겨둔다.


제주여행 셋째 날

호텔이나 리조트가 주는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는 수건이다. 늘 깨끗하고 부드럽다. 집에서 쓰던 수건은 오래 사용하여 뻣뻣해지기 마련이라, 여행지에서 만나는 보송보송한 수건을 마주할 때면 유난히 부러운 마음이 들곤 한다.


<우도>: 다시 찾은 섬, 남겨진 아쉬움

어떤 곳은 마주하는 순간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한다. “내가 다음에 여기를 또 올 수 있을까?” 이 물음 속에는 다시 오고 싶어도 시간이 허락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함과, 세상 넓은 곳 중에 굳이 가본 곳을 또 가느니 새로운 곳을 가겠다는 고집이 공존한다. 젊었을 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물음이었으나, 나이가 들수록 이 질문을 자주 곱씹게 된다.


반면에 “다음에 여기는 꼭 다시 와야지” 하고 다짐하게 되는 곳도 있다. 그만큼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게 우도는 후자에 가까웠다. 지난 방문 때 매서운 추위 때문에 우도에 ‘점만 찍고’ 돌아와야 했던 기억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무슨 일이든 아쉬움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과 ‘아쉬움이 남더라도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훈을 동시에 얻었다.


이번엔 제대로 돌아보리라 다짐했지만, 또 작은 후회가 고개를 든다. 내 차를 도선하는 대신 현지에서 삼륜차를 빌리기로 했는데, 막상 비교해 보니 비용은 비슷하고 대여 시간제한 때문에 마음만 더 급해졌다.


그러나 우도봉에 올라 섬을 일주한 것으로 이번엔 여한을 남기지 않으려 한다. 우도봉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과 너른 바다는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섬을 한 바퀴 돌며 만난 경치는 실로 아름다웠다. 우도를 둘러싼 검은 바위와 그에 대비되는 흰모래의 선명한 조화가 눈부셨다. 특히 서빈백사 해변에서 밟아본 산호사는 산호와 조개껍질이 부서져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눈으로 보는 즐거움 못지않게 발끝과 손끝으로 전해지는 촉감이 매우 특별했다.


<용눈이 오름>: 제주의 야생을 만나다

해발 247m 남짓으로 높지 않고, 정상까지 20분이면 닿는 비교적 쉬운 코스라는 점이 우도 방문 후의 피로를 달래기에 최적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오가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소가 누운 형상이라는 우도에서 나와 용이 누운 형상이라는 용눈이 오름으로 향하니, 용과 소를 넘나드는 여정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처음엔 ‘용의 눈(目)’이라 생각했는데, 정상의 안내판을 보니 ‘용이 누운 모습’이라는 뜻의 ‘용와악(龍臥岳)’이라 설명되어 있었다.


오르는 내내 뒤를 돌아보면 펼쳐지는 오름 군락과 굴곡진 들판의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는다는 이곳의 사계절이 장관이라지만, 그런 수식어를 떠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 그 자체로 “아, 이것이 제주의 아름다움이구나” 하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제주 여행 넷째 날

숙소가 5층이다. 베란다 바로 앞 야자수를 올려다본다. 야자수가 이렇게 큰가. 이런 크기를 지탱하려면 뿌리는 얼마나 깊고 넓게 뻗어야 할까를 생각해 본다. 더욱이 제주의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면서도 저렇게 견뎌내려면. 위대한 인물들도 그렇게 위대해지기 위해 얼마나 크고 넓은 기초를 다져왔을까.


<제주 돌문화 공원>

입장료가 5000원인 곳인데, 문화의 날이라고 무료입장이었다. 이 돈으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돈만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큰 탓이다.


돌문화 공원은 제주의 돌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생태공원이다.


전설의 통로를 통해 만나는 광경은 돌을 보러 왔다가 아름다운 나무를 보는 묘한 느낌을 갖게 했다. 너른 잔디밭도 탁 트인 시원한 느낌으로 아주 좋았고 막 돋아나는 움색의 나무는 나이 든 남자의 가슴마저 설레게 했다.

돌 박물관은 공사 중이어서 입장이 안 됐지만, 외부에서 보는 광경만으로도 어마한 내용을 보여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돌 문화 산책길로 이름 붙여진 곳은 선사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시대별로 구불구불 아기자기 깊은 숲과 어우러지게 잘 전시되어 있었다.


오밀조밀한 동자석과 석부작 야외전시장이 아기자기했고, 오백 장군 갤러리, 오백 장군 군상, 설문대 할망 전시관, 그리고 한라산 코스는 우리나라에 이런 거석문화가 있었구나 하는 아주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관광 일정을 짠다면 아침 일찍 출발해야 오전 일정을 넉넉히 소화한 이후 점심 식사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번번이 한다. 오늘도 미처 다 돌지 못했는데 점심 식사 시간이 지나버려 나중에는 건듯 건성으로 지날 수밖에 없었다.


