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함'에 관하여
- 프레데릭 페테르스, <푸른 알약>
"처음 이 작업에 몰두할 땐, 이것이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었다. 내 의지와 열망이 뚜렷하다면 말이다. 지금 난 기진맥진한 상태이다. 마치 우울증에라도 걸린 듯. 하지만 뭔가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게 뭔지 설명할 순 없다. 이 공허함이 없다면, 이 길의 끝에 다다랐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프레데릭 페테르스, <푸른 알약>, pp.184~185
시를 공부하는 지인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감정들은 다 유의미하다고, 그 많은 감정을 전부는 아니지만 최대한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고. 30대 초반의 나였다면, '됐고!', '나는 그저 평화를 얻고 싶을 뿐이야!'라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50대 중반의 나는 마음속으로 '됐고!' 대신 '그럴 수 있지'라고 응답했다. 내가 '세상의 모든 감정의 필요성'에 대해 유보적인 응답을 한 이유는 내가 그릇이 작은 쫄보이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감당하고 싶어서, 감당할 수 있어서, 그 많은 고뇌를 감당하겠는가. 다만 나는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는 안락함, 편안함, 안전함을 최대한 누리고 싶다.
감정은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일종의 등불 같은 것이다. <푸른 알약>의 저자는 책 작업을 마친 후 '공허함'을 느꼈고, 그 느낌을 통해 자신의 삶에서 어떤 국면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느꼈던 공허함을 돌아보니, 이런 내 안에서 울렸던 목소리가 이제 들린다. '이제 끝내야 한다',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너는 행복해져야 한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 '수고했다'...
이런 사람이 있다. 내가 '사랑해~'라고 말하면, '나도 나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이런 말이 되돌아올 때마다 약이 바짝 올랐다.
강의를 하다 보면, 학습자의 몰입이 최대치에 도달해서 강의 현장이 일종의 블랙홀처럼 에너지가 고도로 응집된 순간이 생긴다. 이럴 때 나는 가끔 '허튼소리'를 해서 에너지를 흩뿌리고 말랑말랑하게 만든 다음 다시 몰입의 순간으로 안내하곤 한다.
최근 모 직군 대상 직무 교육을 하면서 이런 일이 있었다. 비대면 실시간 온라인 교육이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70명이 넘는 학습자들이 완전히 집중해서 그 공간이 몰입의 블랙홀이 된 순간이라는 것을. 그때, 잠시 말을 멈춘 뒤 이렇게 물었다.
"저 설명 참 잘하지요?",
그랬더니 화면으로 사람들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나도 나를 사랑해요~"
그다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학습자들이 완전히 빵 터졌다. 화면으로 어떤 이는 웃다가 의자가 뒤로 넘어갈 뻔하는 게 보였다. 가끔 나도 이렇게 푼수가 된다. 아니 원래 푼수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본성을 찾은 것인가?
어쨌든, 최근 공허감이 덜 느껴지는 걸 보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조금씩 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래 전에 사 둔 사라 아메드의 Archives of Feelings를 올 여름에는 꼭 읽어야지. 나는 요즘 마할리아 잭슨의 노래를 다시 찾아 듣고 있다. 마할리아 잭슨은 내 영혼을 가득 채워주는 아티스트다.