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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mpathizer Jul 30. 2019

헤어화

2015

싱가포르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첫 번째로 본 영화. 그동안 많은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최근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은 대부분 진한 상업성을 띤 액션 영화들이다 보니 더 여운이 남고 서정적인 영화들이 보고 싶어 졌다. 마침 영화 문외한인 나에게도 나름 익숙한 박흥식 감독의 영화가 눈에 띄어 망설이지 않고 골랐다. 


마음이 복잡해지는 영화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영화를 보면서 누가 더 나쁜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도덕적 결론에 도달하려는 나를 발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효주를 배신한 유연석은 이 영화의 발단이자 모든 비극의 시작이다. 그는 당연히 나쁜 남자다. 그의 나쁜 행동은 남은 두 여자들도 하나 이상의 이유로 '나쁜'여인들로 만든다. 그런데 누가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단짝 친구의 애인의 사랑을 받아들인 천우희일까, 아니면 마음이 변한 애인을 놓아주지 못하고 친구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대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한효주일까. 


이 영화의 핵심은 한 남자의 변절로 인해 단짝 친구의 관계가 변해가는 모습이다. 영화 속에서 두 여자들의 운명은 각기 다르게 펼쳐진다. 그들의 상황이 제각기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감독은 관객들이 갈증을 느끼는 시점을 정확히 포착하여 그들의 재회 장면을 여러 차례 나누어 보여준다. 두 여자들이 베스트 프렌드에서 증오의 관계로 변해가는 과정들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이 영화를 보든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한효주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한효주였다면 어땠을까. 한효주가 복수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통쾌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애인의 변절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한편으로는 점점 복수의 수위를 높여가는 한효주를 보면서 마냥 옹호해서만은 안될 것 같은 딜레마에 사로잡힌다. 차라리 한효주가 비련의 여인으로 나왔더라면 그녀를 마음 편히 동정하기만 하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이 영화가 불편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효주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싶지만 그녀가 옳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천우희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는 싫다. 그녀는 친구의 애인을 뺏어간 나쁜 여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나도 이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부딪히는 도덕적, 인간적 잣대와 싸우느라 고생해야 했다. 그러다 얻은 결론은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 치중하다 보면 이 영화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지나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영화를 보는 내 방식과 심리상태를 관찰하면서 다시금 깨달은 것은 나 같은 보통 사람은 정답을 좋아한다는 것. 비극보다는 깔끔한 해피앤딩을 바라는 사람들의 심리도 딱 떨어지는 결말을 선호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분법적 사고도 딜레마와 불확실함을 피하려는 결과 등장한 단순한 사고방법일 뿐이다.  

이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찾아보진 않았지만 내 우매함으로는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겠다. 어두운 이 영화의 이면에 감독은 관객들이 어떠한 교훈적 메시지를 가져가길 원했던 걸까? 아니면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그저 한 여인의 비극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이었을까? 나는 후자라고 믿고 싶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것을 나이를 들어가면서 깨닫고 있기 때문에. 슬프지만 이런 것도 삶의 한 모습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영화의 아쉬운 점은 많다. 무리하게 한효주만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느낌이다. 스토리상 한효주와 천우희 둘 다 비슷하게 비중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천우희의 캐릭터는 평면적이었다. 천우희의 비중이 갈수록 작아지고 그녀의 심리상태가 섬세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특히 천우희가 유연석의 사랑을 어떠한 감정상태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었던 부분이 제일 아쉽다. 영화의 앞부분에 천우희가 아주 착하게 묘사된 것을 보면 분명 내적 갈등이 있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관객들은 오직 한효주와의 대화와 간간히 등장하는 천우희와 유연석의 투샷만으로 그녀의 심리상태를 짐작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해어화가 철저하게 한효주에 집중한 서사였다면 유연석, 천우희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스토리도 보아야 비로소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이런 부분들을 포함하다 보면 영화 시간이 과도하게 길어지거나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만 할 수 있다면 영화의 몰입도와 완성도 면에서 긴 러닝타임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를 볼 때는 한효주에 감정이입을 너무 많이 한 까닭인지 구성과 전개가 많이 거슬리지는 않았다. 단점에도 불구하고 여운이 많이 남았고 인간의 본성과 세상을 바라보는 내 관점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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