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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mpathizer Jul 30. 2019

동주

2015

'동주라 부르고 몽규라고 읽는다' 한 네티즌이 적은 이 영화의 리뷰다. 이 영화에서 송몽규라는 인물은 동주만큼 비중 있게 다뤄진다. 몽규가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이끄는 모습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바로 그런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래서 많은 관객들은 몽규의 모습에 먹먹해진다. 반면 동주는 내성적이고 조용하다. 그의 역할은 철저하게 시인이다. 


주인공으로 동주와 몽규 중 하나만 고르기에는 남은 한 명이 너무 아쉽다. 정확하게 제목을 붙이려면 '몽규와 동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둘 모두 공평하게 영화의 주인공을 맡아야 한다. 오성과 한음이 항상 같이 불리는 것처럼. 윤동주의 시적 재능과 그가 형무소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슬픈 사실만으로도 윤동주는 영화의 주인공으로서의 요소를 다 갖추었다. 반면 몽규는 비교적 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는 몽규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몽규는 동주를 자신의 독립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지는 않았다. 동주가 물리적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시를 사랑하긴 했지만 행동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항상 그를 짓눌렀다. 그가 시를 계속 썼던 이유는 그의 역할은 시인이라 말한 몽규였다. 동시에 동주에게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문학적 발판과 계기들을 마련해주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독립운동가로서의 송몽규와 윤동주의 상징성이다. 동주는 생애 마지막 수감생활을 제외하고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존재가 아닌 멀리서 지켜보는 존재였다. 반면 시원시원하고 화끈한 성격의 몽규는 열정적으로 투쟁을 주도했고 형무소에 갇혀서도 끝까지 할 말은 다 하는 말 그대로 정의의 투사였다. 몽규가 독립운동가의 표면적인 모습을 상징한다면 동주의 시는 그의 섬세한 내면을 상징한다. 감독은 몽규와 동주를 통해 독립운동가 속에 존재하는 여러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몽규를 통해 독립운동가들이 흘린 피와 땀방울을 보고 윤동주의 시를 들으며 그들이 느꼈을 고민과 자기 성찰을 본다. 


윤동주의 시들은 흔히 그렇듯 거칠게 느껴질 수 있는 독립 영화에 서정적 감성을 불어넣고 아련함을 극대화시킨다. 영화 중간중간 윤동주의 시들이 강하늘의 중저음의 목소리로 읊어질 때면 독립영화가 아닌 문학작품을 보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가 별 헤는 밤이나 서시 같은 시들이 들려올 때면 기계적으로 배웠던 익숙한 시의 진짜 의미가 비로소 한 번에 이해되면서 온몸에 뜨거운 전율이 흐른다. 시가 한 척의 배라면 맥락 있는 스토리는 시들을 잡아주는 닻 같은 존재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의 시들은 안네의 일기를 연상시킨다. 안네의 일기는 독일 나치군의 만행과 함께 읽어져야 그 의미가 극대화된다. 안네의 일기가 그저 한 소녀의 개인적인 고백이라고 하기에는 중요한 시대적 사실을 너무도 많이 담고 있는 것처럼 윤동주의 서정적으로 느껴지는 시도 역사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다만 안네의 일기와는 달리 윤동주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 겹 더 파고들어야 한다. 


어떤 이는 학교 국어시간보다 이 영화를 통해 윤동주의 시를 더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영화의 힘은 이런 것이겠지. 일반 대중들이 영화를 보며 윤동주라는 시인에 더 관심을 가지고 깊게 이해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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