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작년이었던가 암살에서 하정우를 보고 반한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주저 없이 선택한 터널.
하정우가 터널 안에 갇힌 상황에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특이한 설정이다. 재난영화라고 해서 온 동네가 황폐화되고 사람들이 아비규환이 되어 뛰어다니는 거대한 스케일의 영상을 기대하면 실망할 수도 있다.
터널은 재난을 대처하는 정부, 사회의 태도, 그리고 피해자와 가족들의 내면적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집단적 재난으로 발생하는 혼란의 도가니를 그린 기존의 재난영화들과는 다른 점이다.
그래서 터널은 재난영화답지 않게 고요하고 왠지 지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정적인 터널이라는 공간에서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한몫한다. 시간은 빠르지만 느리게 흘러간다. 생사의 길에 놓여있는 하정우의 긴박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것이 더디게 진행되는 터널 밖의 상황은 왠지 평화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잘못된 설계도 때문에 구조작업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을 때 하정우의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외침은 관객들로 하여금 격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19일을 기다렸는데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견뎌야 한다니. '이제 더는 못하겠어'라는 말은 하정우가 그동안 구조를 기다리면서 보여줬던 침착함과 대범함, 그리고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과 대조되어 더 짠하게 들린다.
한편 터널 밖의 상황은 하정우의 가족과 아내인 배두나에게 잔인하다. 구조작업이 길어지자 처음에는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던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한다. 돈이 한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시되고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것을 강요받는다.
영화는 하정우가 구출되면서 해피앤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왠지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 발가벗겨졌기 때문이다. 하정우가 구출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와 사회 덕분이 아니라 한 구조대원의 유별난 끈기였다. 국가와 정부는 우리한테 무엇을 해주는가. 훌륭하지 않은 국가에서 산다는 것은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들이 단체로 인천 상륙작전을 보러 갔다. 한국전쟁의 승리와 맥아더 장군을 찬양하며 SNS에 영화표 사진을 올렸다. 그들이 단체로 터널을 볼 수 있을까. 그럴 용기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