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비, 서동주, 오사 게렌발
친구가 좋다고 한 방송 영상을 보다가 내 머릿속에서 저절로 겹쳐진 텍스트 조각을 배열해 보았다. 일단 겹쳐서 배열해 보았는데, 지금 당장 어떤 말을 보태기보다는 조금 더 되새김질해 보려고 한다. 나, 요즘 되새김질 참 즐긴다. 일정 기간 동안 충분히 하고 싶은 만큼 되새김질하고 나면 내 안에서 저절로 어떤 말이 말이 나올 것 같다. 무르익고 삭혀서 진국이 된 것 같은 그런 말이.
언젠가는 올 거라 생각했지만 언제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서 벌써 저의 이별 여행이 찾아왔어요.
저는 살아오는 동안 저는 세상이 너무 어려웠어요.
세상이랑 친해지지 못해서 못 가본 장소도 많고,
못 먹어본 음식도 많고, 공황 때문에 숨도 편하게 못 쉬던 날이 많았어요.
3년 전 형들의 막내로 시작해서, 인우라는 동생을 만나는 동안
맘 편하게 응석 부리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을 만난 것 같아서,
그 어디서보다 마음 편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제 삶에서 이렇게 철없이 굴고 맘 편히 바보짓을 하면서
웃을 수 있는 날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특별한 감정을 많이 느꼈어요.
전 여러분과 함께라서 밖에서 자고 좋았고요,
여러분과 함께라서 밥을 못 먹어도 좋았고요,
여러분과 함께라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일박이일 모니터 하는 걸 진짜 좋아하거든요.
그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형들이 저를 볼 때
그 눈 속에 애정이 잔뜩 묻어있는 게 보여서
그 눈들을 발견하는 게 저를 되게 행복하게 해 줬어요.
편지를 죽도록 길게 써서 영원히 읽어내리다
시간이 다 가버렸으면 좋겠을 만큼 아쉽지만
그렇게 써도 방송에는 놀랍게 짧게 나가겠죠.
지난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아껴주시고
가르쳐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많이 그리울 거예요.
공중파 방송을 잘 안 보기도 하고, 몇 해전 세상에서 떠들썩했던 그 사건, 입에 올리기도 싫은 그 성범죄 카르텔 사건의 범인이 당시 <1박 2일> 등장인물이었기에, 남자들만 우르르 나와서 형, 동생 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꼴도 보기 싫었다.
친구가 이 장면이 참 좋았다고 해서 찾아봤다. 친구는 라비의 영상이 어디가, 어떻게 좋았는지 말하지 않았다. 친구가 언급한 말 중에 이번 시즌 등장인물들이 모두 다 '순한 남자들'이라는 것 외에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어쨌든 영상을 언급할 때의 친구 표정을 보고 직접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여전히 <1박 2일>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이 꺼려지고 싫긴 하지만, 영상을 보면서 라비가 쓴 편지를 필사해 보았다. 내가 그동안 보았던 몇 가지 텍스트와 겹쳐졌다.
Q. 나에게 축구란?
혼자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것 같고,
항상 타지에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이방인'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혼자 지냈던 것 같은데,
그러다가 한국이라는 곳에 왔는데,
고향인데 아는 사람이 없는 고향인 거잖아요.
물론 엄마가 있고, 동생이 있고, 할머니가 계시지만,
항상 혼자다, 외롭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언니들이 너무 저를 확 받아들여주시니까,
언니들한테 속해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굉장히 든든하고요,
제가 어디 가서 막내 역할을 맡겠어요.
제가 어디 가면 항상 왕언니거든요.
그것도 정말 새로운 경험이고요.
언니들이랑 단톡방에서 대화를 하는데,
그냥 축구 이야기로 하루 종일이에요.
우리 다 비슷할 거예요.
요즘 그냥 살아있는 느낌이에요.
정말 신나고 사는 게 재밌고,
살면서 진짜 이만큼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팀 막내였던 '라비'의 편지는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불나방" 팀의 '막내'였던 서동주 인터뷰 내용과 겹쳐졌다. 서동주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막내'로서 그들에게 무조건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함께 신나고 재미있게 축구를 했던 시간 속에서 '소속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한 주 동안만이라도 어린아이 일 수 있었다. 나는 그 기억을 되도록 오랫동안 무겁게 올려 두었다." p.179
라비의 편지와 서동주의 인터뷰는, 오사 게렌발의 <시간을 지키다>에서 주인공이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 한 조각을 회상하는 장면과도 겹쳐진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써주고 보살펴주는 사람 없이, '혼자'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던 저자가 할머니 댁에서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으며 불안감 없이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일주일 간의 기억이다.
내게 이 세 가지 텍스트가 왜 서로 연결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