'금능이모네'에서 보말칼국수로 식사했는데, 집에서 내가 음식을 해서 대접을 할 때도 내가 추천한 식당에 갔을 때도 칭찬에 인색한 아내가 맛있다는 소리를 연발해서 의아했다. 결혼기념일이어서 아내가 좋아할 만한 곳으로 일정을 짰는데, 여기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이다. 다만 비가 와서 다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어쩌랴 일기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일출랜드>

이름이 왜 일출 랜드일까. 소개 리플릿에는 “아버님의 고향 성산읍에 물려받은 땅보다 더 넓은 수목원을 만들어 평생 갈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출랜드가 시작되었습니다.”라고 만 되어 있지 왜 ‘일출’인지 조금의 단서도 없다.


오전엔 우산을 안 쓰고 버틸 정도였는데, 이젠 우산을 쓰고도 옷이 젖을 정도이고 약간 싸늘하기까지 했다. 일출랜드도 혹시나 문화의 날로 요금을 받지 않으려나 했는데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이어서 조금 아까운 느낌이 들었다.


제주도를 가로질러 이동하면서 길옆의 가로수에서 자연 그대로 돋아나는 움색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탓에 이곳의 지나치게 인공적으로 잘 다듬어진 아름다움에 다소 흥미를 잃었다. 날씨 탓도 컸지만.


천연 용암 동굴 미천굴을 중심으로 제주의 생태, 문화 체험이 가능한 웰니스 관광지라고 소개한 것처럼, 이것저것 다 때려 넣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하나 특출 나다는 느낌은 없다. 다 보여주려다 보니 그냥 그런 곳이 되었다는 평가를 해본다.


아들들이 제주도에 온다면 돌문화공원은 강추, 일출랜드는 약추.


제주 여행 다섯째 날

<영실>

오전에 한 시간 동안 약한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길을 나섰다. 해발 1280m 영실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해 1700m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가는 것이 목표였으나, 컨디션이 괜찮다면 남벽 분기점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출발할 때부터 는개(안개비) 혹은 세우(가랑비)라고 할 정도의 가느다란 비가 내렸다. 비옷을 입자니 거추장스럽고, 안 입자니 젖을까 봐 망설여지는 애매한 날씨였지만 결국 입지 않고 올라가기로 했다. 고도를 높일수록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더니, 이내 사방이 짙은 안개에 갇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산하는 분이 인사를 건네기에 반갑게 화답하며 물었다. “위쪽은 좀 보이나요?” 그분은 “잘 안 보이긴 하지만, 간간이 경치가 열리기도 해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구름이 점점 더 짙어져 영실의 명물인 오백장군과 병풍바위는 그저 ‘이 근방에 있겠거니’ 짐작만 하며 지나쳐야 했다. 해발 1400m 지점에 다다르자 구상나무 군락이 펼쳐졌다. 그동안 말라죽어 앙상한 모습만 보아왔는데, 푸른 잎을 머금은 생생한 구상나무는 처음이라 무척 반가웠다. 보이지 않는 풍경에 답답했던 마음을 구상나무가 보상해 주는 듯했다.


1600m를 넘어서자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다. 구름이 더욱 짙게 깔리며 안경에 물기가 맺혀 시야는 더욱 좁아졌다. ‘여기가 맞나?’ 싶은 의구심이 들 때쯤, 갑자기 윗세오름 대피소가 눈앞에 나타났다. 대피소 안으로 들어서니 올라오며 마주치지 못했던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인 듯 북적거렸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나니, 시야가 이토록 좋지 않은데 더 전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 하산을 결정했다. 바람은 더욱 차가워지고 빗줄기도 굵어져 결국 비옷을 챙겨 입었다. 내려가는 길에 올라오는 사람들을 수없이 마주쳤다. ‘올라가 봤자 아무것도 안 보여요’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찰나의 순간 스쳐 갈 풍경과 목표를 이뤘다는 성취감이 그들에게도 있을 것 같아 조용히 지나쳤다.


주차장에서 비슷하게 출발했던 젊은 여성들이 우리를 앞지르며 인사를 건넸다. 그 눈빛에는 연배가 있으신 분들이 이 궂은 날씨에 산을 오른다는 것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는 듯했다. 먼저 올라가라고 우리는 우리 속도에 맞춰 천천히 가겠노라 인사한 후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그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다시 만난 우리를 향해 “저희도 이렇게 힘든데 대단하세요!”라는 듯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묘하게도 그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가 주차장에서 다시 마주쳐 반갑게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힘겹게 올라오던 또 다른 어르신 한 분도 우리를 보고는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젊은이들 틈바구니에서 동년배를 만난 반가움이었을 것이다. 비록 수려한 경치는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 사이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찬 산행이었다.


<동생과의 만남>

동생이 친구와 함께 올레길을 걷기 위해 제주에 왔다고 연락이 왔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평소 명절이나 부모님 추도식 때나 겨우 얼굴을 보던 동생인데, 같은 시기에 이 넓은 제주 땅에 머물고 있다니 기쁜 마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리는 윗세오름을 올랐고 동생은 올레길 20km를 걸었다고 했지만, 만남의 설렘 덕분에 몸의 피로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바다를 배경 삼아 함께한 식사, 오랜만에 마주한 동생, 그리고 평생을 아름답게 우정을 나누어온 친구와의 만남까지. 이 모든 순간이 나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채워주는 기분이었다.


