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고 있니? 어두운 방에 혼자서
널 기다리는 사람들은 거기 없는데
돌아와, 너의 거리로
따뜻한 피가 흐르는 세상 속으로
한동안 여기 비워 둔 너의 자리로
- 윤상, 「Back to the real life」
https://www.youtube.com/watch?v=gPVqGdY237k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2000년에 소니는 최초로 DVD용 플레이스테이션을 공개한다. 3D 처리능력이 펜티엄3의 3배에 달한, 당시로서는 괴물 게임기의 등장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 사이버 세계와 현실의 경계에서 혼란을 느끼는 현대인을 그린「Back to the real life」가 대한민국에서 히트를 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이버 세계는 흥미진진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쏟으면 안되는, 주의해야 할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로부터 19년 동안 사이버 세계는 날로 발전했고 지금은 가상현실이라는 곧 보편화될 기술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더 히스토리 오브 더 퓨처>는 가상현실에 인생을 바친 한 청년, 그리고 VR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 사람의 손에서 태어난 기술이 스타트업으로 만들어지기까지, 그리고 그 회사가 세계적 기업 페이스북에 인수되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까지 기술을 상업화하는 과정의 시작과 클라이맥스를 세세하게 볼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다. 팔머 럭키는 마치 마법 구슬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그의 기술을 접하는 사람들을 족족 매혹시켰다. 아무리 가상현실을 조롱하고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도 단 10분이면 충분했다. 밸브 임원들이 리프트를 시험하고, 주커버그가 VR방을 체험하고, 삼성 등 대기업 엔지니어들이 데모에 참여한 후, 모두 오큘러스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했다. 모두를 사로잡은 기술을 만들어 낸 팔머 럭키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고 해도 제품으로 출시되어 적절한 가격으로 소비자들에게 공급될 수 있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든다. 단편적인 정보로만 접했던 인수합병, 인재 영입, 투자 유치 등의 실제 과정을 따라가며 느낀 것은 비즈니스는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PR이나 IR처럼 '개발자 관계'를 뜻하는 Developer Relation 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개발자 키트가 출시되면서 개발자 커뮤니티는 집단지성으로 뭉쳐 VR기술을 더 빠르게 발전시켰다. 자율주행차나 우주 산업 기술과는 달리 VR의 소프트웨어는 더 많은 일반 개발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접근가능한 기술이라서 매력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VR이 더 널리 보급될 날이 정말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유대가 선행되어야 하고 비즈니스 관계를 끝으로 몰고가는 것도 인간관계이다. 책의 중반까지만 읽었을 때는 가상현실 구현을 위해 뭉친 사람들이 그저 대단해보였다. 사업이 진전되고 갈등을 겪을수록 인물들의 현실성 있는 성격이 드러났다. 팔머럭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소신과 자신의 고집이 있는 청년이었다. 그를 설득해 오큘러스를 설립한 이리브는 점점 더 기회주의자적인 면모를 드러냈고 마침내 그를 버리는 파렴치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팔머 럭키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VR에 뛰어드는 모습은 처음엔 마냥 낭만적으로만 보였지만 결국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였다. 거대한 액수에 오큘러스를 인수한 마크 주커버그가 정치적인 스캔들에 휩싸인 팔머를 대하는 모습, 오큘러스의 창립자인 팔머가 가차없이 해고를 당하는 부분에서 비즈니스 세계의 냉정함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팔머가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조금은 부정적인 편견이 생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도 아니고 이민자들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것도 아닌 그저 보수적인 성향을 띄고 있는 일반 시민이라는 걸 감안할 때 그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컸다. 페이스북이 정치적 영향에 관련해 각종 비판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가 회사에 입힌 손해가 해고를 정당화시킬 만큼은 아니었다고 본다. 이 사건을 보면서 미국의 정치적 분열의 심각성을 더 인식하게 된 것 같다.
해피엔딩을 기대했지만 팔머 럭키가 없는 오큘러스는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페이스북은 꾸준히 오큘러스 VR시리즈를 출시하고 있고 후기도 활발하게 올라온다. 다행인 것은 이미 궤도에 오른 VR개발이 쉽게 사그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제일 궁금한 건 팔머 럭키의 행보다. 현재 오큘러스의 초기 멤버들과 같이 방위 기술 회사를 차려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시 VR로 돌아가게 될지 궁금하다. 페이스북같은 거대 자본력의 힘을 다시 입게 될지는 알수 없지만 그를 도울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 더 빠른 VR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95%의 시간동안 낭비되는 자동차들부터 회수할 수 없는 로켓까지. 기술은 이러한 물리적 비효율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곧 무거운 텔레비전과 각종 스크린들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질 것이다. 700페이지가 넘는 두께만큼 읽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중간에 멈추고 싶지 않을만큼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몰입해서 본 책이다. VR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채 읽어서 아쉽지만 조만간 VR카페 등을 통해 책 속 인물들이 느꼈던 놀라움을 경험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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