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언론이 국민의 힘에서 밀려난 이준석을 조명하는 방식에서 '청년'이라는 단어가 꼭 등장한다. '청년'이라는 용어로 한국의 혐오 프로파간다 앞잡이 이준석을 멀쩡한 인간으로 탈바꿈시켜주는 언론의 재현 양상에 대해 메모해 두고자 한다.
1. 언론의 '청년' 프레임이 혐오 앞잡이를 세탁하는 방식
1) '청년'과 '혐오 이데올로그'의 병합
가장 흔한 방식은 이 자가 국민의힘 내부의 힘겨루기로 인해 밀려난 것을 두고 언론이 '청년 정치' 프레임으로 풀어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의 초점을 제도권 정치에서 '청년'이 배제되는 것으로 배치하여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준석은 제도권 정치의 청년 배제의 희생자로 자리매김되어, 그동안 저지른 수많은 악행은 지워지고 가려진다. 여기서 청년이라는 용어는 이준석의 악행과 한국 사회에 끼친 해악을 가려주는 가림막이자, 세탁 세제다.
2) 이준석과 박지현의 병치
최근 MBC <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에서 "이준석, 박지현은 왜?"라는 꼭지를 다뤘다. 제목에 이 두 사람이 나란히 배치된 것을 보는 것만으로 모욕감을 느꼈다. 85년생 이준석, 96년생 박지현은 나이도 성별도 정치 경력도 다른데 '청년'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배치되어 같은 수준으로 취급된다. 부적절한 배치다.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그동안의 활동 이력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에 기여한 바를 고려하면, 이렇게 같이 배치하면 안 된다. 일제강점기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매국노와 구국열사를 같은 급으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고문 피해자를 같은 급으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2. '청년' 범주의 민주화
한국의 제도권 정치에서 청년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청년' 범주가 상상되고 재현되는 전형적 양상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반복되고 있어, 청년 범주의 민주화 방식에 대해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청년'은 제도권 정치에서 배제, 삭제, 누락된 인구 범주 중 하나다. 제도권 정치의 배제와 차별 구조라는 맥락 속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단지 한 두 명 끼워넣기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아야 풀리는 문제라는 뜻이다. 한국의 제도권 정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놓은 근본적 문제가 바뀌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청년' 범주의 동질화 문제다. 언론과 제도권 정치가 '청년'을 상상하는 방식에서 '청년'은 20~30대 비장애인 남성이며, '청년' 내부의 다양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서 여성, 장애인, 이주민, 불안정 노동자 등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청년' 범주의 재현을 통해 2030 비장애인 남성의 주류화/기득권화가 추구된다.
3. 요약 및 제언
1) 분명히 이준석은 확실히 퇴출되어야 한다.
이준석은 여성과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경멸과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대표적인 혐오 이데올로그, 혐오를 내세워 권력을 추구하는 혐오 앞잡이다. 이 자의 악행으로 인해 한국 사회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막론하고 혐오를 해도 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앞으로 이준석과 같은 혐오 이데올로그는 제도권 정치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달라질 수 있고, 이 자를 따라 하는 무리들이 출현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자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다.
2) 이준석과 윤핵관은 아주 가까운 친인척이다.
권성동 말 한마디에 '여성가족부' 성평등 사업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이준석과 척을 진 것처럼 보이는 권성동은 문화적으로 아주 가까운 종족이다. 이준석이 뿌린 죄의 씨앗을 제대로 계승하여 똑같이 여성 유권자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여성을 비인간 취급하기 때문이다.
언론은 '청년'이라는 말로 혐오 앞잡이를 옹호하지 말라. '청년'이라는 말은 '죄'를 씻어주는 세탁 도구가 아니다. '청년'이라는 말이 그렇게 사용되면 그것은 '도용'이다. 제도권 정치와 언론에서 청년 범주가 민주화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