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남기고 싶은 것

by 강석우

바람이 머문 자리 민들레꽃 피어나네

무심탄 바람도 인연의 씨 심었는데

임 머문 이부자리야 일러 무삼하리오 –조정래, 《아리랑》(권 5, 257쪽)


소설 《아리랑》에서 이불속 인연을 맺은 공허스님에게 홍 씨가 스님이 세상에 왔다 간 대표적 흔적을 넌지시 알리는 시조다. 사람은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사람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자신의 존재 사실을 흔적으로 증명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아니 온 듯 있다 가소서.’ 더럽거나 불쾌한 흔적을 남기지 말아 달라는 멋진 표현이다. 아무리 아니 온 듯, 아무리 안 한 듯, 아무리 없는 듯 행동해도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식구들에게 다이어트 선언한 남자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몰래 배를 채운 후 부엌을 나서다 마주친 부인에게 아무리 안 먹었다고 설레발쳐도 입 주변엔 흔적이 남아 있고, 범죄자가 아무리 완전범죄를 꿈꿔도 반드시 흔적을 남기고, 아름다운 사람은 아무리 감추려 애써도 아름다운 흔적을 남긴다.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세상에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 아버지 묘를 만드시던 어르신들께서 “거참, 이쁘게 나왔다. 살아생전 성격대로 만들어진다더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참 단정하셨다. 돌아가신 뒤 학교 교실 서랍도 집 서랍도 아버지 손이 닿으시던 곳은 다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누군 돌아가실 줄 알고 준비를 다 했나 보다 했지만 난 안다. 평상시 그렇게 정리하셨던 분이니까.


난 걱정이다. 아무리 해도 정리가 되지 않는다. 내 흔적은 지저분할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길을 나설 땐 항상 깨끗한 속옷을 입는다고 한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더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내가 남길 흔적이 두렵다. 어떤 흔적을 남길까. 우선 내 생애 최대의 흔적인 우리 아들들이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우리 부모님의 얼굴 노릇을 제대로 못 했지만, 우리 아들들은 세상을 바르게 살아서 내 흔적으로 남길 바란다.


다음은 나를 거쳐 간 수많은 학교와 교회의 제자들, 그들의 마음속에 자신을 사랑하고 성실하고 세상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새겨지길 바란다. 평생 교사로 살면서 남기고 싶었던 흔적이다. 그리고 나의 생애와 사상을 담은 깊이 있는 책을 한 권 남기고 싶다. 물론 그 이상의 욕심도 있지만, 이것으로도 분에 넘치는 욕심이다.


아예 이 세상에 안 온 것처럼 살다 가는 것도 괜찮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어떻게든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내가 세상을 살아온 흔적이 왜곡되거나 잘 못 해석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남았으면 한다.

제대로 살아야 제대로 흔적을 남길 건데. 흔적을 좋게 조작할 수는 없을 건데, 이대로는 아닌데, 내 삶은 지지부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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