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소년 코타로 (원제: 코타로는 혼자 산다, 아사히 TV, 2021)
드라마는 무슨 일인지 몰라도 혼자 사는 다섯 살 소년이 허름하고 오래된 다세대 주택에 이사 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소년의 옆집, 아랫집에 사는 이들은 소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소년을 보살피면서 비로소 ‘이웃’이 된다.
무명 만화가인 30대 남성, 주점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사실상 무직) 전직 야쿠자 40대 남성. 이 공동주택의 주민들은 주인집을 제외하면 모두 1인 가구다. ‘변변한 직업’도, ‘변변한 가족’도 없다. 그들이 소년을 보살필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그래서 가능했던 일이다.
소년을 동네 목욕탕에 데리고 다니는 일, 유치원에 등원시키는 일, 간식을 챙겨주는 일, 유치원 학예회 행사에 ‘보호자’로 참여하는 일, 이 모두 소년이 공식 사회생활을 하는 낮에 해야 하는 일이다. 즉, 이웃이 소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신경 쓰고 챙겨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모두 낮에 출근하지 않는 사람들, 하는 일이 없거나 자기 시간이 충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1인 가구주인 다섯 살 소년은 그런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잘’ 살아가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살아간다. 소년이 사는 공동주택 이름은 ‘아파트의 맑은 물’, 그가 다니게 된 유치원 이름도 ‘유치원의 맑은 물’이다. 드라마에서 ‘맑은 물’은 ‘좋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말에 목마른 짐승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도덕적으로 선량한 콘텐츠를 찾다가 발견한 드라마. 이 드라마, 여러모로 PC하고 착하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고 내가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내가 선호하는 정치적 올바름과 도덕적 선량함의 장르가 있으며, 정치적/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한계선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드는 것은, 소년을 돌보는 사람들이 ‘가족 코스프레’를 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소년에게 삼촌, 이모, 대리-아빠 행세를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처지/조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만약 등장인물들이 소년에게 ‘유사-가족’ 놀이를 했다면, 나 진정 짜증 났을 것임.
그리고 다섯 살 1인 가구 소년을 중심으로 ‘변변한 직업/가족’이 없는 이들이기에 가능한 능력, 주변을 관찰하고 어떤 이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활동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내는 가능성에 주목했다는 점. 이것도 마음에 든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일본 콘텐츠의 고질병 중 하나인 화해/용서/이해 강박.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게 만든 이에 대하여 피해자가 이해/화해의 마음을 품는 모티프. 이 드라마에 스토킹 에피소드가 몇 개 나오는데, 피해자로서 어떤 이는 관계의 단절과 응징을, 어떤 이는 관계의 유보와 가능성을 택했다. 드라마가 피해자 선택지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문법을 택한 것으로 보고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일본 콘텐츠에서 흔히 보게 되는 가해자 화해/용서/이해 강박은 좀처럼 용납이 되지 않는다.
특히 내가 참지 못하는 지점은, 누군가의 절대적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존재를 앞세워 화해/용서/이해 메시지를 던질 때다. 정치적 올바름과 도덕적 선량함에도 ‘적절함’이라는 게 있다. 이 적정선을 넘으면 올바르지도, 선량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반대의 효과를 톡톡히 내게 된다. 드라마가 지나치게 착함을 추구하면 어떤 지점에서 제대로 망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참지 못하는 게 천지빼까리인데, 그 중 하나가 부적절하게 착한 것.
어.쨌.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1년 연말에, 입만 열면 명언을 쏟아내는 똘똘하고 귀여운 1인 가구 다섯 살 소년, 코타로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다.
내가 이 드라마를 한 번에 끝까지 달렸을 뿐만 아니라, 몇몇 장면을 다시 보기를 몇 차례 했던 것은, 비록 일부 결정적인 부적절함이 있긴 하지만, 그것을 압도하는 90%의 적절함이 차고 넘치며, 무엇보다 주인공 소년이 귀엽고, 또 귀엽다. 그럼 된 것이지. 그게 어디야.
참을 수 없는 착함과 귀여움의 대결에서, 이번 승자는요,
당연히 '귀여움'이지! 코타로 만세!
2021년 1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