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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mpathizer Jun 10. 2019

우리 주변에 만연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병균

<페스트>, 알베르 카뮈

얼마 전 영화 기생충을 봤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는 일부러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관람을 하기 때문에 막연하게 실제로 기생충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기생충은 비유적인 표현이었다. 매우 표면적인 해석으로 치자면 부잣집에 기생충처럼 숨어들어 사는 송강호 가족들을 빗댄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화는은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올라갈 수 없는 계층간 사다리, 돈 없는 사람들은 계획을 하는 것조차 헛된 꿈같이 느껴지는 사회,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문화. 이 영화는 기생충이라는 강렬한 단어를 사용해서 대한민국에 만연한 부조리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의 주제도 본질적으로 기생충과 맞닿아있다. 이 소설의 제목 페스트는 말 그대로 전염병을 뜻한다. 오랑이라는 한 도시에 퍼진 흑사병이다. 흑사병으로 인해 도시는 고립되고, 그 안의 사람들은 극단의 상황에 몰린다. 흥미로운 이 상황 속에서 숨겨져있던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의사 리유, 파놀로 신부, 그리고 다른 지방에서 온 신문기자 랑베르 등이다. 전염병이 시작됐을 때 이들은 각기 뚜렷한 행동을 취한다. 랑베르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고립된 도시를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썼고, 파놀로 신부는 전염병이 신이 의도한 것이므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의사 리유는 보건대를 조직해서 병에 걸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애쓴다. 반면 이 와중에 페스트 안에 있는 게 더 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현실 감각 없이 자신의 일에만 열중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도시를 지켜보는 청년 타루가 있다. 생각이 많고 어릴 적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진 타루는 이 사태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닫는다. 타루는 알베르 카뮈의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나야말로 나의 온 힘과 정신을 기울여 바로 그 페스트와 싸운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끊임없이 페스트를 앓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는 내가 직간접적으로 인간 수천 명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것, 필연적으로 그러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행위나 원칙들을 선이라고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그러한 죽음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이 도시와 전염병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페스트로 고생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도 이곳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란 얘기죠.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상태에서도 좋다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런 것을 알면서 거기서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어요. 나는 항상 빠져나가려고 했어요."


이 책은 흑사병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다. 전염병은 사람들에게서 타인에 대한 관심을 빼앗았다. 절망에 습관이 들어버리게 했고 열정을 앗아갔다. 그리고 저자가 페스트에 빗대서 표현했던 것은 결국 부조리였다. 위의 문장들에서 페스트를 부조리, 혹은 비리, 위선, 부패 등으로 바꿔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알베르 카뮈는 타루의 입을 통해 부조리가 가져오는 파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타루는 자신이 전염병의 피해자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동시에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리유와 힘을 합쳐 보건대를 조직해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국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부정적인 결말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 전염병은 거의 물러가고 도시는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부조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뀔 수 있는 것 같다. 부조리에 대해 체념하는 사람은 그것을 바꾸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반대로 작은 희망이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바쳐 행동에 나선다. 이 소설은 후자의 이야기이다. 


누가 옳다 그르다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소설을 잃을 때면 희망적인 느낌이 들곤 한다. 이런 신념들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야 조금이라도 변화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막연한 낙관주의와 무사안일주의가 아닌 현실을 직시하면서 긍정을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베르 카뮈라는 작가가 대단하고, 비관적이 되고 싶은 유혹에 빠지려 할 때 그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p.328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들조차도, 오늘날의 모든 논리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죽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서 몸 한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p.329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p.177

인간들은 다소간 무지한 법이고 그것은 곧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한 악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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