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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mpathizer Nov 19. 2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를 찾다.

테드 창의 숨은 주변에서 얘기를 많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매우 기대했던 책이다. SF장르는 과학적 원리는 잘 이해되지는 않아도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미래적인 느낌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분야 중 하나이다. 테드 창에 대해 찾아보면서 호기심은 더해졌다. 단 한권의 단편소설집과 드문드문 발표한 중,단편 소설이 전부였던 작가가 어떻게 현대 SF소설의 일인자로 우뚝 올라서게 됐는지 무척 궁금했다. 17년 만에 낸 소설집을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가길래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을까.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만하다'이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건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이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은 딸에게 싱처가 되는 말을 듣고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려 애쓴다. 그러다 과거 기록을 쉽게 꺼내서 볼 수 있는 기술이 생겨나 자신의 과거를 들춰보게 되고, 사실을 완전히 잘못 기억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큰 상처를 준 말을 한건 딸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었다. 


이 소설은 인간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으로 기억을 재구성하고, 심지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왜곡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인지적 편향으로 인한 기억 왜곡 현상은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같은 소설에서도 종종 다뤄져왔다. 주인공은 잘못된 기억을 바탕으로 한 사람을 증오하며 평생을 살아가고 노인이 되어서야 자신의 기억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닫는다. 왜곡된 기억은 삶 전체를 일그러뜨렸다. 


이런 영화들이 잘못된 기억의 위험성을 '경고'했다면,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재구성된 기억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때로는 관련 당사자들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이다. 진실과 옳음은 때론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감정적 진실 (truth of feeling)'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좋은 관계와 마음의 평온을 유지시키고 날카로운 진실이 불러올 지도 모를 폐해를 예방한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 삶의 전 과정을 기록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한다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의 매순간이 영상으로 저장된다. 이런 기술은 첫눈에는 매우 좋아보인다.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은 나는 찾고 싶은 정보가 기억이 나지 않을때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고픈 충동을 느낀다. (위 영화 제목도 기억이 안나서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과거에 봤던 책, 인상깊었던 구절, 영화에 대한 정보가 순간순간 저장된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아기였을 때의 내가 움직이고 말하는 모습도 매우 궁금하다.


하지만 모든 신기술과 마찬가지로 이런 기술에도 부작용은 있다. '잊혀지지 않을 권리'가 사라지고 과거가 소모적인 논쟁에 쓰일 때 특히 그렇다. 그리고 자칫하면 삶 전체의 기록이 노출될 수 있어 프라이버시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도 있다. 섬뜩했던 것은 이런 기술의 등장이 현실성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영상촬영이 손쉬워졌고 데이터 저장 비용은 하루가 다르게 낮아지고 있다. 5년 안에 이런 기술이 상용화 된다고 해도 놀랄게 없을 것 같다. 나는 과연 '리멤'같은 기술을 사용할 것인가? 이 소설을 읽기 전이라면 자신있게 예스라고 대답했겠지만 지금은 확실치 않다. 이러한 기술로 인해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이고 희생해야 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진실 여부를 가릴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고 간직하는 건 인간의 정체성에 얼마만큼 핵심적인 활동인가? 


개인적으로 결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디지털적 기억이 우리가 스스로에 관해 이야기하는 행위를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고, 그 무엇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디지털적 기억이 그 이야기들을 최상의 행위를 강조하고 최악의 행위를 생략하는 우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 진실한 기록으로 바꿔주기를 희망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감정적 진실은 공정함의 여부를 떠나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소설 전반에 투영된 테드 창의 세계관은 절망 속에서 한줄기 빛을 발견하려는 노력이었다. 부조리, 무의미함, 불확실성, 권태, 육체적/정신적 속박. 인생을 부정하기 쉽게 만드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는 태도가 내게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열광하게 하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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