제주 여행 여섯째 날

여행을 왔는데, 미리 계획을 세우고 계획표에 따라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여행의 목적에는 ‘쉼’도 있을 텐데, 비싼 돈 들여 멀리 왔으니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다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오늘은 부지런함 속에서 좀 더 여유를 찾아보려고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상은 한 권의 책이고,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는 것이라고 했는데, 다른 페이지도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속독하듯 읽어내기보다 한 페이지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처음 계획한 일정은 오토바이를 빌려 해안가를 드라이브하는 거였는데, 렌트업체의 장사속에 그만 속이 뒤집어져, 오토바이 드라이브는 포기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제주도에 와서 처음으로 해가 활짝 맞이해 주는 날이다. 구름으로 가려졌던 한라산이 얼굴을 보여주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계속 한라산을 보며 사진을 찍게 되었다.


<강정천과 악근천>

어제 영실 윗세오름을 올랐기에 다리도 쉬어줄 겸, 오전엔 살살 숙소 주변 동네 마실 겸, 구럼비 바위 문제로 시끄러웠을 때 응원차 방문하기도 했던 강정이기에. 강정마을의 강정천 하류로 조금 걸었더니 바로 바다로 이어져 천과 바다가 만나는 장엄한 풍경을 보게 되었다. 되짚어 천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니 녹나무 자생지가 있었다. 아쉽게도 길이 막혀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강정마을의 악근천은 천 이름이 왜 악근인지. 강정의 강하고 바른 길을 걸으면 악의 뿌리를 뽑나?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걸었는데, 강정천에서처럼 사람을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악근천을 따라 데크 길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어디가 끝인지 무한정 갈 수도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는 데다, 점심시간도 다가와서 걸음을 되돌렸다.


'두가시의 부엌'이라는 곳에서 식사했는데 ‘두가시’는 부부의 제주도 방언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갈치조림과 비슷한 맛을 내는 곳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물론 아내가 흉내를 내긴 하지만 1% 부족함을 느꼈었다. 어머니의 손맛과 비슷한 맛을 보니 감개무량이다.


<숨도>

제주도에 왔더니 아버지의 함자가 들어간 곳이 왜 이렇게 많은지(아버지는 정자 원자를 쓰셨다) '숨이 모여 쉼이 되는 정원'이라는 '숨도'. 여기에서도 한라산이 선명하게 보여 사진을 계속 찍었고 심지어 카페에 앉아서도 창을 통해 비스듬하게 보이는 한라산을 찍었다.


아내에게 날씨도 좋고, 오늘은 시간이 넉넉하니 천천히 마음껏 꽃구경하라고 했더니, 어렸을 때 우리 아들들이 "아빠, 이게 뭐야?"라고 쉴 새 없이 묻듯이 오늘 아내도 쉴 새 없이 "이게 뭐야?"를 남발하여 어쩔 수 없이 제미나이를 귀찮게 했다. 나중엔 "제미나이가 그만 물어보래~"라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박수기정>

박수기정은 멋진 해안 절벽 풍경을 지닌 곳인데, 샘물을 뜻하는 ‘박수’와 절벽을 뜻하는 ‘기정’이 합쳐져 깨끗한 샘물이 솟아나는 절벽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제주 올레 9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해서 조금이라도 올레길 맛을 보려고 했으나, 아내가 이미 지친 상태여서 포기했다.


사전에 찾아본 카페에서 박수기정의 절경을 감상하는 대신, 해안 길을 드라이브하면서 풍경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논짓물 해변과 크루즈선>

논짓물 해변을 지나면서 아내의 발 피로를 풀어줄 겸 족욕 카페를 찾았으나 영업을 하지 않아 지나쳤다. 논짓물 해변에선 저 멀리 크루즈선이 보였고 그 옆이 숙소이니 묘하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숙소에서 봤던 크루즈 선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에 민군 복합항구에 정박한 크루즈 선을 찾아갔다. 예전부터 꿈꿔왔지만, 이제는 거의 가슴 한구석으로 접어 둔 크루즈 여행의 꿈을 살짝 되새겨 보는 것으로 오늘 여행을 마무리했다.


내일은 여행의 끝날, 일부러 비행기 시간을 늦게 예약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하기엔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오토바이로 드라이브하려고 했던 해변 길을 차로 달려보고, 오래전 직장 워크숍 때 방문해서 매우 좋은 기억으로 남아 아내랑 가봐야지 했던 카페를 들르는 것으로 이번 제주 여행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대문을 열고 나가면 사자가 앉아 있을 것 같아 가급적 두문불출하려던 마음을 이겨내고, 나왔더니 사자는 멀리 사라지고 없고, 사자가 달리던 넓은 초원을 내가 달리고 있는 느낌이 들어 매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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